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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분별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10. 25. 12:32

분별.

종종 약함과 악함은 같은 얼굴을 가진다. 이 곤혹스러운 순간, 분별력은 귀중한 지혜가 된다. 악함이 약함의 옷을 입고 약함의 혜택을 누리며, 숨어서 세력을 키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약함이 악함으로 오인 받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참히 짓밟히는 경우도 있다. 약함은 사라져버리고 악함만이 남는다. 전자의 경우가 당사자의 악함이 작동한 결과라면, 후자는 상대방의 악함이 작동한 결과다.

우리가 끊임없이 분별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악의 실체에 기만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자기 이익에 눈이 멀어 거짓겸손과 같은 양의 탈을 선택적으로 써가며 실체를 교묘하게 은폐하고 유지해가는 적극적인 악도 악이지만, 그 둘을 분별할 줄 몰라 악에게 늘 선수를 빼앗긴 채 악의 활동무대를 자유롭게 마련해주는 것 역시 악에 간접적인 동조를 하는 수동적인 악이다. 이때 무지는 곧 악의 시녀가 된다. 근시안적인 눈 역시 마찬가지다. 지혜롭지 못한 건 언제나 악에 이용당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혜롭지 못한 자는 언제나 지기 안위만을 생각한다.

약자라고 악을 행해도 된다거나, 약자이니까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궤변일 뿐이다. 약함은 결코 악을 행해도 되는 면허증이 될 수 없다. 악이 어디나 있듯, 선도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강함이 어디나 있듯, 약함도 어디에나 있다. 강함과 약함이 선과 악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결코 그것이 선과 악의 기준을 한 쪽으로 옮겨 놓는다든지, 선과 악을 선택할 때 핸디캡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디서나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건 다분히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처럼 언뜻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양보할 수 없는 진실이어야만 한다. 분별력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 선은 어디서나 선택할 수 있고 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악이 어디서나 행해지듯 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이 분별력의 공급처가 성령이라 믿는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야 가능한 것이며,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하며, 선한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상에서 성령을 구할 때는 많은 부분 분별력을 얻기 위해서다. 물론 평소에 눈과 귀를 열고 지속적인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런 기본 없이 성령을 구한다는 짓거리가 어쩌면 기독교와 성령의 힘을 영지주의식으로 만들어놓은 건지도 모른다. 치우친 나의 눈과 마음을 가능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선과 악을 나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기준으로 해서 분별할 수 있도록, 약함 가운데 깃든 악함을 가려낼 수 있도록, 나는 성령께 간구한다. 분별력은 결코 지식으로만 얻을 수도 없을 뿐더러, 본인이 납득되지 않는 결정을 해대면서 분별력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로봇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별력을 공유하여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인간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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