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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세계관과 인간의 한계로부터 겸손을 배우다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3. 28. 05:29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한번에 설명해 줄 수 있는 통합된 세계관을 원한다. 유아 시기에 무의식적으로 생겨난 세계관은 성장을 거듭하면서 경험을 통해 계속해서 진화해 나간다. 이 과정은 본능적이다. 이유를 묻고 답을 찾는 행위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의 발생 확률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높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이라도 그 계획은 과거의 경험에 기초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의 발생이 특정한 규칙이나 패턴을 가지지 않는 이상, 그리고 그 규칙이나 패턴을 정확히 계산해 내지 않는 이상, 미래를 대비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 틀림없다.


진화론적으로 본다면 다행일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의 발생과 그로 인한 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또 다른 미래의 예측 불가능한 사건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때문에 인간은 불안정함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관으로 모든 걸 설명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은 이렇듯 원하지 않던 다양성의 발현과 불안정함의 숙명에 늘 대항할 수 밖에 없었다.


저항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능으로 수정/보완되어지는 세계관은 다양성과 불안정함 덕분에 더욱 진화했다. 살아남으려면 더욱 교묘하고 지혜로워야 했다. 이상을 제시하고 추구하는 척하다가도 부닥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선 이상을 굽히기도 해야 했으며, 오히려 반대로 현실 부정도 해야 했다. 진화라는 것 자체가 self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이지만, non-self 의 영향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숙명이다. 빛의 속도는 자신의 속도에 상관없이 항상 일정하듯, 어쩌면 우리의 이러한 거듭되는 진화 자체도 늘 인간의 숙명의 속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한낮 미물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그것은 창조주와 창조물의 거리이며, 조물주와 피조물의 거리와도 같을 테다. 진화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 진화에 의해 갖게 되는 좀 더 완성적인(?) 세계관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그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자는 것이다. 회귀의 원리일까. 결국은 우리의 질문과 답은 '인간'으로 돌아온다. 신이 아닌 인간. 한계를 가진 인간. 다만 그 한계가 무엇인지 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알려고 아등바등 대는 인간. 그저 한 발자국 스스로 일구어 냈다고 교만해져서 앞의 열 발자국을 예측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 믿고 남들까지도 그 믿음에 동참하게 만드는 인간. 자기와 비슷하거나 자기의 세계관의 약점을 드러내는 다른 세계관의 등장에 분노하여 싸움을 일으키는 인간. 죄로 시작했음에도 무엇이 죄인지 인지조차 못하는 인간. 바로 우리다.


통합된 세계관을 추구하는 건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의 본능이겠지만, 그 본능 이전에 그 본능이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이 어쩌면 진정한 '겸손'의 모습이 아닐까. 겸손이 아닌 교만에서 출발한 세계관의 형성과 진화의 열매가 과연 신뢰할만하며 의로울 수 있을까. 교만을 감추는 가식된 거룩함이 거룩함과 경건함의 본질을 파괴하고 그 자리를 꿰차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만 하는 세계관은 무엇일까. 과연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과 죄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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