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비 오는 날의 감상.
뜨겁게 구운 감자의 껍질을 벗겨내고 한 가운데 배를 갈라 향 좋은 버터를 그 사이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곧장 그 버터는 형체를 잃어버리면서 녹아내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 향과 어우러져 식욕을 자극한다. 감자를 구울 때 늘어붙었는지 일정 부분은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았지만 그 부위는 쫀득쫀득한 황갈색의 떡 맛을 내니 그래도 괜찮다. 뜨거운 바닐라 넛 커피 한 잔을 곁들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멀리 가기는 시간이 빠듯하여 연구소 근처에 있는 수플란테이션을 찾았다. 샐러드 한 접시와 치킨라이스 수프 한 그릇을 먹어치우고 조금 부족하여 구운 감자와 커피를 디저트 삼는다.
비가 오면 아무래도 조금은 더 감상적이 된다. 수많은 숫자들이 가득한 엑셀 파일로 작업하다가 문득 창 밖이 궁금해 습관처럼 늘 내려져 있던 블라인드를 올려 젖힌다. 내리는 비가 보인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다. 그저 멍하니 바라본다. 컴퓨터 화면에서 규칙적으로 깜빡거리는 커서도 괜히 운치 있게 보인다. 갑자기 영화나 소설 속의 한 장면인 것만 같다.
마흔을 넘기고 나의 본업인 기초과학에 대한 자신감과 과학하는 즐거움을 많이 잃었다. 아마도 올해로 박사후 10년을 넘긴, 그러나 아직 자신의 랩도 가지지 못한, 늙다리 연구원의 비애일 것이다. 누군가가 전문가란 재미나 즐거움, 혹은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일에도 베테랑처럼 맡은 일을 뚝딱 잘 해내는 자라고 했는데, 딱 내 꼴이 그렇다. 나의 무능력함은 더욱 크게 느껴지지만, 손과 머리는 과학하기에 잘 길들여져 거의 무의식적으로 돌아간다.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식어만 가는데도 말이다.
하소연을 시작하면 늘 돌고도는 이야기에 청승과 주접이 난무한다. 비가 오니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오늘은 멀리 보지 않기로 한다. 예전에는 근시안적이라고 비난하곤 했던 삶의 자세가 지혜자의 자세와 흡사하게 느껴진다. 아직 다분히 자기합리화라는 자책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래도 인생은 목적보단 과정이라는 생각에 무게를 실어본다. 달성하지 못한 목적 앞에서 과정을 강조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니길 바래본다. 오늘도 좀 적게 먹고 많이 땀을 흘리며 몸이나 만들자. 10년 전의 몸으로 돌아가보자. 그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투자인 셈이니.
'in monolog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게으름 (0) | 2019.12.07 |
|---|---|
|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0) | 2019.12.06 |
| 일상: 12월의 시작 (0) | 2019.12.04 |
| 바람 (0) | 2019.12.04 |
| 차분한 비 (0) | 2019.11.28 |
-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