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faith

견진 성사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10. 2. 02:51

견진 성사.

어느덧 매주 성공회에 출석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아직 신기하기만 합니다. 벌써 4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주일 성수하고 있습니다. 네, 자랑 맞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가나안 성도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성공회를 출석하고 있는 이유는 성공회가 답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이 다할 때까지 성공회 신자로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현재로선 할 수 없습니다.

수년 전 인생의 두 번째 회심을 경험했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기존에 제가 몸담고 있던 한국 기독교 (특히 장로교단)의 민낯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기와도 일치했습니다. 쉬쉬해왔던 불안함을 더 이상 수면 아래 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못 본 체 계속 덮어두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서 부역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의 일상을 이룰 정도였던 한인 교회를 (저는 드러머로서 찬양단으로 섬기기도 했습니다) 과감하게 떠나기로 마음 먹었던 건 결코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1년 쯤 된 것 같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되기로, 나그네가 되기로, 그래서 자유로이 그 동안 책으로 읽어오며 깨달았던 하나님나라와 예수의 복음을 천천히 제 일상과 세상을 함께 올려두고 의심하고 생각하고 따져보고 묵상하며 살아내려고 노력하며 지냈었습니다. 일요일이면 때론 자연으로 나가기도 했고, 때론 집에 틀어 박혀 읽고 있던 책에 더욱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삼분의 이 정도의 일요일은 여러 교회들을 방문했었습니다. 소위 대형교회라는 곳도 여러 군데 구경을 가봤고, 미국 여러 교회에도 방문해봤으며, 메노나이트에도 찾아가 함께 예배를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성공회는 저의 리스트 안에 없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성공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건 참으로 뜻밖의 일인 거지요.

이번 주 일요일 성공회에서 견진 성사를 받기로 했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선택입니다. 개신교의 입교와도 비슷한 의미인 것 같은데, 저는 한 번도 직접 보지도 참여해보지도 못했지만, 제 머리 속엔 헤세의 작품 덕분에 이미 그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신비감이 왠지 더한 것 같은 묘한 기분도 듭니다. 견진 성사는 세례 성사를 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으며 주교로 섬기는 사제만이 그 의식을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견진 성사의 역사적 배경을 따르기 위해서라거나, 아니면 제가 문학책에서 읽었던 신비감 때문이라거나, 하는 이유로 견진 성사를 받기로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아주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기념하고 싶은 거거든요. 이성과 합리만이 아닌 몸으로 참여하는 전통적인 예전의 의미가 저를 다시 교회로 불러들였고, 그 효과가 단발적이지 않고 몇 달째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변하지 않을 것 같기에, 이를 기념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중학생 때 장로교에서 처음 받았던 세례, 군대에서 거의 일방적 폭력으로 초코파이와 요구르트와 물물교환 용도로 받았던 집단 세례, 클리블랜드에서 너무나 힘들어할 때 아내와 새로운 마음을 다잡으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며 그 당시 다녔던, 남침례교단에 뿌리를 둔 미국교회에서 연중행사로 가는 호수에서 베풀었던 전신이 몸에 잠기던 침례, 그리고 이번 주 일요일 받게 될 견진 성사까지. 세례와 같은 의식을 더 많이 행한다고 더 큰 복이 온다거나 하는 그 따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군대에서도 클리블랜드에서도, 또 성공회에서도 이런 세례나 성사라고 부르는 의식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백성의 정체성이 사라진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교인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기념하며 저의 결단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위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워낙 둔한 놈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몸으로 직접 참여하는 예전이 저는 마음에 들고 그 가운데 더욱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만 같기도 하거든요. 머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몸이 기억할지도 모르는 것이고요. 습관이 영성이라는 말처럼 어쩌면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대로 욕망하는 대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니까요. You are NOT what you think BUT what you love, perhaps.

'in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심: God-centered humanist  (0) 2019.10.21
사람을 살리는 일  (0) 2019.10.09
은혜  (0) 2019.10.02
그리스인을 넘어 그리스도인으로 (이성과 믿음의 조화)  (0) 2019.07.23
하나님나라  (0) 2019.07.23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