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monologue

기억의 문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11. 26. 22:26

기억의 문

낯선 식당. 처음 듣는, 그러나 집중하지 않아도 귀에 착 감겨오는 재즈의 선율.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흘러나오는 리드미컬한 보이스. 괜스레 울적해졌다. 이럴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는 어김없이 미국이다. 먼 이국의 땅. 아는 사람,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새로운 세상. 모든 것이 낯설 땐 낯설다는 표현은 힘을 잃는다. 그것은 완전한 새로움. 새로운 각인이기 때문이다. 


아주 잠시, 알 수 없는 메커니즘에 의해서 나는 잊어버렸던 2011년의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일상 속엔 이렇듯 다른 시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는 문이 존재한다. 그 문은 노래 한 곡일 수도 있고, 데자뷰일 수도 있다. 우연찮게 비친 햇살이 만들어내는 각도일 수도, 코 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그 문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철저히 예기치 못한 순간에만 그 문이 열리는 까닭이다. 내면 상태와 외부 환경의 조합은 언제나 처음이다. 사람의 지문처럼 매 순간은 낯섦이고 새로움이다. 우리는 그 낯설고 새로운 어떤 한순간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기억의 저장고를 열어젖힐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첫 미국은 클리블랜드였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각이 난다. 숨 쉬는 대기 속을 있는 듯 없는 듯 가득 채우고 있던 그것은 불안이었다.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나에겐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란 옷을 입고 나를 조여왔다. 그 삶에 익숙해지면서 자주 잊어버리게 되었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던 그 불안. 어쩌면 이국 땅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숨 쉬듯 들어마시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불안이리라. 새로운 세상에서 생존하는 경험은 불안을 극복하는 삶이 아니다. 불안과 함께 하는 삶이고 그것을 끌어안는 삶이다. 11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작년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처음 느꼈던 감정도 안도감이었다. 집에 온 것 같은 기분. 이성을 통과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그 긴 한숨. 

그러나 내 마음속엔 여전히 그 삶에 대한 갈망이 있다. 불안했지만, 불안이 함께 하는 삶이었지만, 그 삶 속에도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신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나의 마음. 낯설지만 익숙한 이 기분. 오늘 그 식당에서 들었던 곡을 언제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만약 듣게 된다면 알아챌 수 있을까. 물론 그 곡이 아니더라도 그곳에 이르는 문은 예기치 못한 순간 다른 옷을 입고 나를 찾아올 테다.

'in monolog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간과 시간  (1) 2023.12.07
시간  (0) 2023.12.02
보기 좋다는 말  (0) 2023.11.07
자기중심설  (0) 2023.10.26
박명  (0) 2023.10.25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