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faith

한 분, 다른 이름, 다른 모습.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3. 10. 16:12

한 분, 다른 이름, 다른 모습.


"But there I have another name. You must learn to know me by that name. This was the very reason you were brought into Narnia, that by knowing me here for a little, you might know me better there."

― C.S. Lewis, 'The Chronicles of Narnia'


성장하여 이제 더 이상 나니아로 올 수 없는 루시와 에드먼드와의 마지막 작별 순간에 아슬란이 에드먼드의 질문에 했던 대답이다. 에드먼드는 아슬란을 현실 세계에서도 만날 수 있냐고 물었었다. 그러자 아슬란이 대답했다. 현실 세계에서 아슬란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그 다른 이름으로 아슬란을 아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고. 바로 이것이 루시와 에드먼드가 나니아로 오게 되었던 이유라고. 나니아에서 조금 알게 된 아슬란의 존재를 현실 세계에서는 더 잘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얼마 전 가족과 함께 '나니아 연대기'를 뒤늦게 영화로 봤다. C. S. Lewis 라는 작가의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동물인 사자가 예수님으로 분하여 이야기가 만들어져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몇 년을 뜸들이다가 보게 되었다. 영국식 영어로 말하는 아이들의 말이 잘 안 들려 이야기 흐름과 눈치로 대충 알아 들었지만, 미국식 영어로 말하는 아슬란의 말은 또박또박 잘 들렸다. 특히 아슬란의 저 마지막 명문을 듣고 나서 가슴이 묵직해졌다. 큰 감동이 몰려왔다.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현실에서 아슬란의 다른 이름은 예수님일 것이다. 하나님일 것이다. 그러나 난 그것을 넘어,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을, 다른 모습들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어른이 되어가며, 아니 어른이 되고 나서도 점점 철이 들어가며, 하나님이 많은 이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한 분이라 믿지만, 그분은 여러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나신다. 때로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사랑, 용서, 긍휼, 해방, 구원, 치유, 회복, 소망, 환대 등등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물론 그런 행위 자체가 하나님과 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 하나님의 의나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처럼, 말씀이신 하나님께선 정의롭고 선한 행위, 또는 그 행위를 행하는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나 행위자를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알려지고 퍼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어떤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존재라고 말하면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한국 보수 교회에서는 마치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거나, 우리들이 그런 행위만 하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었다. 삶과 신앙이 독립적이라고 대놓고 가르치진 않았으나, 암묵적인 묵인으로 기독교인의 삶과 신앙은 철저히 이분법적으로 분리가 되어 있었다. 교회는 '신앙'적인 측면만 책임지면 되는 것이지, '삶'적인 측면은 마치 자기 관할 구역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선 교회로 와야만 했으며, 하늘의 상을 받기 위해선 교회 생활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정작 하나님은 교회 건물이라는 공간에 제약을 받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런 모순되는 가르침을 받아오며, 학교나 직장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기독교인으로서, 삶에 대한 자세는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모습인지 알 길이 없었다. 교회 생활을 시간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생각은 압박감에 짓눌려 언제나 그 시도는 실패로 끝을 맺었다. 그에 따라 죄책감은 가중되어만 갔다. 


이젠 다행히 그 울타리에서 탈출하여 나의 모든 일상에 흩어져 있는 작은 조각에서도 하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작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도 함께 하시며, 내가 가는 그 어느 곳이나, 내가 가지 않는 더 많은 곳에도 존재하신다. 같은 순간, 다른 장소에서 하나님은 다른 모습으로, 때론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신다. 바로 이것은 무소부재의 의미이자, 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모습을 알아가는 한 가지 예가 되겠다.


더 많은 그분의 이름과 모습을 알아가길 소원한다. 어쩌면 인간의 지혜란 이를 알아가는 과정의 깊이와 풍성함에 비례하진 않을까?

'in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언자?  (0) 2018.03.15
분리됨  (0) 2018.03.12
일상  (0) 2018.03.07
프로의 인정  (0) 2018.03.03
일상, 하나님나라!  (0) 2018.02.26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