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faith

판단하지 않는 곳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6. 28. 01:30

판단하지 않는 곳.


사람이 nice하다고 해서 greedy하지 않다는 법은 없다. 종종 이 두 가지 캐릭터는 당황스럽게도 동일 인물에게서 발견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대할 때마다 난 그 사람에 대해 실망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내 안에 고정되어 있었던 선입관, 즉 nice와 greedy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섬뜩한다. 이런 의외의 순간들은 예언자적인 메시지가 되어 우리 안에 잘못 뿌리내린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이다. 어떤 사람은 rigid하지만 humble하다. 또 어떤 사람은 stubborn하지만 sacrificial하다. 의외로 우리 주위엔 우리의 선입관에 어긋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일면만 보고서 사람을 판단해선 결코 안되는 이유다. 


우리의 선입관은 다음과 같다. 아마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처구니 없을만큼 굉장히 단순한 이분법적인 구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Nice한 사람은 greedy할 리가 없고, rigid하거나 stubborn한 사람은 humble하거나 sacrificial할 리가 없다는 논리다. 우리도 모르게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이 신비로운 인간의 캐릭터까지도 두 세계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모두 자기중심적인 잣대로 정의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Nice하다는 의미는 그 사람이 ‘나’에게 대한 태도를 말하게 되며, humble하거나 sacrificial하다는 의미 또한 그 중심과 대상은 일차적으로 ‘나’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눈과 경험으로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다. 그러나 그 제한이 타인을 함부로 재단해도 된다는 증서가 될 수는 없다.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는 기독교의 논리는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또한 사람은 일관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nice한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nice한 건 아니다. 조금 더 극단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면,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선한 생각과 행동만을 하는 게 아니고,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악한 생각과 행동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람 안에는 여러 자아가 언제나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내면세계에서 이미 경고등이 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조심해야 한다). 사람은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닭이나 금붕어가 아니다. 이중 삼중으로 실타래를 꼬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다. 한 마디로 사람은 신비다. 모르는 것이다. 자기자신도 스스로를 뭐라고 규정하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 인간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자신의 그 stupid한 이중잣대로 쉽게 규정해 버리는 건, 어쩌면 선입관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selfishness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라는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자기중심적인 죄, 교만, 스스로 높아지려하는 욕구가 심화되어 남을 죽이고 파괴하고 제거하는 데까지 확장된 모습이 바로 우리가일상에서 숨쉬듯 저지르고 있는 남을 ‘판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죄는 진화해서 악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악한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판단하는 자의 죄에서 기인한다고 난 믿는다.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강한 자나 약한 자가 그 다름을 우열 관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 약한 자가 강하게 되려고 발악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가난한 자가 생겨도 구제되고, 억울한 자가 생겨도 신원되는 그곳. 악한 자가 댓가를 치르고 고침받게 되는 참 은혜가 임하는 그곳. 그곳은 성경에서 말하는 사자와 양이 함께 뒹구는 곳이고, 양이 사자가 되려고 발버둥치지 않는 곳이며,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하나님나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먼저 맛보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모델로 먼저 살아내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결코 사적인 유익과 안녕만을 취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서는 안되고, 언제나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게 구별된 존재로서, 열방으로 흘러가는 삶을 살아내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가슴엔 언제나 머지않은 미래에 성취될 소망을 품고서, 작은 유익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와 공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개인의 작은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노력이 수반되는 그곳, 그것이 기쁨이 되는 그곳. 하나님나라. 아, 가슴 설레이지 않는가.

'in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진 피터슨을 읽다 - 교회에 대하여  (0) 2018.09.12
교회  (0) 2018.08.21
해소  (0) 2018.06.26
일치  (0) 2018.06.26
김회권 저, '모세오경' 중 '신명기'를 읽고.  (0) 2018.06.23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