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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환대와 구별됨에 대한 묵상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1. 10. 07:38


환대와 구별됨에 대한 묵상.


낯익은 사람에게만 환대를 베푼다면, 그것이 진정한 환대일까? 낯선 이에게 베푸는 환대, 이는 곧 ‘낯선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대하는 사랑의 실천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내도록 되어있다.


교회 안에서 난 사람들과 체면을 내려놓고 세상의 계급장 다 떼놓고 속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교회에 와서 교제할 때조차 날씨 얘기며 아이들 얘기며 연예인이나 티비 프로그램을 얘기하며 시간을 떼우고 싶진 않았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을 해선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당연히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관계의 낯섦을 낯익음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로만 사용되고, 시간이 지나도 더 깊은 얘기나 진실된 얘기로 발전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기에 난 그러한 관계에서 한계와 갈증을 느꼈다. 어쩌다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경우는 처음부터 진실한 얘기를 꺼내놓던 사람들이었다.


쉽게 생각해보면, 당연히 날씨 얘기처럼 가벼운 얘기를 하다가 점점 깊은 얘기를 하게 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실상 그렇지 않았다. 대개는 늘 그 상태와 수준을 유지하며 겉돈다. 그러다가 흐지부지해지며 지나치는 다수 중 하나가 된다. 얼굴엔 웃음을 머금고 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관계유지하는 기술일 뿐이다. 마음을 터놓고 위로를 주고받는 것을 기대하고 왔는데, 실제 와보니 인간관계에 능수능란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텃새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힘을 얻으러 왔으나 힘이 없으면 참여할 수 없는 집단이 내가 느꼈던 교회의 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난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뭔가 역전된 상태라고 느꼈다. 교회에서 세상으로 사람을 파송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교회으로 파송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의 원리는 낯익은 사람에게만 환대하겠다는 것과 같다. 낯선 사람을 낯익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기억에도 남지 않을 얘기들을 하느라 온 시간을 투자한다. 그런데 과연 교회라는 곳이 그런 곳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빚진 자라는 이유는 낯선 이방인에게 환대를 베풀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낯익은 모습은 필요치 않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서로에게 있다면 성격이나 직업이나 성별 등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함께 나누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환대를 받아야만 환대를 돌려주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을 사랑에 빚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까? 환대는 우선 베푸는 것이지 받고 돌려주는 게 아닐 것이다. 환대의 방점은 먼저 주는 것에 있다. 자신이 예수의 사랑에 빚지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환대를 요구하긴 쉽지 않다. 머리로는 이해할지언정 손과 발까지 그것이 전달되긴 어렵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달라야하지 않을까? 혹시 거룩함과 구별됨은 바로 ‘낯선 이에게 환대하기’에 있지 않을까?


**사진은 헌팅턴 라이브러리에서 쌔벼옴.

A Fine Evening after Rain by John Linnell, ca. 1815.

The Huntington Library, Art Collections, and Botanical Gard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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