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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함께 하심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12. 20. 09:41


함께 하심.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라는 말에 익숙하다. 자기중심적이고 쫓기는 삶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기 위하여 모든 걸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나님과 함께 해야 그분에게 모든 걸 맡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기 위해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무턱대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온 우주에도 계시고 내 마음 속에도 계신다는, 교회에서 주워들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살면서 진정 쉼이 필요할 때면 우린 진지하게 하나님의 위치를 찾게 되는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교리로 뻔히 알면서도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런 면에서 보면, 어쩌면 믿음이 교리를 확인해 나가는 여정이 우리의 신앙생활일런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위치를 머리론 알면서도 계속해서 찾는 건, 적어도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이 그 순간만큼은 함께 하고 계시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소부재하신데도 마치 나만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노력은 소외감을 넘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 같은 기분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그동안 배워왔던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의 교리도 내가 버림 받은 것 같은 기분과 상충되지 않는다. 나름 말이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작동하는 논리가 ‘죄’ 개념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벌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논리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은밀한 죄도 나는 모두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죄책감이 들기 시작하면 여간해선 빠져나오기 힘들다. 거기에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용어에게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야말로 정말 힘든 상태가 된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상태에 빠진 사람은 인간의 심리학적 용어로는 자기연민이나 자기부정, 위축된 자신감 등등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된다. 그래서 심리상담가에게 상담을 받거나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기도 하는데, 증상이 완화될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치료는 어렵다. 마치 다이어트할 때의 요요현상과 비슷하다. 그리고 증상이 완화되는 순간도 과연 상담과 약이 그 완화를 가져왔는지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묻는다면 명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그저 ‘도움이 됐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 했으니 이렇게라도 됐지…’하는 사실일 수도 있는 합리화도 이땐 함께 힘을 발휘한다.


사실 이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며 누구나 한 번씩은, 정도는 다르겠지만, 다 겪는 문제인데, 이 부분에서 교회는 오히려 문제를 더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현상을 목도한다. 내가 경험했거나 들었던 교회는 일반적으로 크게 두 가지의 처방을 내린다. 첫 번째는 그 사람의 구체적인 상황에 가능한 개입하지 않으려고 선을 지키면서 (그게 선이라고 믿는 것이다. 개입하면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진리라고 믿는 거룩한 하나님 말씀과 교리를 반복해서 리마인드시켜주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그 문제를 당한 사람을 부정하다고 정죄하며 (대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욥의 세 친구처럼 그 사람의 비밀스런 죄의 존재를 침묵으로 확신하며 죄책감을 부풀리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 모두 문제를 당한 입장에선 겉돌 수밖에 없다. 별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악화시킬 가능성도 농후하다.


교회 안의 이런 현상도 충분히 비극이지만, 더욱 비극인 것은 허다하게 많은 교인들이 이런 상황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방법이 두 번째 방법보다 그나마 나아 보이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자고로 교회라는 공동체는 그 이상 해야 한다고 본다. 무책임하게 보이고, 또 실질적인 공감과 사랑이 배제된 채 무늬만 남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껍데기만 남은 거룩함은 적그리스도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난 생각한다. 그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반하는 역사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항상 그렇진 않겠지만, 만약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이유가 하나님의 위치를 알기 위한 지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문제를 당한 사람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심리 때문이라면,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의 교리를 다시 리마인드시켜준다고 해서 당사자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왜 버림 받았다고 느껴지는지에 대한 신학적이면서 철학적이고 인간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답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그 원인에 대한 분석만이 아닌 현재의 그 어려운 상황에 있는 당사자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함께 해주며, 하나님의 위치는 알려주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어쨌거나 살아계시며 도우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 희미한 흔적을 나의 존중과 배려가 녹아든 사랑의 표현으로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노력이 따라올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사진은 Huntington library 에서 쎄벼온 사진입니다.


Strawberrying.

Asher Brown Durand, 1854

The Huntington Library, Art Collections, and Botanical Gardens. Gift of the Virginia Steele Scott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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