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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이름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12. 19. 06:31


이름.


어릴 적 교회에서 종종 있었던 성경퀴즈대회에서는 빵점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답을 모두 알고 일부러 오답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정답란에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적으면 반타작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하지 않고 상 받기 바라는 아이들은 너무 빨리 하나님이나 예수님 이름을 부른다.


위기나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인이라면 모두 하나님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자초지종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하나님의 이름만 불러댄다면, 그건 마치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성경퀴즈의 답으로 적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려움 뿐만이 아니다. 혹시 우린 모든 일 앞에서 너무도 쉽게 모든 걸 그냥 덮어놓고 그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불러대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하나님을 찾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해결하지 못하는 것만을 하나님께 아뢰자는 말도 아니다. 나 역시 하나님이 창조주요 우주의 주관자이심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세계관의 전환을 일컫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건 안하건 나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개입하심을 놓고 기도하고 묵상한다.


그러나 난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일의 원인과 결과를 따져보고 반성할 건 반성하고 개선할 건 개선하려는 노력을 마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언제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만 나타나서 자기 대신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주일학교 다닐 때 들었던 예화 하나 소개해본다. 

가난해져 하루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상황에 처한 고아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 고아원 사람들은 원장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절망에 싸여있다가, 순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메시지가 떠올라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그렇게 결단하고 기도하는 순간, 갑자기 집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았더니, 우유를 배달하는 트럭이 길에서 미끄러져 우유 박스들이 길 위로 떨어져있지 않은가. 트럭 운전사는 이미 떨어진 우유들은 상품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팔 수가 없고, 마침 그 사고가 발생한 곳이 고아원 앞이고 하니 그 우유를 고아원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유 양을 세어보니 딱 고아원 사람들이 먹을 만큼이었다는 말까지 예화의 마지막 부분에 잊지 않고 덧붙혀졌었다. 예화의 결론은 염려 걱정하지 말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다 된다는 것이었다. 난 그때 정말 신기하다며 경이감에 하나님을 찬양했고 정말 믿음으로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구나 하며 기뻐했다.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 나도 믿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우유 트럭 사건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믿기도 한다 (우유 배달 트럭 운전사는 아마 자기 돈으로 손실을 배상해야 했을 수도 있고, 혹시 아는가. 그 운전사도 정말 가난한 사람이었을지!). 그런 예화가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난 이제 그런 예화에서 더 이상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한다.


나이 들어가며 내가 깨닫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특별난 기적과 같은 사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일상에서 깨닫는 인간의 문제와 한계,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 형상 닮은 자의 정체성과 사명, 사적인 복음에서 공적인 복음으로의 전환 등이 더 큰 은혜로 와닿는다. 현재 내게 있어 하나님의 은혜는 기적적인 사건에 머물지 않고 이성적인 깨달음을 통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난 이성적인 깨달음을 통해 얻은 통찰이 다른 동물과 달리 생각하고 기도할 줄 아는 인간에게 부여하신 지능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춰가는 은혜로운 방법이라 믿는다. 공부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이나 예수님 이름을 적어대며 그 답이 맞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런 싸구려 믿음은 순수하다는 표현도 결코 어울리지 않으며 믿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그런 마음가짐은 결국 자신을 변명하며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덮어놓고, 즉 이성을 내려놓고 불러대는 책임 전가용 우상이 아니다. 모든 이성과 감정,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겸손히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불러야 한다. 자초지종을 따지며 반성과 개선을 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부르며 나아가야 한다. 내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할 일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고 본다. 내가 할 일이 하나님의 할 일의 일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과 신본주의로 섣불리 나누어 죄책감만 던져주는 그런 설교 메시지는 더 이상 그만 듣고 싶다.


*사진은 지지난 일요일 Huntinton library에서 찍은 사진.


Two Boys Blowing a Bladder by Candlelight, 1770. The Henry E. Huntington Library, Art Collections and Botanical Gardens, San Mar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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