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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e.
우린 누구나 어느 누군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다. 그러나 이 명백한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생소한 상처를 입은 결백한 사람이 되어 돌을 씹은 기분으로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불길했던 예감을 몸으로 직접 체감할 때만큼 절망스러운 기분이 또 있을까. 미처 그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모두 잠들고 난 이후에도 홀로 조용히 켜진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다. 나의 부질없는 과거를 돌이켜보며 답 없는 반성과 자책과 후회의 사이클을 또다시 거친다.
머리로 이해할 때와 몸으로 체감할 때의 차이는 ‘이해’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하게 만든다. 관념과 경험의 괴리는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인간을 고뇌에 빠뜨렸다. 관념에 치우칠 때 그 끝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경험만 의지할 때 결국에 맛볼 회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그러나 그 숱한 노력도, 우리 개인의 일상에서 그 괴리를 어느 날 툭 하고 경험하게 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부질없이 느껴진다. 철학자들의 깊은 사유조차도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때 우린 언제나 일상의 작은 체험 앞에서도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잠을 설쳐가며 보낸 반성의 시간도 우리에게 말끔한 답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순간의 결단은 하루에도 기분에 따라 몇 번이나 바뀌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우린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대며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바쁘다. 사유하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지만 우린 그 시간조차 쉬이 물거품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도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성의 시간을 가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시간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다시 우린 그 익숙하고도 불유쾌한 사이클 속으로 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게 삶이라는 생각. 이렇게 의미 없어 보이는 행위의 반복 가운데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놓여 있다는 생각. 이러한 생각을 점점 받아들이게 된다. 그 피곤한 시작과 끝이 항상 안개에 가린 듯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나는 그 가운데 점처럼 빛나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예기치 못한 순간들이 있기에 삶의 모든 순간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인다.
“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I embrace it. And I welcome every moment of it.”(Part of narration of Louise at the end of a movie ‘Arr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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