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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일단 써 보기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3. 9. 19:17

일단 써 보기

한 단락으로 이루어진 짧은 글의 경우, 이렇게 저렇게 쓰다 보면 ‘아, 이 정도면 되겠다’ 하는 순간이 어렵지 않게 찾아온다. 그렇다면 긴 글의 경우는 어떨까? 특히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을 가진 글을 쓰려고 한다면? 이 질문에 나는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고 대답한다.

다른 이유는 긴 글이 갖는 체계성 때문이다. 한 문장이 아닌 두 문장 이상으로 늘어날 땐 맥락이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한 단락이 아닌 두 단락 이상의 글을 쓸 땐 문장 간의 맥락만이 아닌 단락 간의 맥락도 신경써야만 한다. 여러 단락들이 모여 하나의 장을 이루고, 그 장들이 모여 하나의 부를 이룰 때에도 마찬가지다. 보다 복잡하고 체계적인 맥락이 중요해진다.

한 문장을 쓸 땐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서게 되는 반면, 책 한 권을 쓰게 될 땐 단어 하나 혹은 문장 하나가 갖는 중요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대신 그것들이 형성하는 맥락, 맥락이 만들어내는 흐름이 중요해진다. 독자는 책 한 권을 읽고 나서 어떤 단어나 어떤 문장을 기억할 수는 있어도, 읽는 도중에는 맥락과 흐름에 이끌려가기 때문이다. 멋진 단어나 멋진 문장이 없어도 맥락과 흐름이 잡히면 책 한 권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멋진 단어나 멋진 문장이 가득 해도 맥락과 흐름이 형편 없으면 완독하긴 어렵다.

그러므로 짧은 글과 긴 글을 쓸 땐 다른 작전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나는 앞에서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라고 말했을까. 그건 둘 다 ‘일단 써 보기’의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쓰기 위해서도 일단 쓰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아무리 맥락과 흐름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것도 쓰여진 글이 존재할 때의 얘기다. 머릿속에서 구상한답시고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이 끊기지 않은 상태로 계속 써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불가능하다. 사실 우린 단 두 단락의 글을 쓸 때에도 이렇게 저렇게 써 보지 않는가. 맥락도 흐름도 일단 써 나가면서 맞춰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동일하게 요구되는 사항은 ‘일단 써 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목차 구성이 완벽히 되지 않아도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망설이지 말고 일단 써 보기를 나는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한 완성도를 가진 글로 다듬어 놓으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완성도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절대 버리면 안 된다. 나중에 그렇게 쓰여진 글들을 모아 놓고 맥락과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기 때문이다.

발생생물학을 공부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전체의 이십 분의 일도 읽지 않았지만, 벌써 아이디어가 떠올라 쓰기 시작했다. 목차 구성하던 것과 조금은 다른 맥락의 글인 것 같아 쓰지 않으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일단 써 보기’로 했다.

잘했다는 생각이다. 일단 쓴 글이 또 다른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하고, 원래 생각하던 목차도 수정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책의 어느 부분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쓴다. 일단 써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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