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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산 위의 동네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11. 12. 03:36

산 위의 동네.

‘산 위의 동네’는 산 위에 있지 않고 산 아래 세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하나님백성들이 있어야 할 곳은 고립되고 세상과 단절되어 사람들이 육신의 고개를 쳐들어야 볼 수 있는 저 높은 산 위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평등한 자리에서 똑같은 법과 규칙에 적용을 받고 똑같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사람들이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느끼게 되어 마음의 고개를 들어 마치 산 위를 쳐다보듯이 자발적인 신뢰와 존경까지도 우러러나오게 되는 장소, 즉 산 아래의 세상이 아닐까.

물론 페북 세상만을 보고 판단하기에는 성급할 것이다. 그러나 페북 세상이 세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며, 세상에서는 감출 수 있었던 모습까지도 보여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나는 페북에서도 분명 의미있는 메시지를 충분히 건질 수 있다고 본다.

한때 페친의 절반 이상이 목회자 (과거형이든 현재형이든 미래형이든 다 포함해서)였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전체 페친 수도 그때의 오분의 일 정도인 180명 정도일 뿐 아니라 그 중 목회자는 삼분의 일도 안 된다. 나의 성향을 보거나 자기들을 찬양해주지 않아서 (자기들 설교를 보거나 들으라는 암묵적인 압력을 넣는 분들도 상당수 있었다) 스스로 떠나신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내가 페삭을 했다. 이유는 한 마디로 소통의 부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페삭한 수 백명의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소통의 부재 속에 있었다. 그래놓고 전도를 한다고 하나님말씀을 전한다고 했다.

물론 목회가 바빠 페북할 시간이 없었다고 둘러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계에 허덕이는 대부분의 서민 층의 성인들 중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직장인으로, 남편이나 아내로, 또 엄마나 아빠로, 적어도 삼중직을 일상에서 소화해낸다는 것만 해도 결코 한적한 곳에 앉아 하프나 켜고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목회자가 더 영적인 직업이기 때문에 평신도가 이해해 줘야한다는 생각도 난 반대다. 목회자가 더 영적이면 좋겠지만, 나 같은 과학자도 동등한 하나님자녀로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이다. 이렇게 말하긴 좀 경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따져보면 목회자도 하나의 직업이다. 밥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신학교 입학해서 책 좀 읽고 몇 년 학교 다니다가 목사 안수 받는다고 해서 갑자기 영적 아버지 격으로 신분이 수직상승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도 나는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잘못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목회자나 비목회자나 본질적으론 동등한 것이다. (물론 현실 상 목회자의 생계비가 담임목사급이 되지 않거나 대형교회 목사가 되지 않으면 비목회자들보다 평균적으로 적은 축에 속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받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나도 거기에는 전혀 거부감도 반대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동참하고 있다.)

여전히 페북에서, 혹은 오프라인에서도, 목회자들은 목회자들끼리 소통을 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자주 목격한다. 마치 그것이 ‘산 위의 동네’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지는 않을까 나는 내심 우려가 될 때가 많다. 목회자들끼리 어울리지 말라는 게 아니다. 그것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산 위의 동네’가 배타적이고 차별적이며 우월성을 가지는 뉘앙스를 풍긴다면, 난 그 사람들이 예수가 비유한 ‘산 위의 동네’를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산 위의 동네는 구별되는 공동체이겠지만, 그 구별을 행하는 자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일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산 위로 올라가 세상과 단절되어 아무런 소통도 하지 않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들이 이룬 공동체의 모습을 보고 우리를 본받고 따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보기엔 잘못된 해석과 잘못된 행함, 그리고 결국 잘못된 전달로 예수의 말씀과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오해를 양산하는 잘못된 시스템인 것만 같다.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그 안에서 희희낙락하는 목회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러나 그들이 대중 앞에 설 때는 마치 희생당한 어린양처럼, 자신의 열악한 상황을 고급스럽게 포장해서 내보인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으로 족하다는 식으로, 마치 자기도 작은 성인 대열에서 꿋꿋히 살아가고 있음을 은근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일 땐 안타깝지만 보통 그들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난 교회가 있어야 할 곳과 하나님백성이 있어야 할 곳을 또 다시 생각하게 되며,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혹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말하면서도 정작 아무런 소통도 하지 않는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끼곤 한다. 사실 내가 장로교단으로 대표되는 개신교 시스템에서 마음이 멀어진 이유에도 이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내재된 시스템, 알고보면 또 다른 모습의 피라미드 시스템, 세상의 피라미드를 따르지 말라고 외치는 자들이 기어이 만들어낸 것이 결국 세상 반대쪽에서의 피라미드 시스템이라니! 이 아이러니를 목도할 땐 정말 아무런 소망도 기대도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산 위의 동네’의 위치는 산 아래일 것이다. 빛과 소금이기 때문에 스스로 스스로를 구별하여 산 위에 모여 살라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빛과 소금이기 때문에 빛과 소금이 필요한 산 아래 세상에서 이웃사랑과 하나님사랑을 몸소 행할 때 마침내 보여지는 그 공동체가 바로 예수가 비유한 ‘산 위의 동네’가 아닐까.

세상에 메시지가 없는가. 아니다. 난 메시지는 넘쳐나지만 메신저가 없다고 생각한다. 메신저가 할 일은 당연히 메시지의 전달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소통’이라 부른다. 설교만이 소통이진 않을 것이다. 삶에서 일상에서 잔잔하고 소소한 소통이야말로 메시지를 메시지답게 전달하는 목회가 아닐까. 일요일날 강단에서만, 성경공부 시간에서만, 교회 세미나나 부흥회에서만 메시지가 선포된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시대착오적이고 답답한 생각이 아닐까. 답은 삶이고 소통이라 믿는다. 목회자들의 섬김과 봉사는 일요일날 교회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 몸을 피곤케 하는 것에 있지 않을 것이다. 평상시의 삶 속에서의 소통, 겸손한 삶의 소통에 방점이 있을 것이다. 산 아래로 내려오라. 그래서 산 위의 동네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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