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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소명의식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5. 30. 08:42

소명의식.


직업을 소명, 즉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는 자세는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 역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일터 현장은 작은 세상과도 같다. 어느 곳이나 피라미드 구조가 존재하며, 소위 갑질로 알려진, 가진 자들의 횡포는 지겨운 일상이 되어 식상할 정도로 사회에 만연해있다. 법과 질서를 만들어놓고 서로 지키며 개인의 이익 뿐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며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아이들 도덕 교과서에나 적혀 있는 이상일 뿐이다. 학교 시스템에서 갓 나온 아이들이 사회에 진입했을 때 겪는 그 괴리감은 지금 어른이 된 기성세대 역시 뼈아프게 공감하는 바일 테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는 어두운 현장 경험을 하며 좌절과 고통 속에서 커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교과서에 적을 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말이다.


공자의 논어에 따르면, ‘두 세명이 모여도 그 가운데 스승이 있다.’고 했다. 이를 현장감 있게 21세기에 맞춰 부정적으로 번역해 보자면, ‘두 세명이 모여도 그 가운데엔 갑질하는 자가 있다.’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작든 크든, 고학력을 요구하든 필요없든, 조건에 상관없이 우린 위계질서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러한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환영한다. 어른의 세계로 온 걸.”


개인의 편차가 있겠지만, 발빠른 아이들은 이내 그 현실에 적응하여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거짓과 불의가 관행이라는 이름의 옷을 입고 있는 현장에서 열매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개인의 번영이다. 한마디로 출세다. 얼마나 한 개인이 공동체나 전체 사회에 이바지했는지는 추후의 문제다. 그것은 어쩌면 해석학적인 차원으로 밀려날지도 모른다. 개인의 성공이 이 시대 현장에서의 열매인 것이다.


성공와 번영이라고 하면 긍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그것들이 만들어진 과정을 들여다보면, 처음에 가졌던 그 긍정적인 느낌은 퇴색되기 마련이다. 성공과 번영은 돈과 명예로 대치될 수 있으며, 뭇 사람에 대한 폭력과 희생이 불필요하게 수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즈음이면, 그 사람이 이룬 성공과 번영의 뒷면엔 거짓과 불의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성공과 번영이 아름답게 여겨진 이유는 돈과 명예 이상의 그 무엇이 가치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돈과 명예만을 추구한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죄책과 수치를 조금이라도 느끼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의 찬사를 받은, 무대 위의 그 성공과 번영의 사람에게서 다른 가치들은 사라져버리고, 돈과 명예만으로 이루어진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을 마주할 때, 우린 그제서야 현실의 단면을 목도하게 된다. 사회의 약자들에게서만 아니라 강자들에게서 우린 이 시대의 추하고 악한 모습을 여실하게 보는 것이다.


그렇다. 나 역시 성공과 번영을 위해서 살아왔다. 성공지향적인 가치관이 나의 엔진이었던 셈이다. 미국에 온 이유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오래전부터 예정된 일인 것 같다고 떠벌리며, 난 나의 미국행을 선전했었다. 불과 7년 전의 일이다. 한국에서 교회 다니는 가방끈 긴 사람이 받는 대우를 실컷 누리며 그것이 믿음 좋은 것처럼 위장하여 사람들을 잘도 속여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속아줬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거룩한 이유들로 나의 이기적인 욕구를 숨기는 데에 몰입하고 있었으니까.


힘든 적도 많았다 (#가치관이바뀔때까지). 남들이 흔히 겪지 않는 경험들을 짧은 시간 많이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버텨냈다. 내겐 그 현장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치관의 변화를 많이 겪은 지금의 내가 볼 때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해서, 그것이 꼭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젠 안다. 최근에 읽었던 민수기에서 나오는, 예언자 발람의 이야기가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성공지향적 가치관으로 똘똘 뭉쳐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나의 위장술로 이용했던 나의 과거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을 뿐, 하나님이 원하셨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선 그 가운데서도 나를 지키시며 인도하셨지만, 내가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나의 성공 욕구에 세뇌당하지 않고 그것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물었다면, 어쩌면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치 않은 악한 경험들을 없이 하시고, 더욱 선한 길로 인도하시지 않았을까.


난 소명의식을 잘못 이해했고 잘못 사용했던 경우 중 하나일 것이다. 내 욕심으로 선택해놓고 그것을 소명으로 위장시켰고,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으면 언제나 원망과 책임의 화살은 내가 아닌 하나님을 향했었다. 하나님이 보내셔놓고 왜 이렇게 무책임하시냐, 이렇게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이국 땅에서의 생활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게 하시기냐, 등등 내가 사용했던 소명의식은 그 정도 따위의 변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일터 현장으로 부르신 것은 성공하라거나 최고가 되라고 부르신 게 아니다. 그런 목적은 나의 욕심과 결부되어 위장된 모습이고 나의 합리화에 의한 해석일 뿐,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그 현장에서 어떻게 일을 해나가는지에 있다고 믿는다. 복음의 영향력은, 하나님백성의 거룩함은 우리가 목적이라고 부르는 성공이나 번영에 있지 않다.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일터 현장에서의 성실함, 인내, 그리고 함께 하는 뭇 사람들을 대하는 나의 자세에 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역시 우리가 과정이라 부르는 이러한 모습들에서 나타나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일터 현장의 일상 속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것이 선한 영향력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전도과 선교다.


조금씩 내 욕심을 내 욕심으로 인정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목적이 예전보단 잘 보이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가는 건 나를 넘어서 남을 향하는, 그래서 모두를 살리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다. 거짓과 불의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믿고 선한 영향력을 나의 일터 현장에서, 일상에서 살아내며 드러내는 것이다.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 나는 언제쯤 성숙한 어른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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