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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더 큰 고통?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10. 2. 06:56

더 큰 고통?


알고보면 사연 없는 사람 없다. 멀쩡하게 아무 일 없이 사는 사람 같아보여도 술 한 잔 기울이며 속에 있는 말 나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연이 있다. 그로부터 얻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들도 많고, 그 상처가 지금의 그 사람 캐릭터를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어른이 되는 과정 중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면서 과거에 받았던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상처 없는 사람 없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평등하다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권리와 의무를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의 존재는 모두 불완전하고 유한하다. 존재의 신비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이 불완전한 다양성에서부터 기인할지도 모르겠다.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회심을 경험했다는, 나름 신앙심 깊고 진정성 있다고 하는 신자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해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자신의 과거 경험을 진솔하게 터놓고 나누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어온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새롭고 놀라웠다. 고통은 과연 인간을 생각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과연 각 개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깨닫게 하신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재미난 현상을 발견한 적도 있다. 서로가 다 자신의 과거사를 나누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때를 떠올리며 (종종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감사함을 고백했다. 그런데 마치 누가 더 극적인 어려움을 겪었는지 보이지 않는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느낀 적이 있었다.


그 모임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 날 나눈 자신의 과거 경험담을 여러 번 공개하며 나눈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모임에서는 자신의 경험담이 모임의 주요 화제가 되었을 것이고, 덕분에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모임의 분위기를 압도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참석한 그 모임은 마치 그런 주인공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들 얼마나 간증을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하고 거기서 뽑아낼 수 있는 교훈을 적재적소에서 잘 말하는지, 마치 누가누가 더 큰 고통을 당했으며 누가누가 더 센 하나님을 만났는지 내기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가 말없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예상해 보건데, 언제나 주목받던 자신의 이야기가 그저 별 것 아닌 이야기로 대우받는 듯한 기분이 불편했던게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다가 나중엔 마치 자기가 그 사람의 상처와 아픔을 다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타자를 공감하는 아름다운 행위로 보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날따라 그 행위는 내게 다르게 읽혔다. 마치 ‘음.. 네가 경험한 정도는 내 경험에 비할 바 못되기 때문에 난 너의 그 고통 다 이해할 수 있어.’ 라고 말없이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난 그 모임에 참석한 은혜로운 회심자들 가운데서 알력을 목격한 것이었다. 그때의 복잡한 심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간증할 땐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은혜받은 경험을 나누는 건 좋으나 그것으로 남에게 은혜를 끼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독이 되고 나르시시즘의 도구가 된다. 간증이 자신이 주목받는 통로가 된다면 그 간증은 이미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간증은 한낱 은혜팔이에 지나지 않는게 아니다. 과거의 그 경험이 거짓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때 경험했던 은혜가 자신이 경험했던 은혜의 마지막 순간은 아니었는지 곰곰히 따져볼 필요는 있어보인다. 지속성이 사라진 과거의 이벤트성 은혜는 장사 수단밖엔 안된다. 결국은 ‘오늘’이다.


장사해서 주목받고 싶지 않다면, 은혜팔이는 관둬라. 차라리 현재 은혜를 못받고 있다는 얘기를 진솔하게 하라. 당신의 영웅담 얘기를 간증이라는 타이틀로 옷입히지마라. 한낱 나르시시즘의 표현을 은혜를 나눈다는 식으로 거짓표현하지마라. 오늘 내가 어떤지 꾸밈없이 보여주고 나눠라. 과거의 그 사건을 유일한 은혜이거나 가장 커다란 은혜인 것처럼 말하지도 마라. 그건 겸손도 아니요, 오늘도 우리 옆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스스로 소멸시키는 일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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