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말들 1. 파멸하지 않기 위해 돈을 벌었는데, 돈 때문에 파멸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도 나는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생각 때문에 제 가슴이 더 무너집니다. 2. 모든 걸 회복할 수 있을 줄 알고 다 희생하며 버텼습니다. 이제 그 버팀의 끝이 찾아왔습니다. 회복할 것들이 내게 하나도 남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나만 남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쫓았던 걸까요. 3. 저는 별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렇다는 것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부끄럽기도 합니다. 4. 음주뿐만 아니라 일에도 무절제가 있습니다. 열정인 것 같지만 실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늘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선 바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은은하게 오래 지속되는 빛 즉각적인 유익에 아마도 나는 가장 둔감한 사람 중 하나일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그렇다. 기초과학이 그렇고, 문학이 그렇고, 철학과 신학도 그렇고, 글쓰기도 마찬가지며, 매일 30분에서 한 시간 운동하는 것도 그러며, 저녁시간을 가족과 어지간하면 함께 보내는 것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내 일상은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가끔 정체된 것처럼 느끼기도 하지만, 그런 순간들 때문에 이 소중한 일상을 버리고 허상을 쫓는 어리석은 바보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다. 진리는 진부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며, 자기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눈을 뜰 때에야 비로소 진리로 여겨지는 법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것들. 나는 이런 것들 안에 많은 진리와 보화가..
평범함은 지켜내는 것이다 자기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의 심리는 아마도 겸양일 것이다. 마치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자기를 낮추려는 의도일 것이다. 뭔가 특별하지 않은, 혹은 비범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평범함이라고 표현하는 것일 테다. 그런 당신에게 나는 묻고 싶다. 그 겸양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평범함과 비범함의 경계는 무엇인가. 겸양은 미덕이다. 그러나 그 미덕을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할 땐 문제가 된다. 자기를 평범하다고 소개하는 사람의 심리 이면에는 자기 중심성이 있다. 겸양의 탈을 쓴 자기 중심성. 거짓겸손이라고도 부른다. 그들이 평범하다고 말하는 것은 선수를 치는 효과를 낸다. 그들을 진짜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면 아마 그 누구보다도 자기를 무시한다고 성을 낼 것이다. 즉,..
돌연변이 아름다움 한가운데 있을 땐 아름다움이 좀처럼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일탈은 환기다. 나는 인간이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러한 연장선에서 깨닫는다. 말하자면 다름과 다양성에 노출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거나 그것과 적절한 선에서 유지할 줄 아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 이 지난한 과정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열쇠라는 생각이다.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 성찰은 주로 혼자 있을 때 주로 진행되지만, 이때의 ‘혼자 있을 때’라는 표현은 고요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지 고립되는 상황을 일컫는 게 아니다. 타자는 나에게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축복의 유일한 통로이기도 한 것이다. 타자를 통해 나를 본다는 것은 타자가 단순한 거울 역할을 한다는 말을 뛰어넘는다. 그 거울은 외면이 아..
변화 적당한 체념은 삶을 가볍게 한다. 제한된 시간과 유한한 능력을 깨닫는 것은, 그리고 그것에 맞추어 삶을 재정비하는 것은 분별과 지혜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선택되고 우선순위를 차지하는지가 관건이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게으름을 감춘 습관에게 우선순위를 내어줄 것인지, 길들이기 힘들지라도 나를 끊임없이 갱신해 나가는 도전들에게 우선순위를 허락할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분별에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질 때마다 가장 발목을 잡는 것은 어느새 내 일상에 둥지를 틀어버린 작은 악습관들이다. 하나둘, 야금야금 내 빈 시간을 갉아먹는, 마치 낙숫물과 같은 습관들. 가만히 놔뒀다간 끝내 내 일상을 뚫고 내 영혼 안으로까지 침투할지도 모른다. 결단이 필요할..
부끄러워할 줄 알기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에서 의외로 중요한 잣대가 되지 않나 싶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끄러워할 때 나는 주로 비인간성을 느끼지만,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땐 주로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인간다움을 느낀다. 물론 부끄러워하는 맥락이 상황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인간다움과 매력을 느낀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열등감에 빠지는 것과는 다르다. 우린 모두 완벽하지 않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시기를 지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모두 어느 정도 열등감을 느낀다. 나는 열등감이 심해지면 문제가 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미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 ..
처세와 거리 능수능란한 사람, 원만한 사람. 이제는 그것이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숱한 시행착오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 사람의 삶의 무게를 느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도 그리 다르진 않지만, 그런 사람을 나는 가볍게 여겼다. 주위에 있으면 나쁠 것 없지만, 한사코 나는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치 인류를 사랑한다고 큰소리치지만 정작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 사람도 적이 없을 것 같은 저 처세술의 달인이 내겐 한없이 가볍게 보였다. 그러나 그건 진정성을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나의 좁은 관점이었던 것 같다. 한국 와서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라는 개념을 재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가장..
기억, 그 신비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아 여느 때처럼 책을 폈다. 열 페이지 정도 읽었을까. 오른쪽 대각선 앞방향에 앉은 사람의 휴대전화에 아침의 강렬한 햇살이 반사되어 내 눈을 찔렀다. 바로 그 순간 버스 안은 내가 처음 캘리포니아에서 탔던 전철 안이 되었고, 나는 거기서도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휴대전화에 반사된 찰나의 빛은 캘리포니아에서 거의 매일 맞이했던 건조하고 뜨거운 햇살이 되어 나의 기억의 저장고를 열어젖힌 것이다. 기억은 신비다. 이성을 초월하는 공감각적인 기억의 조각들은 시간과 공간마저도 초월하여 지금, 여기에 살아 숨 쉰다. 나는 이 사실이 무척이나 반가워서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이렇게 글을 남긴다.
이간질하는 자 최근에 겪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아주 불쾌하고 더러운 일 때문에 인간에 대한 통찰이 더 깊어진 듯한 기분이다. 수긍하고 싶지 않지만, 소위 개돼지라는 모욕적인 단어로 칭해지는 무리는 엄연히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다만 내가 거기에 속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사탄, 악마, 마귀 등으로 불리는 존재의 헬라어는 디아볼로스, 뜻은 ‘사이에 던지다’로써 둘 사이를 갈라놓는 자이다. 사탄은 나누고 이간질하는 존재인 것이다. 사탄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증명할 수 있느냐, 직접 두 눈으로 본 적이, 경험한 적이 있느냐, 하고 여기서 묻고 싶진 않다. 그러나 나는 이번 일에서 그것들이 하는 짓과 동일한 짓을 하는 인간을 보았다. ‘악의 평범..
을을 자처하는 사람들 아무도 을이라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를 을이라 여기면서 실제로 을로 대우 받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발끈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에게 그들이 갑이라고 믿는 자들과 동일하게 대우해주면, 이상하게도 오히려 그렇게 대우한 사람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고까운 눈으로 쳐다보는 기이한 현상을 목도한다. 갑과 을 따윈 없어요, 그런 이분법적인 시선은 모두를 힘들게 해요, 우리 평등하게 지내요. 그러나 이런 말들은 그들의 귀에 잠시 들어갔다 곧 튕겨져 나온다. 평등의 제안을 튕겨내는 것은 다름아닌 자존심, 그리고 뼛속 깊숙이 각인된 열등감. 스스로 알아서 을을 자처하고, 갑을 공격대상으로 보고, 그들로부터 무시받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그들은 마치 상처받으려고 늘 준비하고 있는 듯해 보..
껍데기 자의식은 높은데 정작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 자존심은 센데 자존감은 한없이 낮은 사람. 한국 와서 가장 상대하기 어렵고 상대하기 꺼려지는 유형이다. 미국에 11년 살 땐 적어도 이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다. 내가 느낀 그들은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알았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대우하고 보호할 줄 알았다. 자존심만 센 사람들은 굉장히 방어적이다. 늘 패배감과 열등감에 잠식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당할 땐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하고 굴욕을 증폭시켜 당한다. 속으로는 언젠 한 번 두고봐라, 하면서 복수의 칼날을 간다. 한편,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여유가 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어적일 필요가 없다. 패배감과 열등감도 잘 못 느끼지만, 그렇다고 승리감이나 우월감에 도취되지도 않..
JUST DO IT 처음엔 의미를 모르고도 전력을 다해 달렸다. 어쩌면 의미를 몰랐던 게 아니라 잘못 안 것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전력을 다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인과관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나중엔 의미를 알고도 전력을 다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의미를 안 게 아니라 안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마침내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역시 인과관계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전력을 다할 수 있을 거라 믿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전력을 다했던 시기는 언제나 의미를 잘 모를 때였다. 그 이후 나는 미래에, 의미를 알게 될 때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것 따윈 하지 않는다. 전력은 언제든 다할 수 있..
저항과 치우침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저항해야 한다. 기울어진 배를 바로 잡으려면 반대편으로 치우쳐야 한다. 저항과 치우침. 자칫 불경스럽거나 편파적이거나 반동적인 뉘앙스를 주는 이 두 단어. 나는 이것들이 가지는 힘을 사랑하게 된다. 시대의 조류에 쓸려가지 않도록,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기울어진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내가 아는 또 다른 힘이 있다. 대세를 따르고, 묻어 가고, 익명성이 가져다주는 안전함 뒤에 숨어 지껄이는 부드럽고 평화로운 말들의 힘. 정의와 불의의 경계가 무너진, 비겁함과 비굴함에 찌든, 동공이 빠르게 움직이는 작자들의 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상대주의에 경도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다.
행복이 깃드는 불편한 삶 사사로운 것들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기 시작할 무렵이었을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는 생각이, 그러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가슴 한 편엔 언제나 소망을 간직한 채 나와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할 무렵이었을까. 삶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일수록 불편과 불행이 반비례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언뜻 보면 불편한 삶이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것저것 불편한 것들을 교체하거나 제거해나가는 데에 무게를 싣게 된다. 돈과 시간을 쏟아붓게 된다. 언젠가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어떤 특별한 사건 때문은 아닌 것 같다. 행복은, 그러니까 쉽게 얻을 수 없는 순도 높은 행복은 적당히 불편함 가운데 적당한 결핍을 느끼면서 서로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꽃피..
장기전 기생충처럼 책상에 붙어 앉아 있다고 해서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듯, 대부분의 장기적인 일은 그것에 올인할 때 효율이 떨어진다. 당연한 얘기지만 장기전은 단기전과 다르다. 100미터 달리기는 숨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 그래야 더 빠르다. 그러나 마라톤은 그럴 수 없다. 관건은 숨을 어떻게 쉬는지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지속할 줄 아는 힘. 이것이 장기전의 핵심이다. 질문: X만 하면 과연 X를 잘 할 수 있을까? (단, X는 장기전 종목 중 하나. 이를테면, 공부, 연구, 글쓰기 등) 상식처럼 알고 있겠지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나는 여기서 여유와 낭만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적당히 쉬면서 하라는 엄마의 조언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대신, 새로움과 낯..
삼찰을 통한 자기 객관화 무언가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다른 큰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게 보통이다. 이는 인간이 유한하기 때문이며,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도 이는 마찬가지다. 무언가 큰 것을 버리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큰 것을 채워야 한다. 즉 버리거나 채우는 것은 어느 한쪽만 할 수 없다. 둘은 함께 일어난다. 즉, 버리는 것도 채우는 것도 아니라 단지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본성상 무언가를 갈망하고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기 때문이고, 그 결과 텅 빈 내면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의미 중독자라고 하지 않던가. 텅 빈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 의미는 무언가가 있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운다고 하는 사람도 결국..
기억에 남는 삶 아직도 관광지 주변에 떳떳하게 포진한, 21세기의 편의점을 여전히 대신하고 있는 조그만 슈퍼마켓들을 마주할 때마다 내 기억은 금세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학창 시절은 1990년대다. 나의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시절까지 포함하는 1990년대. 오늘 가족과 함께 방문한 충북 제천에 위치한 의림지에서 나는 그때의 향수를 강하게 느꼈다. 우린 오리배도 탔는데, 30분간 페달을 밟느라 지친 노예 1 (나)과 노예 2 (아들)을 위해 공주 (아내)는 바로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하사하시었다. 그런데 나무 그늘에 앉아 더위사냥 반쪽을 먹으며 땀을 식히는 동안 한동준의 ‘너를 사랑해’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기억은 공감각적인 법이다. 1990년대의 슈퍼마켓과 오리..
여유와 지혜 무언가를 쉬지 않고 채워 넣는 일에 희열을 느끼던 나도 이젠 나도 모르게 손에 움켜쥐고 있던 무언가를 하나둘 내려놓는 일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하기 싫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언젠가부터 많아졌고, 나는 그것들을 처리하며 참 많이도 불평과 불만을 해댔던 것 같다. 잘 키워온 배지가 어느 순간 오염되어 버리는 것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의무감만으로 잠식되어 간다고 믿었다. 다행히도 그 믿음은 나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믿음은 구원받기 위해 가장 먼저 버려져야 할 그 무엇이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거룩한 일상을 거부하는 일을 사명이라 여겼던 철부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적당한 체념은 마음과 몸을 가볍게 한다. 이때의 체념은 일종의 포기이지만, 멈추거나 후퇴시키는 게..
고속의 적막 어젯밤, 평균 110 km/h 로 약 두 시간 고속도로를 달렸다. 불빛으로 환한 도시 주위를 지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칠흑같이 깜깜한 산으로 둘러싸인 지대를 가로질렀던 것 같다. 간간이 보이는 앞선 차들의 붉은 빛을 추월하기도 하고, 갑자기 밝아지며 요란한 사이렌 소리까지 울리는 터널을 빠른 속도로 지나기도 하면서, 나는 마치 지나온 많은 세월을 짧은 시간동안 재빠르게 훑어보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고속의 적막은 흡사 시간을 가로지르는 기분까지 선사해주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어제 하루는 이렇게, 늦은 밤 고속도로 위에서 운전석에 앉아있는, 창에 비친 내 모습으로 기억될 듯하다. 역시, 어제 나눈 대화처럼, 기억이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인가 보다.
기억의 한 조각 한적한 공간, 여유 있는 시간, 쫓기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그 순간은 추억이 된다. 비가 그치고 온도가 다소 내려갔지만 하늘은 다시 푸른색을 선보인 날, 우린 석 달만에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이번엔 차를 끌고 다녀왔다. 예전엔 기차를 이용했었는데 시간은 물론 비용까지 운전하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우린 고속도로를 타고 휴게소에 들러 통감자와 맥반석 오징어와 커피를 즐기는 루틴도 잊지 않았다. 아들 녀석은 딸기 우유를 마셨다. 부모님과 포항으로 가면서 차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억의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해서. 크고 중요한 일이 기억에 남는 게 아니라 어이없을 만큼 사소한 일들, 이를테면 프루스트 효과처럼 어떤 맛과 향, 혹은 멍 때리고 있을 때 지나쳤던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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