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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한다.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은 어떤 꿈을 꿀까?’, ‘그 꿈에선 무엇이 보일까?’,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의 꿈속엔 오감에 시각을 제외한 사감만으로 이뤄질까?’와 같은 내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들. 마찬가지로 선천적 청각장애인들의 꿈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지, 선천적 미각장애인들의 꿈에선 아무것도 맛보지 못할지, 등등의 상상들은 가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마음이 열리고 반지성적이지 않은 자세를 나름 유지한다고 해도 결코 공감할 수 없는 세상이 있다. 그 세상의 존재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다시 작아지고 겸허해지는 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모르는 것의 비율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기를 쓰고 더 알아봐야 어차피 무한대에 숫자 몇 개를 더하는 효과 정도밖에 나지 않을 것 같은 허무함이 나를 감싼다.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일까? 더 큰 세상과의 조우는 나의 독단을 잠재우고 제거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자신이 몸담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앞에서 예를 든 오감)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살면서 그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건 아닌 것 같다. 다만,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면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서는 한두 마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경이 넓어진다는 건 어쩌면 이러한 의심을 환대하고 혼란과 두려움을 마주하여 그 가운데에서 다시 어떤 평형점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이런 과정 없이 한 사람이 성숙해질 수 있을까.
기성세대의 굳어진 생각의 패턴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실망과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감출 수 없다 (그리고 나도 그 가운데 있지는 않을까 두렵다). 지성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이런저런 옷으로 치장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감춰진 본질은 언젠가는, 특히 아주아주 사소한 사건사고에 의해서, 튀어나오게 되어 있는 법이다. 복잡하게만 보이는 문제일지 몰라도 사실은 그리 복잡하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취하고 있는 자세에 대한 과도한 확신, 그리고 그에 따른 타자에 대한 정죄와 비난. 나는 언제나 틀릴 수 있을뿐더러, 이미 어느 정도는 틀리고 있다는 점, 나아가 나는 어느 쪽엔가 치우친 사람이라는 점을 언제나 자각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성숙은 진행형이어야 한다. 그것이 과거형이거나 성취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면 그건 성숙이 아닌 미성숙을 증명할 뿐이다. 앎을 통한 지식의 축적이 기본적인 자세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앎은 액세서리일 뿐이다. 자기 자신의 그럴듯함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이기적인 욕심을 조금 더 충족시켜주는 더러운 옷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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