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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김회권 저, '모세오경' 중 민수기 편을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5. 26. 14:59

죄와 하나님의 신실하심.


김회권 저, '모세오경' 중 민수기 편을 읽고.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 중 네 번째 책인 민수기 편도 다 읽었다. 책갈피는 1032 페이지를 가리키고 있다. 이제 마지막 책인 신명기 편이 남았다. 아직 약 350 페이지 남았다. 이 벽돌 같은 책을 나처럼 처음부터 죽 무식하게 읽어나가는 사람은 아마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처럼 신학의 문외한이 신학에 관심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상황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도 신학을 전공했다면 아마 부분적으로 필요한 곳만 찾아서 참고하는 정도로 이 벽돌을 대하지 않았을까. 때로는 이렇게 무식한 게 기적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거북이가 개근상을 받으며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이다.


민수기를 읽어냈으니 흔적을 남기기 위해 조금 끄적거려 본다. 먼저 민수기가 어떤 책인지 설명한 부분 중 나에게 와 닿은 부분을 발췌해본다.


| 민수기는 시내산에서 1년간의 율법 교육을 받고 가나안을 차지하는 전쟁에 참전할 이스라엘 장정을 징집하는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민수기의 주무대는 광야다. (중략) 민수기의 주제는 광야 속을 걸어가는 광야 여정과 그 가운데 맛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징계, 공급, 치유, 연단, 그리고 욕망과 정욕대로 내버려 두심을 통해 드러난다. 여기서 광야는 강력한 은유다. 현대인의 삶은 광야 같은 세상을 순례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안식을 누리는 천국이 아니라 영적인 쟁투와 연단과 징계가 쉼 없이 이루어지는 연옥적인 광야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제목이 '광야에서'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민수기는 광야에서 보낸 38년간의 징계, 교육, 훈육과 연단, 심판과 용서의 경험으로 점철된 시간에 대한 압축적인 기록이다. (중략) 민수기는 의롭다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법적인 자유가 아니라 품성적인 자유를 체질화시키는 데 얼마나 많은 연단과 훈련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중략) 민수기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곧 자유케 된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노예근성과 노예의지의 진면목을 만나면서 절망하고 좌절하고 불평하는 이야기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불순종과 불평, 불신앙 사건을 기록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인내를 동시에 기록한다. (중략) 민수기의 신학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연단과 성화를 위한 훈련의 신학이다. | 831-832 페이지, 부분 발췌.


유월절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적인 노예 신분으로부터 값없이 해방을 받았지만, 내적인 노예근성으로부터는 톡톡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 민수기는 광야를 경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며 연단되고 성화되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하나님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고 있던 노예근성과는 공존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던 뿌리깊은 노예근성은 광야와 성막 경험을 통해 불신앙과 불순종, 불평과 원망으로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것들은 반드시 뿌리 뽑혀져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장장 38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모세 뒤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 그와 함께 가데스 바네아 반역 사건에서 불순종하지 않았던 갈렙, 이 둘을 제외한, 모세와 아론을 포함한 광야 1세대가 모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기간이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민수기를 여러 번 읽었지만, 이번에 이렇게 '모세오경'과 함께 읽고 나서 내게 남은 키워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근성과 불순종, 그리고 그것들을 치유해 가시며 끊임없이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에만 급급했던 10명의 가나안 정탐꾼들의 죽음이나, 모세와 아론에게 저항했던 고라 자손 출신 반역자들의 죽음, 그리고 므리바 사건으로 초래된 아론과 모세의 죽음까지, 이 모든 죽음들이 명확하게 다 이해되진 않았지만, 그 죽음들의 공통점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불순종했거나, 자신의 의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임을 볼 때, 내게 남는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바로 스스로 소멸되지 않고 늘 징벌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죄의 속성이었다.


이 죄의 속성은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셨던 불뱀-놋뱀 사건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회권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 이 사건은, 죄 용서는 다른 사람이 죄짐을 져줄 때 일어난다는 원리를 예해한다. 이스라엘의 대속죄일 제사 때에 이루어지는 죄 용서는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죄를 지고 가기 때문에 가능하다. 죄는 스스로 소멸하지 않고 죄에 대한 징벌이 이루어져야 그 효력을 잃는다. 죄는 죄인에 대한 정죄권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불뱀에 물린 자들의 죄를 놋뱀에 전가시켜 정죄 효력을 일시 정지시키신 것이다.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자신을 문 불뱀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믿는다. 신의 가슴을 찢는 죄의 정죄 효력에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놋뱀 복음은 참으로 복음이다. 기독교는 자신의 죄가 갖는 그 무시무시한 정죄력에 몸서리치게 괴로워해 본 사람에게 참 복음이다. | 953 페이지, 부분 발췌.


이런 죄의 속성을 묵상해 보고서야 난 민수기 전체에 흐르고 있는 성막에 대한 강조와 레위 지파에 대한 특권 부여 및 보호가 조금 더 이해가 되었다. 사실 신학을 잘 모르는 내겐, 레위 지파에 대한 지도력과 권위를 하나님께서 연거푸 직접 세워주시는 부분이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 지파의 중보와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 자체가 바로 제의적 신정공동체임을 상기할 때, 성막과 성막 관련 일에 배타적인 일을 맡은 레위 지파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은 이해가 가능했다.


김회권 목사님도 강조했듯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광야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홀로 광야에서 하나님을 독대하며 노예근성으로부터 해방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광야 한 복판, 거기서 행군했던 이스라엘 12 지파 진열의 한 복판에 위치했던 성막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리 안에는 성령이 거하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막, 눈에 보이지 않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우리 내면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에 더욱 민감해져서, 성령과 무관한 삶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성령보다 앞선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오늘도 성령께 간구하자. 우리의 지각과 감각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하여주소서. 나를 넘어서고 남을 향하는, 그래서 모두를 살리는 복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죄악이 관영한 현장 한 복판에서 하시는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소서. 분별력을 주옵시고, 희생으로 삶에서 복음을 실천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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