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스러움과 인간다움 다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열 명이 넘는 사람의 경우를 보면,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사람과 현 정권을 여전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같은 과로 구분이 된다. 놀라운 사실이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인데, 그것은 바로 ‘반지성’이라 할 수 있을 그 무엇이었다. 이들은 굉장히 닮았다. 과학, 신학, 철학, 정치, 이렇게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이들에겐 같은 패턴이 보인다. 즉 영역과 상관없는 문제인 셈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관찰한 이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듣지 않는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자기가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고 있다. ..
냉소의 강 건너기 배움과 공부를 통해 우물 밖으로 나온 자는 필연적으로 냉소의 강을 건너게 된다. 혼란의 시기일 수도 있다. 다시 우물 안으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초기의 반동적인 힘 때문일까. 자기가 속했던 곳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어지러울 것이다. 그동안 물처럼 자연스러웠던 일종의 안정감이 사라지면서 두려움과 불안에 잠식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속고 살았다는 불유쾌한 기분은 영혼에 각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자아의 분열을 겪기도 할 것이다.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을 느끼며 교만한 현자인 동시에 방황하는 영혼 같다는 묘한 기분을 한동안 느끼게 될 것이다. 환영한다. ..
배움과 용기 우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동력은 배움, 즉 공부다. 공부를 통해 ‘나’라는 우물 밖으로 나와 마침내 나를 바라볼 수 있다. 공부는 자기 객관화를 지향하고, 자기 객관화는 공부의 궁극적인 열매다. 우물 안에 머물면 성장은 없다. 그러나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그 시간의 끝엔 나밖에 모르는 나이 들고 고집 센 아이가 남게 된다. 남의 시선에 휘둘리면서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 말은 많이 하나 자기조차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분열된 자아들로 똘똘 뭉친 아이. 새가 되기 위해서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파괴는 창조의 전신이다. 파괴하지 않으면 창조는 없다. 파괴를 두려워하지 말자.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닌, 창조를 위한 파괴. 우물 안의 평화는..
작은 일의 무게 성실한 지속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일 중 하나다. 나는 언제나 이런 것들에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압도적인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진전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지난한 과정들 안에 모든 게 담겨 있다고 믿는다. 그 시기를 어떻게 견디고, 즐기며, 그러면서도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내느냐에 인생의 방점이, 즉 자신의 믿음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모두 담겨 있다고 믿는다. 크고 화려한 것들이 아닌 작고 빛바랜 것들이 품고 있는 가치가 내겐 더 소중하다. 그 어떤 성공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제 단상을 남겼다. 연장선에서 오늘은 공부 안 하는 사람의 치명적인 특징 하나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작은 것들의 무게를 잘 모르고 무시한다는 것..
무식, 신념, 그리고 공부 개인적으로 이경규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남긴 문장 하나만큼은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이 말은 종교를 가진 허다한 사람들을 설명한다고도 나는 생각한다. 공부는 시간 날 때 한다거나 머리가 똑똑한 사람들만이 하는 행위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인간은 똑똑한 분들이지만, 그들을 숭배하듯 추종하는 인간들은 무식하다는 점을 나는 역사를 보며 알게 된다. 이건 정치와도 다르지 않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식해지지 않기 위해서다. 무식해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똑똑하고 신념과 야망이 가득 차 세상을 소란하게 하는 소수의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다...
자유와 돈, 그리고 인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죽음의 집의 기록‘을 다시 읽고 4년 만에 재방문한 ‘죽음의 집의 기록’은 여전히 서사가 부재했다. 게다가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기구한 삶을 모르는 독자가 아니었다. 내게 호기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죽음의 집에서 보낸 4년이라는 시간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병렬식으로 감옥 생활을 소개하는 이 책을 끝까지 집중해서 다시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열 시간 정도 이 책과 씨름하면서 드디어 어젯밤 마지막 페이지를 탈환했다. 진정 도스토옙스키 마니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호기심이 사라진 내 눈에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호기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인 건..
두려움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믿고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명백한 사실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그것을 인정하거나 알길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막아 나서는 세태를 본다면 나는 그 사회를 여전히 무속에 잡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 스스로는 무속이 웬 말이냐 할지도 모른다. 자부심에 찬 채 평생 가져온 신앙 혹은 믿음 혹은 세계관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무속이라는 말을 취소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당신은 두려워한 것이고 부인한 것이고 은폐하려 한 것이다. 당신이 말했듯 이런 행위는 당신이 평생 가져온 신앙 혹은 믿음 혹은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 당신이 하나 놓친 게 있다. 당신이 평생 가져왔던 그것들이 완전하다고 믿고 거기에 눌러 안주해 버린 것. 당신의 신앙..
**널리널리 알려주세요. 많이 공유해주세요. 주위에 대학원생이나 포닥들 혹은 연구원 혹은 교수들이 있으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세요. 이 글은 저의 경험이 4할, 허구가 6할인 소설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민수입니다. 제 학부 동기이자 대학원 3년 선배이자 저에게 과학을 가르쳐준 존경하는 선생님이자 지금은 저의 실험생물학자 마지막 커리어에서의 직장 상사인 구본경 박사입니다. 작년에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의 단장이 되어 갖은 일을 다 겪어내며 연구단을 지켜냈습니다. 이 글은 무엇보다 동기이자 제자로서 구박사에게 선물로 쓴 글입니다 (이를 헌사라고 하죠. 책으로 출간되면 헌사로 수정해서 쓸 작정입니다). 이 소설은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가지지만, 제가 기획하는 소설에서는 1부에 해당됩니다. 부디 2부..
잘 쓰기 위해 분별해서 읽기 읽기와 쓰기에 대해 그동안 쓴 글만 해도 수십 편이 되겠지만, 수백 편이라도 모자랄 주제이기에 오늘 하나 더 보탠다. 먼저 질문 한 가지.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하나요?”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두 가지 답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네,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합니다.” >>> 쓰는 행위는 출력에 해당된다. 출력은 입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궁극적인 입력은 읽기다. 또한, 쓰는 행위는 움직임이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에너지는 섭취한 음식을 소화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읽기가 곧 음식이다. 다시 말해, 쓰기라는 행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읽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진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다. 이젠 말 같은 말을 해볼 차례다. 읽는다면 ..
눈부신 햇살. 살짝 차가운 미풍. 구름 한 점 없는 나른한 오후.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난다. 대충 씻고 아들과 함께 맥도날드를 향한다. 햄버거 하나씩 먹고 농구공을 튀기며 근처 학교 운동장으로 간다. 밝고 넓은 운동장. 벤치에 할아버지 한 분이 홀로 앉아 계신다. 햇살을 즐기시고 계신 듯하다. 아들은 농구에 열심이다. 연신 아빠 봐 봐, 하면서 슛이며 점프며 최근 들어 연습한 기량을 보여주려 애쓴다. 같이 농구를 하다가 너무 눈이 부셔서 나도 벤치에 앉았다. 문득 캘리포니아에 살던 때가 떠오른다. 눈부신 햇살이 나를 그 기억으로 인도한 것이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아, 마침내 여유다.
배움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유일한 타개책은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면 알게 된다. 알게 되면 무지와 무식에서 한 걸음 벗어나고 성장하게 된다. 자유와 해방이 있는 곳엔 희열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속박하는 곳엔 이를 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지경이 넓어진 사람은 편향적인 사상에 잘 휘둘리지 않는다. 객관성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배우는 일을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여태껏 견지한 신앙이나 믿음이 근본부터 흔들릴까 봐, 그래서 모든 세계관과 가치 체계가 무너져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 채로 놔 두길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고집이 생겨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마 본인은 그것을 악에 물들지 않는 예방책, 혹은 본인..
부채감 그리고 버티는 힘 내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힘은 부채감에서 비롯된다. 대학 시절에는 늘 다 읽지 못한 채 시험을 쳐야만 했던 교과서의 무지막지한 분량 때문에, 대학원 시절에는 읽어도 읽어도 읽을 게 더 많아지기만 하는 논문 때문에, 그리고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선 이후에는 책장에서 점점 수가 늘어나며 늘 날 조용히 노려보고 있는, 읽지 않은 채 꽂혀 있는, 책 때문에 나는 매일 부채감을 느낀다. 나의 게으름을 탓 하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긍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조금 부지런해지는 것밖에는 없으므로 언젠가부턴 게으름으로 인한 스스로의 비난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물론 그렇게 탓하는 것은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삶에서 건설적인 무엇인가를, 특히..
문학은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이정일 저,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을 읽고 두 전작 ‘문학은 어떻게 더 신앙을 깊게 만드는가‘,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와 함께 이 책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동일하다. 제목에서 문학이 소설로 바뀌었을 뿐 저자의 메시지는 반복된다. 문학이 기독교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스도인이자 아마추어 문학도, 그리고 본업인 과학 만큼 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이런 반복된 메시지가 여전히, 항상 반갑다. 저자와 같은 이유로 나 역시 진지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성경 읽기와 더불어 문학 (그중에서도 고전문학) 읽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작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 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도..
입맛에 맞지 않은 새로운 음식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일독 및 재독 하는 방법도 권장할 만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작가의 작품을 용기 내어 한두 권 읽어보는 것도 절대 게을리하지 말라고 나는 문학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전자는 깊이를, 후자는 풍성함을 배가시키는 훌륭한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깊이와 풍성함, 이 두 가지는 문학의 본질과 맞닿아 있으며, 문학이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문학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까지도 포괄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라는 칠레 작가를 처음 만났다.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이 작품을 들었고, 작품 제목에 나온 '네루다'라는 이름이 내 입에 착 감기기도 했으며, 내가 알고 있는 노..
상식과 교양을 갖춘 정직한 신앙 정한욱 저, '믿음을 묻는 딸에게'를 읽고 제목 (믿음을 묻는 딸에게)과 함께 부제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과 나누고 싶은 질문 25가지)만 읽어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딸이 질문하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을 빌려 저자가 기독교에 관련된 25가지 주제들을 선별하고 일반교양 수준에 맞춰 풀어쓴 글의 모음이다. '시작하며'에 이어 차례를 보면 저자가 다루는 주제들이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신학 혹은 신앙을 전제로 하지만 (저자는 기독교인이다), 그것을 넘어 인문학, 철학적인 내용까지 두루 섭렵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열려있다. 부제에 등장한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이라는 표현을 완전히 이해할 ..
진화가 하나님의 창조 과정으로 사용되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 생물학자의 신앙공부와 신앙고백 보름 전에 올린 서평 하나가 예상보다 큰 파장을 일으킨 것 같아 얼떨떨했습니다. 페친 신청만 해도 백 번 넘게 받았고 (그중 열 명 남짓 페친이 되었습니다), 팔로우도 이백 명 넘게 생겼습니다. 페북 이래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페북 인플루언서가 된 것마냥 우쭐한 기분도 아주 잠시 들더군요. 아마도 제 글 자체 때문이 아니라 제 글이 첨예한 이슈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십여 년 전부터 봐 오던 지긋지긋한 논쟁들과 다툼들로 페북 여기저기서 시끄럽더군요. 강산이 바뀌어도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며 저는 긴 한 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종학 교수님을 비롯한 과신대의 활동 덕분..
혼자가 아닌 함께, 내가 아닌 우리 루리 글, 그림, '긴긴밤'을 읽고 밤의 길이는 영혼의 상태를 반영한다. 짧은 밤은 단잠과 함께 치유와 회복을 의미하는 반면, 긴 밤은 불면에 시달리거나 선잠을 자면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긴긴밤을 통과했다는 것은 생사를 오가는 삶의 극한 순간을 간신히 넘어섰다는 표현이리라. 작품 속 주인공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는 이러한 긴긴밤을 숱하게 통과한다. 이 작품의 방점은 단순히 고난과 역경을 극복했다는 데에 있지 않다. 그 긴긴밤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는 데에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말이다. 같은 코뿔소끼리도, 같은 펭귄끼리도 아닌, 코뿔소 한 마리와 버려진 알을 든 펭귄 한 마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 이 작품이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닌 이유다. 코뿔소..
공간, 사람, 기억, 그리고 문학과 소설 공간은 그리움을 매개한다. 그리움은 그 공간을 볼 때마다 그곳을 충만하게 채웠던 그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흔적이라고도 불리는 공간에 대한 사적인 기억. 사람은 사라져도 공간은 남는다. 그리움이 그렇듯이 공간은 시간을 초월한다.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지만, 유독 그리운 사람이 연관될 때마다 분리가 일어난다. 아마도 그리움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공간은 휘고 낮게 가라앉는다. 이에 맞춰 시간은 느리게 가기 시작하고 어느 점에서 멈추어 선다. 우리가 향수의 끝이라고 부르는 지점이다. 반복된 향수가 언제나 같은 지점에서 끝이 나는 이유다. 재현되지 않는, 아니 재현될 수 없는, 아니 재현되지 않아야 할 향수가 우리에게 언제나 아련함으로 다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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