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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첫 날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1. 2. 14:22


첫 날.


** 텅 빈 연구소에서 홀로 실험하던 중 휴식 시간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어릴 적엔 창밖으로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엄마 생각이 나곤 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지만, 아직도 조용히 저물어져가는 해를 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마음 한켠이 서먹해진다.


동지가 지나고 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동지가 지난지 벌써 열흘 째이지만, 난 해가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마음이 갑자기 편안해지고 밝아졌다.


새해가 밝았다. 인생은 늘 어제와 오늘의 반복이지만, 오늘 만큼은 어제와는 달리 해가 바뀌는 사건이 있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건은 늘 일상으로 침투하여 일상이 된다.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건 해석하는 자의 몫이겠지만, 난 이런 일상 속에 말없이 벌어지는 특별함을 조금 더 알아채고 싶다. 조금 더 예민해지고 싶다. 알아채지 못한다면 해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 우린 얼마나 많은 걸 놓치며 살고 있을까?


가만히 보면, 큰 일을 경험하는 횟수보다 큰 일을 겪을 뻔했던 적이 훨씬 많다. 기적이라 부르는 순간도 어찌보면 해석하기 나름이다. 혹시 아는가. 나태해질 정도로 아무런 일이 없다고 느끼는 평범한 일상이 지나고보면 기적이었을지. 하루하루 시간시간이 소중하다. 알아챔이란 ‘지금 여기’를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현재를 인생 전체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새해 첫 날, 본의 아니게 본업에 충실한 하루를 보냈다. 아내가 온콜이라 사실 난 책이나 읽고 아들이랑 놀며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제 밤 동물실로부터 마우스가 곧 죽을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휴가 중 하루를 날려버린 셈이다. 그러나 의외로 이런 일에 준비되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역시 난 과학자인 것이다. 2019년은 내게 있어 과학자로서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성공지향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 사진: 헌팅턴 라이브러리에서 쌔벼옴.

Washerwomen at the Fountain, c.1770-75 by Hubert Robert.

Huntington Library and Art Gallery, San Marino, CA,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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