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석의 또 하나의 좋은 안내서 이상환 저, 'Re: 성경을 읽다'를 읽고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안내서로 나는 그동안 여러 번 더글라스 스튜어트와 고든 D. 피가 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김근주 교수가 쓴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를 추천하곤 했다. 이제 한 권 더 늘었다. 바로 이 책, 이상환 목사가 쓴 'Re: 성경을 읽다'이다. 이 세 권을 읽고 본격적인 성경 읽기에 들어간다면 주문 외우듯 수십 번 성경만 통독한 어르신들이 닿지 못한 깊이까지 이해하고 건전하고 건강하게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족과 함께 최근 4년간 성경을 세 번 통독하고 나니 올해부터는 약간의 갈증이 생겼었다. 내년부터는 조금 더 깊고 넓게 성경을 읽고 싶어서 최근에 나는 그 해..
잔상 장편소설을 읽고 나면 마음에 큰 잔상이 남는다. 책을 덮고 나서 며칠간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많다. 기발한 착상과 충격적인 이야기가 친절하지 않게 담긴 단편소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잔상의 밀도는 단편이 높다. 잔상의 수명은 장편이 길다. 잔상의 투과력이랄까 파괴력이랄까 하는, 독자의 내면을 흠뻑 적시는 힘은 장편의 고유한 매력이다. 분량은 시간을 흡수하고, 흡수된 시간은 독자의 마음과 생각을 오롯이 담아낸다. 다른 걸 할 수 있는 선택권을 포기하고 수십 시간 책과 함께 한 나날들이 응집된 결정체가 바로 ‘벽돌책 깨기’의 묘미인 것이다. 어제 남긴 ’언어의 무게‘ 감상문은 제목에 충실하려는 나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사실 이 책은 여러 층위에서 읽을 수 있다. 언어의 무게로도, 글을 쓰고 번역하..
존재와 인식의 다리 파스칼 메르시어 저, '언어의 무게'를 읽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김춘수의 '꽃'에서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그는 그저 하나의 몸짓일 뿐 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일까? 타자에 의해 이름이 불리는 존재만이 비로소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된다는 말일까? 나는 이 시에서 '이름'을 '언어'로 바꿔본다. 그러면 언어는 자연스레 무게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잇는 다리의 무게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겠지만, 작품 속 ..
솔직함, 거짓, 그리고 겸손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가로막는 건 무지와 무식이 아닌 오히려 기존의 지식이다. 지식인이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는 원인도 마찬가지다. 다 알지 못했으나 다 안다고 여긴 대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가, 곧 그것은 교만의 열매다. 필요한 건 겸손. 별 거 아니다. 많이 알아도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 모르면 모른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솔직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겸손은 솔직함의 표현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겸손의 의미를 착각한다. 많이 아는데 적게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걸 겸손이라 생각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 필요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거짓을 동원해서 행할 수 있는 겸손은..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를 읽고 1876년 '작가 일기'에 실린 이 짧은 소설은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을 담고 있다. '뭐라고?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이라고?!', 하며 놀랄지도 모르겠다. 늘 광인의 변주곡 연주하길 즐기며, 지극히 통속적인 상황에서 지극히 심오한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내는 그에게서 외과의사의 메스 같은 날카로움이나 냉철함이 아닌 햇살 같은 따스함이라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건 도스토옙스키를 절반도 모르기 때문에 넘겨 짚은 성급하고 경솔한 추측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도스토옙스키가 외과의사의 메스이기만 했다면..
타자를 파괴하는 구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온순한 여자‘를 읽고 도스토옙스키의 기발함이랄까 기괴함이랄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걸까. 이번엔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 아내를 테이블에 올려둔 채 상념에 잠긴 한 남자의 이야기다. 섬뜩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언제나 그렇듯, 1876년 '작가 일기'에 발표되었던 이 작품도 결코 호러물로 전개되지 않는다. 상황보다 사람, 그리고 사람의 외면보다 내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다행스러운 건, 적어도 이 작품 속 주인공은 '분신‘이나 ’약한 마음‘의 주인공처럼 정신병원으로 끌려가진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증의 정도는 약한 편이라 할 수 있..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낙원, 그리고 그것의 한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우스운 사람의 꿈’를 읽고 1877년 '작가 일기'에 수록된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우스운 사람이다. 사람들은 요즈음 나를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에 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 작품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최근에 다시 읽은 '분신'의 골랴드낀이나, 독서모임에서 같이 읽은 '약한 마음'의 바샤, 그리고 '뽈준꼬프'의 뽈준꼬프까지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다시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소외되고 단절되고 자기 안에 갇혔다는 점에서 이 모든 인물들은 도스토옙스키..
가볍고 주제도 빈약한 두서없는 이야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 살의 노파’를 읽고 이 단편 역시 1876년 '작가 일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실망스러울 정도로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모호할뿐더러, 단편소설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임팩트도 없고, 도스토옙스키스러운 면도 보이지 않으며, 작품 속 화자 (도스토옙스키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스스로도 마지막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시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벼운 데다가 주제도 빈약한 이야기이다. 사실, 한 달 동안 들은 사건들 가운데서 무언가 놀랄 만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계획해 보지만, 막상 일에 착수하면 쓰기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적절하지..
절박함: 쓰는 이유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 팔 할이 절박함이다. 절박함이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다. 어쩌면 내가 예민해서일지도 모른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소중함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랄까.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며 전반전이 남긴 기억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깨달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슬픔과 허무함을 느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후반전은 전반전의 연장전으로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전반전도 나름대로 열심히 달렸던 삶이었다. 자신감도 성취감도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포한 단조로움에서 내가 느낀 건 경박하게 보일 만큼의 가벼움이었다. 내 인생을 그렇게 되도록 놔두고 싶진 않았다.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방법을 알지 못했다. 풍성한 가지가 있..
의식이 사라져도 소리 내는 인간의 추한 욕망의 잔재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보보끄’를 읽고 이 단편소설은 1873년 '시민'지에 발표된 작품이자, '농부 마레이'와 같이 '작가 일기'에 수록된 작품이다. 죽은 사람들의 대화를 다루는, 가히 도스토옙스키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보끄'는 러시아어로 '콩알'이라는 뜻이다. 의성어로 쓰일 땐 '콩콩거리다' 혹은 '버벅거리다'를 연상하면 된다고 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스스로는 부인하지만, 그래서 더욱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인 것 같은, 그러나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존심이 강한 것처럼 보이는 화자가 초반부터 자기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이상한 일들 중 하나가 바로 '보보끄'라는, 마치 누군가가 옆에서 속..
감사가 족쇄로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이전과 다른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다. 생명을 구해줄 만큼의 큰 은혜라면 감사의 크기 역시 커진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감사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 베푼 사람을 향한 적의가 조금씩 생겨난다. 이상한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구원 받았던 순간의 기억은 찰나가 되고, 은혜를 꼭 갚겠다는 의지는 희미해진다. 그 의지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담감이 자리잡는다. 어느새 은혜를 갚는 일은 남은 인생의 족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탈출하고 싶을 만큼, 나아가 차라리 그때 구원의 손길을 거절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면서 말이다.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힘, 시선에 변화를 가져오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농부 마레이’을 읽고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후기작인 5대 장편 중 네 번째 작품 '미성년'을 완성한 후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 남기고 있던 1876년 2월 그가 독자적으로 발간했던 '작가 일기'라는 월간지에 실린 회고록 같은 단편소설이다. 같은 단편이지만, 얼마 전 읽었던 백야 외 여섯 작품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 그러니까 시베리아 유형 전에 쓰인 작품에 해당된다는 점은 이 작품과의 큰 차이점이다.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죽음의 코 앞에서 구원받은 자의 글은 아무래도 그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의 기억은 29세 시절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억은 다시 9세 때의 과거로 우리..
독서의 길 가볍고 쉬운 글에서 반짝이는 재치와 뜻밖의 깊이를 맛보는 즐거움도 쏠쏠하지만 그런 글에 만족해버리고 마는 건 독자로서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무겁고 어려운 글만 읽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런 글을 읽어내려고 애쓰지 않는 독자에겐 분명 한계가 온다고 믿는다. 매너리즘이랄까, 슬럼프랄까 하는, 독서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심하면 읽어야 할 이유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시기가 도둑처럼 찾아온다고 나는 믿는다. 늘 책을 가까이 두면서 나는 그런 상태로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는 편이다. 그러기 위해선 독서에 균형이 필요하다. 누차 언급했던 독서의 3단계 중 1단계 (흥미 위주, 쉽고 가벼운 책들)와 2단계 (지식과 깨달음의 확장, 상대적으로 어렵고 무거운 책들)에 해..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강남숙-박은정-상지영-이지성 고쳐 엮은 '하나님 자녀들의 선교'를 읽고 미천하지만, 여태껏 공부한 신학적 지식들은 두 신학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김근주 교수. 두 신학자의 글엔 공통점이 꽤 많다. 구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흡사하다. 매일 같이 신학책과 성경을 읽으며 내적 갈증을 해소하려고 애쓰던 그때 나에게 이 두 신학자의 책들은 생수와도 같았다. 그중 딱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고른다. 지금은 절판된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책을 읽은 직후에 읽고 또 읽었던 책이다. 그렇..
공간과 시간 낯선 공간에서 허우적거릴 때 유일하게 위로가 되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이었다. 유난히 느리게 가는 시간을 느끼며 나는 그곳의 낯선 대기를 흡입했다. 마치 흐르는 시간에 기대기만 하면 그 공간이 금세 익숙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절박했던 것 같다. 지금도 종종 눈을 감으면 불안함이 느껴질 정도로 낯선 공간이 떠오른다. 그 공간은 모든 게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정지되어 있다. 그 적막 가운데 어딘선가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 생각의 소리도 들린다. 어쩌면 맥박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상당히 긴장한 상태다. 고립되었다는,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누구라도 내 눈을 보면 겁에 질렸으나 대범한 척하고 있는 위선을 눈치챌 수 있..
밤 밤은 나를 절박하게 만든다. 시계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모자라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이라도 더 읽고 조금이라도 더 쓰려고 애쓰게 된다. 어젠 피곤했는지 밤 아홉 시경에 누웠다. 잠시만 누워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아침 여덟 시까지 누워 있었다. 요즘엔 네다섯 시간을 연달아 잘 수 있다. 어젠 합치면 적어도 9시간은 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들과 아내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홀로 맞이하는 아침이었다. 어색했다. 그러나 만족스러웠다. 배도 고프지 않고 모든 게 긍정적으로 보일 만큼 말이다. 충분한 잠이 주는 유익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이렇게 자볼까 한다. 실천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절박함이, 성실한 지속이 나를 갉아먹지 않도록, 무너뜨리지 않도록 해야겠다.
무게 나에겐 밤에 읽는 책이 있고, 시간에 상관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언어의 무게'는 전자에 해당된다. 어제 읽은 부분에서 작품 속 화자는 이런 사람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언어와 함께 보내리라는 생각에 잠길 때가 많은 남자’ 언어의 무게가 느껴졌다. 한 삶에 침투하여 그 삶을 지배한 언어의 힘을 느꼈다. 언어의 폭력성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언어에 대한 사랑과 절박함과 애틋함을 느꼈다. 나에게 물었다. 나는 마지막 날에 무엇과 함께 보내고 싶은가? 세상엔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이 있다.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이 같고 그것이 직업이 되면 좋을 것이다. 현실에선 괴리가 있고 자주 다르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하고 싶은 일..
도스토옙스키의 해학이 녹아있는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을 읽고 ‘참 나, 어이가 없군. 이게 뭐래?’ 이 작품을 읽은 후 나의 첫 반응이다. 아니, 사실 읽는 중에도 그랬다. 이렇게 감상문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안이 벙벙하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장르 (내가 정의한 새로운 장르)에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허를 찔린 기분이다. 아무래도 단편소설이라 그런지 이렇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더 강렬한 것 같다. 입을 쩍 벌리면서 읽다가 (뭥미?) 미처 다물지 못한 채 작품이 끝나버렸다. 뒤늦게 입을 다물고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어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제목만 보면 이 작품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
시간 ‘킬링 타임’이라는 표현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어쩌면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황상태에 빠질 것 같았다. 그리고 물었다. 나는 시간을 사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죽이고 있을까? 사용하는 것과 죽이는 것의 차이. 전자에선 존중하고 아끼는 자세가 느껴지는 반면, 후자에선 함부로 여기고 낭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즉, 시간을 죽인다는 것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고 버린다는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모르는 건 무지다, 어리석음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버리는 행위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다. 나에게 주어진 현재라는 시간. 이 소중한 시간을 죽이지 않고 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killing time’이 아니라 ‘saving tim..
깊은 독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파스칼 메르시어의 장편소설 ‘언어의 무게’를 천천히 읽어나가고 있다. 장편일수록 앞부분은 일부러 천천히 읽는다. 뿌리를 견고히 내린다고나 할까, 아니면 베이스캠프를 친다고나 할까. 앞으로 수백 페이지라는 대양을 건너기 위해선 출발지점이 어딘지 명확히 알아야 하고, 그래야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중해서 읽다 보면 속도는 언젠간 나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서두르다 보면 모든 걸 놓치기 마련이며, 그 어떤 두꺼운 책도 읽어내지 못하게 될뿐더러, 아예 그런 책은 앞으로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벽돌책 깨기의 나름대로의 노하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말 별 거 아니지만 말이다. 아내와 아들이 늦게 집에 들어오는 바람에 두 시간 정도 집에 혼자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