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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다시 전철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8. 31. 05:39

다시 전철.


한낮의 최고온도는 이제 화씨 90도를 넘지 않는다. 조만간 또다시 100도를 육박할 날이 드문드문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많이 내려가 퇴근 후 에어컨을 트는 일은 이제 없다. 잠자리에 들 때도 얼마나 많이 쾌적해졌는지 모른다. 조금 더울 땐 선풍기나 간간이 틀어주면 될 일이다. 치열했던 여름이 가고, 내가 좋아하는 가을이 오고있다는 사인이다. 겨울로 이어지지 않는 캘리포니아의 가을이지만, 그래도 난 가을이 좋다. 난 추워지는 길목을 좋아한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전철역을 향한다. 차가 아닌 전철을 다시 이용하기 위해서다. 2주간의 휴가 후 거의 2달 동안 더위 때문에 일부러 운전을 해서 출퇴근을 했다. 전철역까지 걷는 거리와 시간, 그리고 전철역에서 목적지까지 걷는 거리과 시간이 합치면 25분 정도 소요되기 때문이다. 100도 안팎의 날씨에서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다시 가능해진 것이다.

전철을 타고 익숙한 동작으로 책을 꺼내든다. 오늘 아침 집에서 나오기 전 손에 집어든 책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다. 예전에 영화로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원작을 읽어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오래동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도 극찬한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세계로 들어가본다.


다시 본 창밖의 산은 여전히 늠름하고 멋졌다. 음영이 진 산의 모습은 언제나 내게 영감을 준다. 책을 덮고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운전을 할 땐 옆으로 스쳐지나가던 장면들을 지금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정면에서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 순간 잠시 정지된 느낌.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다.


전철역에 내려 걸어오는 길가, 공사 중이던 1층 건물이 3층으로 높아졌다. 건널목을 건너 만난 자주 보던 홈리스는 카트에 잔뜩 짐을 실어둔 채 여전히 혼자 스피치 연습을 하고 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열심히 진지하게 하고 있을까? 제스처를 보면 무언가를 (어쩌면 누군가를) 저주하는 듯하다. 그녀는 아마 홈리스가 되기 전에 웅변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그럴싸한 옷을 입고 바닥 전체가 보도블럭으로 이루어진 유럽의 어느 한 광장에 있다면, 아마 사람들이 몰려와 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연구소 앞이다. 자, 하루가 시작됐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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