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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자기계발서와 간증의 불의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3. 28. 05:29

단지 치열함으로부터 살아남았다는 이유가 그 사람이 가장 강했다거나 뛰어났음을 증명하진 않는다. 살아남은 자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을 듣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순 있겠지만, 대부분 그 노하우가 다른 시공간에서도 재현되리란 보장은 없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의 “히스토리”를 마치 “비결”인 것처럼 둔갑시킨 건 우리다. 살아남고 싶고 이기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우리들의 속마음이 투영된 욕구의 열매다. 물론 그 생존자의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들의 속마음을 읽고 그것을 장사의 수단으로 삼아버린 그 사람의 간사함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계는 시중에 널리고 널린 자기계발서가 존재할 수 있고 돈벌이가 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사람의 심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성공하고 싶은 거다. 그런데 그 방법을 모르는 거다. 그래서 성공 경험이 있는 사람의 경험담을 모방하거나 참조하면 자신의 성공을 이룰 수 있을거라 기대하는 거다. 좋다. 누구나 성공을 바란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심리의 이면이 정의롭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 불의한 심리는 자기계발서가 지속적으로 잘 팔리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동시에, 자기계발서를 여러권 탐독해도 자신에게는 그 성공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도 된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우리들의 성공하고픈 욕구에는 다분히 너무나 뻔한 정정당당함이 제거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희귀한 확률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가 자기계발서를 탐독하는 주 이유가 되어 버린다. 한마디로 노력과 성실, 그에 들어간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시간은 너무나 뻔한 성공 비결이기에 자기계발서로 장사하려는 작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수단으로 보일리 없다. 이것은 자기계발서를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매력적일리 없다. 묻혀버린 중요함, 잊혀진 정의. 돈 벌어 먹고 살자는 이기적인 욕구가 짓밟아버린 참혹함이다.


신앙인들의 간증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나 또한 그랬었지만, 어떤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 마침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고 (장로나 권사 등 중직자라면 더욱 더 그럴싸하다), 그 사람이 전국을 순회하며 간증을 하는데 때마침 우리 동네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나도 흥분했었더랬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흥분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나의 성공을 위함이었다. 나도 저 사람처럼 성공할 수 있겠다는 바램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교회 중직자라는 명함은 그 헛된 바램을 증폭시키는 수단에 불과했었다.


간증은 장사가 아니다. 성공담이나 영웅담을 들려주는 시간이 아니다. 아직도 주위엔 그런 사람들이 날뛴다. 이러한 트랙은 마치 한국 기독교 내의 “정통” 트랙 같아 보이기도 한다. 때마침 루터의 대교리문답을 읽었다. 제 2계명에 나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지 말아야 한다는 계명은 나에게 많고 깊은 묵상을 하게 했다. 루터가 21세기에도 버젓이 유행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간증 장사꾼을 보면 뭐라고 할까. 더러운 돼지새끼가 지 잘난 맛에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으며 자기 배만 채우고 다른 신실한 신앙인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치므로 저멀리 동산 밖에 쫓아내버려야 마땅하다고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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