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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말과 글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1. 20. 01:41

말과 글

글을 잘 쓰기 위해선 글을 계속 써야 한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도 문자로 표현되지 않으면 글이 아니다. 물론 머릿속에 떠도는 단어와 문장들도 어느 정도는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문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건 마치 핵산의 주요 성분인 뉴클레오타이드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경우에 비유할 수 있다. 세포의 핵 안에 떠다니는 뉴클레오타이드들을 정보라고 부르진 않는다. 그것들이 DNA 서열에 따라 mRNA를 가지런하게 만들어낼 때 비로소 그것들은 유전정보를 담게 된다. 뉴클레오타이드가 아닌 그것이 가지게 되는 서열이 곧 정보가 되는 것이다. 머릿속에 떠도는 여러 단어들과 단편적인 문장들은 뉴클레오타이드에 불과하다. 글이 완성되기 위해선 서열이 필요하다. 그 서열은 오직 글을 쓰려고 애쓰는 시간과 글을 써내는 행위 (이는 지우고 수정하고 추가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에 의해 생겨난다. 요컨대 글을 계속 써야 하는 이유는 글의 뉴클레오타이드를 어떤 서열에 따라 정렬하기 위해서이고, 그래야만 유의미한 정보를 담는 한 편의 완성된 글이 되기 때문이다.  

말로 하는 문자가 아닌 글로 표현된 문자는 다른 문법을 가진다. 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글을 잘 쓴다는 보장이 안 되는 이유다. 흔히 구어체와 문어체로 나누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론 석연찮다. 둘은 같은 뉴클레오타이드를 사용하고, 그리 다르지 않은 서열에 따라 배열되지만, 글은 말과 다르게 휘발되지 않는다. 먼저 말한 문장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먼저 쓴 문장들은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문장들은 새로운 서열로 작용한다. 말은 쉽게 번복할 수 있지만, 이어서 쓸 문장들은 먼저 써진 문장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말과는 달리 글은 쓸수록 견고한 서열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말 잘하는 사람이 글 잘 쓰는 사람으로 쉽게 전환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에게 항상 긴 글을 써보라고 조언한다. 짧은 글일수록 말과 같은 성향을 띠기 쉽다. 긴 글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먼저 쓴 문장들과 단락들이 가지는 서열에 점점 더 구속되기 때문에 여간해선 완성해 내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이 부분, 즉 글을 써나가면서 점점 더 생겨나는 서열 가운데에서 나름의 질서를 찾고 그것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만들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과정을 사랑한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맛을 본 사람의 글을 읽길 원한다. 나 역시 이 맛을 아는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이런 글을 계속 써나갈 것이다. 글쓰기 동지들 모두 낙오하지 않고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길 바란다. 지난한 과정이지만 그것만이 길이라는 점을 잊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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