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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2. 2. 16:01

책.

 

이번 한 달은 어쩌다보니 8권의 책을 눕혀 책장의 가장자리로 보낼 수 있었다. 그 중 7권에 대해선 감상문도 남겼다. 나에겐 감상문을 쓰는 작업이 독서의 마지막 단계다. 책을 다 읽고 가슴에 남아있는 울림과 잔상으로 저자의 의도를 진지하게 한 번은 생각해야만 할 것 같고, 나만이 소화한 부분을 감상으로 표현하여 화답하는 게 작가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어느덧 감상문 수는 거의 100에 가깝다.

 

예전에 누군가가 내 글은 서평이 아니라고 넌지시 비판 아닌 비판을 했더랬다. 난 서평을 쓰려고 시도한 적도 없었고, 그런 책소개를 해서 뭣하나 싶기도 했으며, 눈을 조금만 크게 떠서 페북세상만 봐도 서평의 천지이기에,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는 건 공해에 가깝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이 생각은 그리 달라지진 않았지만,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내 글쓰기 스타일에도 뭔가 틀이 잡혀가는 것 같다는 것과 그래서 누가 서평이 아니라고 지껄여대든 감상문이 아니라고 떠들어대도 이젠 그냥 그려려니 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어쨌든 어느덧 책 읽고 감상을 남기는 건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언제까지고 이런 삶을 살 수는 없을 테다. 그러나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즐기며 해낼 수 있다는 건 분명 축복이리라 믿는다. 무엇보다 날 위해 써왔던 글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페북을 통해 읽혀지고 가끔은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참 기쁘다.

 

한 달에 8권을 읽어버렸으니 계획했던 것보다 약 두 배 정도 더 읽은 셈이다. 이 속도로 간다면 1년에 100권은 읽을 수 있을 테다. 그런데 이젠 다른 생각이 든다. 읽은 책의 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그것보다 중요한 건 “지금 난 무언가를 읽고 있는가?”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공부와 일을 위해, 성공하기 위해, 남을 밟고 더 올라가기 위해 읽기라는 행위를 했던 이삼십대 때의 읽기 행위를 난 읽기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내 안에 내가 자꾸만 커지고 헛되고 허망한 나를 꿈꾸게 만드는 읽기는 읽기가 아니다. 뭔가를 읽고 남을 향한 눈과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건 읽기가 아닐 것이다. 읽기는 겸손한 배움이다. 몸으로 시간으로 보여주는 겸손의 행위다.

 

신형철 덕분에 좋은 책을 요즘 속속들이 접하고 있어서 내 삶이 조금은 더 윤택해지고 풍성해진 느낌이다. 몰랐던 세상도 겸손하고 진정성 있는 마음이라면 두려울 것 없다. 난 정말 복 받은 놈이 틀림없다.

 

올해엔 도스토예프스키와 C. S. 루이스의 작품 몇 개씩을 볼 계획을 가지고 있다. 신형철의 추천 도서는 원래 계획엔 없던 거였는데, 오히려 잘 됐다. 언제나 구원과 복은 외부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는 거다. 받아들일 만큼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삼으며 즐기며 함께 가면 된다.

 

오늘은 중고서점에서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를 득템했다. 한 주에 한 두권씩 찾아내서 소장하는 기분도 나름 아주 매력적이다. 일상에 흩어진 행복의 조각을 찾는 기분이랄까. 아, 올해를 마무리할 즈음에는 과연 난 어떤 성장을 해있을까? 책과 함께 하는 일상,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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