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faith

고백

가난한선비/과학자 2021. 11. 14. 03:48

고백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면서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아니, ‘습관’이라기보다는 ‘도주로’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어둡게만 보이던 시절,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피할 곳이 필요했다. 처음엔 사람을 찾았다. 기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더 커져버린 상처는 관성이 되었다. 나는 더 낮은 곳으로 흘렀다. 궁여지책으로 책을 찾았다. 다행이었다. 책은 나의 피할 곳이 되어주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책에 안착했다. 내가 읽고 쓰는 이유는 팔 할이 절박함이다.

하루에 적어도 한 시간은 책을 읽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아니, 단지 ‘약속’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모자라다. 단지 독서 습관을 들이고자, 혹은 나의 게으름에 채찍질을 하고자 했던 약속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날 때에만, 진정한 나의 내면을 마주하고 나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며, 처절하게 동시에 겸허하게 나의 눈을 다시 영점 조정하게 될 때에만 가능한 숱한 다짐들, 그 마음들을 나는 생이 다할 때까지 기억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책을 들면 나는 아주 잠깐 비장해진다. 

내 존재는 무슨 의미를 지닐까,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무엇을,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열심을 다하는 걸까, 낮아진 내 모습을 겸손이라는 표현으로 치장하는 나는 과연 낮아진 게 맞는 걸까, 혹시 처량함을 둘러대기 위한 적당한 방안으로 멋대로 떠들어대는 건 아닐까, 등등의 많은 목소리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몇주 간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몸이 바쁘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는 말은 적어도 내 삶의 맥락 안에서는 효력이 없다. 그래서일까. 최근엔 책을 들어도 통 읽히지가 않는다.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다. 내 안이 너무 시끄럽다. 

그래도 일상이 되어버린 습관을 좇아, 나의 절박함에 이끌려 꾸역꾸역 느리지만 책을 읽었다. 무겁거나 어려운 내용은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아 잠시 내려두고, 일부러 이야기꾼인 에코의 책을 골랐다. ‘바우돌리노’. 그의 두 작품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을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수였다. 며칠이 지나 전체의 약 사 분의 일 정도 읽었을 때에야 깨달았다. 내가 찾는 건 재간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바우돌리노’는 에코가 작정하고 쓴 풍자소설이었다. 거짓의 힘을 선보이면서도 그것을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한 작품이었다. 중세 역사를 끼고 풀어나가는 그의 재치있고 기발한 이야기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의도가 너무 분명해서, 그리고 너무 장황하고 길어서 더 읽을 가치를 느끼지 못해 그만 두고 말았다. 

일주일에 평균 한두 권씩 책을 읽어온 지 5년이 넘었다. 수백 권의 책이 내 눈과 머리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작품은 생채기를 남겼고, 또 어떤 작품은 그림자를 남겼으며, 또 어떤 작품은 냄새를 남겼고, 또 다른 작품은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들은 가느다란 실 같은 흔적만을 남기거나 그것마저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나에겐 노안이 찾아왔다.

운명이랄까 궁합이랄까 하는 무속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가 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책이 독자를 선택한다는 생각. 독자가 마음 먹는다고 해서 무조건 책이 읽히는 게 아니라는 생각. 그때 그 장소에 딱 적당한 만남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 사람과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책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로 인연이 필요하다는 생각. 그렇지 않으면 책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거나 오히려 읽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생각. 그런 책을 꾸역꾸역 읽는 것보단 차라리 과감하게 내려놓는 게 지혜롭다는 생각.

그렇다면, 의아해진다. 내가 절박했던 시절, 손에 드는대로 마음에 담겼던 책들은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그땐 절박했기 때문에 손에 드는 책마다 잘 읽혔고, 지금은 절박하지 않고 배가 불러서 편식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일리는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때 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은혜이리라)에 이끌리어 나에게 맞는 책이 손에 들려졌고 읽혀졌으며, 그러면서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거라고 믿게 된다. 나는 내가 도피했다 생각했고, 책이 나를 받아주었다고 생각했으며, 내가 책을 골랐다고 생각했지만, 거기엔 이미 누군가의 섭리과 계획이 선행되어있었던 거라고 믿게 된다. 내가 견뎌낸 게 아니라 견뎌낼 수 있는 상황, 즉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보호막 안으로 내던져졌던 거라고 믿게 된다. 곤고할 때 빛은 더욱 밝게 보이고 나는 그 빛을 따라가게 된다. 모든 만남의 시작과 끝, 상승과 하락, 정착과 떠남. 그리고 나의 갈등과 고민, 결단과 실행, 성취와 상실까지. 모든 것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시고 주관하시고 또 함께 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아멘.

'in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숙  (1) 2022.09.19
‘나’라는 감옥  (0) 2021.11.20
원하는 것 vs. 구할 것: 솔직한 기도란?  (2) 2021.01.13
성실한 땀: 파괴와 창조  (0) 2020.09.01
공룡과 기독교 신앙  (2) 2020.08.0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