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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이 아닌 낙원의 이미지를 금성에서 구현하다

C. S. 루이스 저, ‘페렐란드라’를 읽고

‘우주 3부작’의 1부 ‘침묵의 행성 밖에서’가 1938년에 출간되고, 5년 뒤인 1943년에 2부 ‘페렐란드라’가 출간된다. 그 사이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1942년 출간)’를 출간했고, ‘페렐란드라’와 같은 해에 ‘인간폐지’를 출간한다. 5년간 그는 3권의 책을 쓴 셈이다. 루이스의 첫 저서, ‘순례자의 귀향’이 1933년에, 마지막 저서, ‘폐기된 이미지’가 1964년에 출간되었으니, 30년 남짓 루이스는 3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으며, 평균 1년에 적어도 1권을 출간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주 3부작’의 1부와 2부 사이인 5년간 3권의 출간은 평균 이하라 볼 수 있다.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하고 살짝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마침 그 시기가 제2차세계대전 기간과 대부분 겹친다는 사실을 알고 나의 염려는 이내 감탄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같은 시기에 루이스는 나중에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으로 묶일 라디오 방송까지 했다. 그러므로 5년간 3권밖에 못 낸 게 아니라, 그 와중에도 3권이나 냈구나!,라고 반응해야 적절할 것 같다.


루이스도 밝히고 있지만, 2부 ‘페렐란드라’는 1부 ‘침묵의 행성 밖에서’를 읽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진다. 굳이 순서를 바꿔서 읽겠다거나, 3부작 중 2부만 읽겠다는 고집만 부리지 않는다면, 1부를 읽고 2부를 읽는 게 훨씬 매끄러울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나 보군’으로 대충 넘어갈 것들이 ‘그래서였군’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1부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은 ’말라칸드라’, 즉 화성이었다. 2부의 제목이기도 한 ’페렐란드라‘는 금성이라는 뜻으로써 2부의 공간적 배경이 된다. 주인공은 랜섬, 악역은 웨스턴으로, 비록 다른 악역이었던 드바인이 빠졌지만, 1부와 같다. 즉, 2부에서 랜섬과 웨스턴의 대립구도는 공간만 바뀔 뿐 1부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리고 그 대립구도는 랜섬이 선, 웨스턴이 악으로 뚜렷하게 그려진다. 랜섬은 창조주이자 기독교의 하나님에 해당하는 말렐딜에게 순종하여 쓰임 받는 인물로서 화성에서처럼 금성에서도 타 생명체들을 존중하며, 언어학자답게 예부터 존재했던 태양계 언어로 그들과 소통한다. 한편, 1부에서 똑똑하고 무모한 물리학자이자 냉혈한이었던 웨스턴은 2부에선 악에게 몸을 내주어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매개체, 다시 말해 성경에서 ‘귀신 들린 자’의 모습과 유사하지만, 일개 귀신이 아니라 그들의 우두머리이자 악마라고 불리는 영적 존재를 담아내는 육체로 등장한다. 그 악마가 랜섬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했던 말에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선은 지키려 하고 악은 파괴하려 한다,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이 작품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랜섬은 말라칸드라에서 했던 것처럼 페렐란드라에서도 지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1부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1부에서는 드바인과 웨스턴에 의해 강제로 말라칸드라에 잡혀가서 그 일을 감당했고, 2부에서는 말렐딜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 페렐란드라에 가서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전제가 되는 건 말라칸드라든 페렐란드라든 모든 게 말렐딜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랜섬이 지킨 건 단순히 말라칸드라 혹은 페렐란드라가 아닌 창조세계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랜섬은 강제로 말라칸드라에 끌려가서 타 생명체를 접하고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꼈지만, 자발적으로 페렐란드라에 와서는 경이의 눈으로 타 생명체를 맞이할 수 있었다. 1부에서도 결국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2부에서 랜섬은 전혀 몰랐다. 누구를 만나게 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언제까지 머물러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그저 말렐딜의 뜻에 자기 몸을 맡기고 순종한 것이었다. 이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나게 하는데, 나는 루이스가 의도적으로 랜섬이 어떤 사람인지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 이런 패러디를 이용한 거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랜섬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랜섬은 이 작품 속에서 예수님과 비슷한 역할도 감당하게 된다. 페렐란드라를 악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악마가 들어앉은 웨스턴을 결국엔 물리쳐 악마에게 승리했으며, 웨스턴에게 발목을 붙잡혀 죽음을 상징하는 지하 깊숙한 곳으로 함께 떨어진 지 사흘 만에 가까스로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 마치 부활을 경험한 것처럼 죽었다가 다시 사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웨스턴과 싸우다가 온몸에 상처를 입게 되는데, 가장 치명적인 상처이자 가장 나중에 치유되는 부위가 발꿈치라는 점 또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온 ‘여자의 후손’이 금성 버전에서는 바로 랜섬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루이스의 의도라 생각된다. 참고로, 랜섬을 영어로 쓰면 우리말로 몸값에 해당하는 Ransom이다. 루이스의 치밀한 설계에 나는 또 한 번 감탄한다.

기독교의 상징과 알레고리는 이것만이 아니다. 랜섬이 페렐란드라에서 처음 만난, 이성을 가진 생명체는 초록 여인인데, 창세기 1-2장에 등장하는 에덴동산 속 하와에 해당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웨스턴이 우주선을 타고 날아와 페렐란드라에 착륙하고 악마에게 몸을 내어준 뒤 끊임없이 유혹의 말을 건네는 대상도 바로 초록 여인이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장면과 겹치는 대목이다. 랜섬은 창세기 1-2장의 에덴동산을 지키기 위해 3장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뱀의 유혹으로부터 하와를 보호하려는 역할이 자기의 사명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는 목숨을 걸고 그 사명을 달성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랜섬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엘딜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사명이라 믿고 말렐딜을 처음부터 끝까지, 비록 의심 속에 빠지는 순간이 간간이 있었지만, 신뢰했다는 사실이다. 랜섬이 혼자서 했던 수많은 생각 중에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자기 자신이 실패해도 멜렐딜의 뜻은 결국 성취될 거라고 믿는 것. 이 대목에서 나는 이해하지 못해도, 때론 버려진 것처럼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이 느껴져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이 창세기 1-3장의 배경인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패러디한 사실을 알게 되면 17세기에 써진 밀턴의 ‘실낙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읽지 않은 루이스의 작품 중 ‘실낙원 서문’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된 해가 ‘페렐란드라’가 출간되기 1년 전인 1942년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작품을 쓰기 전 루이스는 이미 실낙원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마친 상태였다. 또한, 루이스가 그의 첫 소설 ‘순례자의 귀향’을 쓸 때 17세기 존 번연의 작품 ‘천로역정’을 패러디했던 것처럼, 이 작품을 쓰면서 밀턴의 ‘실낙원’을 패러디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루이스 버전의 실낙원, 페렐란드라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루이스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 즉 금성에서 실낙원이 아닌 낙원의 이미지를 구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이제 ‘우주 3부작’ 중 가장 긴 3부 ‘그 가공할 힘’이 남았다. 화성도 금성도 아닌 지구를 다룬다고 한다. 돌고 돌아 다시 지구인 셈이다. 1, 2부를 모두 읽어서 그런지 더욱 기대가 된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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