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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회심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7. 23. 07:43

회심.

점심을 간단히 먹고 나면, 여유 있는 날의 경우, 약 40분 가량 휴식을 취한다. 캘리포니아에 와서 좋은 점 한 가지는 눈부시게 밝고 아름다운 햇살을 멀찌감치 떨어져 한 쪽 그늘에 앉아 팔짱 끼고 바라보며 여유로움에 잠시라도 잠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난 책을 한 손에 들고 커피 한 잔과 함께 테이블 곁에 앉아있다. 모든 게 평화롭기만 한 것 같은 이 기분...

직접 참여하지 않고 방관할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있다. 현실에 직접 발을 담그지 않았을 때 누릴 수 있는 안정감이 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평안이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뿐더러, 팔짱 낀 채 쳐다보며 느끼는 만족감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기껏해야 자기기만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아편이라고 부르는 이런 감정을 얻기 위해 소위 신앙생활을 하는 건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고독과 침묵이 신앙생활에서 꼭 필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눈을 감고 그것들에 침잠하여 사는 삶에는 적어도 공동체의 평화는 없다. 눈을 감는데 타자가 보이는가. 개인의 평안의 완성이 공동체의 평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진 않는다. 평안에는 완성이란 게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한낱 아편과 같은 자기기만적인 감정을 성령충만이라고 치부하는 인간들이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불리우는 자체가 난 참 불편하다.

개인의 평안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원죄 때문인지 관성 때문인지 공동체의 평화는 커녕 개인의 번영으로 보다 자연스레 이어진다. 체제에 스며든 악의 실체를 피하기 위한 편법으로 악을 이용할 방안을 강구한다. 악의 피라미드에 저항하고 그것을 부수기 위함이 아닌, 거기서 남을 밟고 더 올라가기 위해 평안을 구하고 번영을 꿈꾼다. 악은 이용하는 게 아니다. 악에 편승하여 악의 인정을 받아 악과 평화를 이루는 게 선인가. 고독과 침묵을 통한 개인의 평안이라... 과연 이를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마음수련이나 마인드콘트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우린 하나님나라나 예수의 복음이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주어졌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복음은 처음부터 공적이었다. 사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 죄요 악이다. 해적선에서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인간은 가장 나쁜 해적일 뿐이다.

방관하며 얻을 수 있는 건 여유로움. 그것뿐이다. 쫓기듯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시간은 필수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 기독교의 복음과 하나님나라, 그리고 믿음과 신앙생활을 왈가왈부하지 마라. 예수는 홀로 한적한 산에 가셔서 기도도 하셨지만, 그는 언제나 낮은 자들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 개인의 평안은 언제나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는 수 없이 빠지는 넓은 길이 바로 현대 교회의 모습 아닌가. 미국의 복음주의라는 건 미국의 자본주의와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이 사태의 배후에는 복음의 공공성을 거세시킨 죄와 악이 있다.

회심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짐 월리스의 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천천히 다 읽고 정리하고 있다. 나의 소장할 책 목록에 당당히 오른 ‘회심’. 감상문도 곧 남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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