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가 족쇄로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이전과 다른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다. 생명을 구해줄 만큼의 큰 은혜라면 감사의 크기 역시 커진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감사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 베푼 사람을 향한 적의가 조금씩 생겨난다. 이상한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구원 받았던 순간의 기억은 찰나가 되고, 은혜를 꼭 갚겠다는 의지는 희미해진다. 그 의지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담감이 자리잡는다. 어느새 은혜를 갚는 일은 남은 인생의 족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탈출하고 싶을 만큼, 나아가 차라리 그때 구원의 손길을 거절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면서 말이다.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힘, 시선에 변화를 가져오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농부 마레이’을 읽고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후기작인 5대 장편 중 네 번째 작품 '미성년'을 완성한 후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 남기고 있던 1876년 2월 그가 독자적으로 발간했던 '작가 일기'라는 월간지에 실린 회고록 같은 단편소설이다. 같은 단편이지만, 얼마 전 읽었던 백야 외 여섯 작품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 그러니까 시베리아 유형 전에 쓰인 작품에 해당된다는 점은 이 작품과의 큰 차이점이다.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죽음의 코 앞에서 구원받은 자의 글은 아무래도 그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의 기억은 29세 시절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억은 다시 9세 때의 과거로 우리..
독서의 길 가볍고 쉬운 글에서 반짝이는 재치와 뜻밖의 깊이를 맛보는 즐거움도 쏠쏠하지만 그런 글에 만족해버리고 마는 건 독자로서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무겁고 어려운 글만 읽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런 글을 읽어내려고 애쓰지 않는 독자에겐 분명 한계가 온다고 믿는다. 매너리즘이랄까, 슬럼프랄까 하는, 독서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심하면 읽어야 할 이유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시기가 도둑처럼 찾아온다고 나는 믿는다. 늘 책을 가까이 두면서 나는 그런 상태로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는 편이다. 그러기 위해선 독서에 균형이 필요하다. 누차 언급했던 독서의 3단계 중 1단계 (흥미 위주, 쉽고 가벼운 책들)와 2단계 (지식과 깨달음의 확장, 상대적으로 어렵고 무거운 책들)에 해..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강남숙-박은정-상지영-이지성 고쳐 엮은 '하나님 자녀들의 선교'를 읽고 미천하지만, 여태껏 공부한 신학적 지식들은 두 신학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김근주 교수. 두 신학자의 글엔 공통점이 꽤 많다. 구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흡사하다. 매일 같이 신학책과 성경을 읽으며 내적 갈증을 해소하려고 애쓰던 그때 나에게 이 두 신학자의 책들은 생수와도 같았다. 그중 딱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고른다. 지금은 절판된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책을 읽은 직후에 읽고 또 읽었던 책이다. 그렇..
공간과 시간 낯선 공간에서 허우적거릴 때 유일하게 위로가 되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이었다. 유난히 느리게 가는 시간을 느끼며 나는 그곳의 낯선 대기를 흡입했다. 마치 흐르는 시간에 기대기만 하면 그 공간이 금세 익숙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절박했던 것 같다. 지금도 종종 눈을 감으면 불안함이 느껴질 정도로 낯선 공간이 떠오른다. 그 공간은 모든 게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정지되어 있다. 그 적막 가운데 어딘선가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 생각의 소리도 들린다. 어쩌면 맥박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상당히 긴장한 상태다. 고립되었다는,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누구라도 내 눈을 보면 겁에 질렸으나 대범한 척하고 있는 위선을 눈치챌 수 있..
밤 밤은 나를 절박하게 만든다. 시계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모자라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이라도 더 읽고 조금이라도 더 쓰려고 애쓰게 된다. 어젠 피곤했는지 밤 아홉 시경에 누웠다. 잠시만 누워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아침 여덟 시까지 누워 있었다. 요즘엔 네다섯 시간을 연달아 잘 수 있다. 어젠 합치면 적어도 9시간은 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들과 아내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홀로 맞이하는 아침이었다. 어색했다. 그러나 만족스러웠다. 배도 고프지 않고 모든 게 긍정적으로 보일 만큼 말이다. 충분한 잠이 주는 유익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이렇게 자볼까 한다. 실천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절박함이, 성실한 지속이 나를 갉아먹지 않도록, 무너뜨리지 않도록 해야겠다.
무게 나에겐 밤에 읽는 책이 있고, 시간에 상관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언어의 무게'는 전자에 해당된다. 어제 읽은 부분에서 작품 속 화자는 이런 사람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언어와 함께 보내리라는 생각에 잠길 때가 많은 남자’ 언어의 무게가 느껴졌다. 한 삶에 침투하여 그 삶을 지배한 언어의 힘을 느꼈다. 언어의 폭력성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언어에 대한 사랑과 절박함과 애틋함을 느꼈다. 나에게 물었다. 나는 마지막 날에 무엇과 함께 보내고 싶은가? 세상엔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이 있다.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이 같고 그것이 직업이 되면 좋을 것이다. 현실에선 괴리가 있고 자주 다르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하고 싶은 일..
도스토옙스키의 해학이 녹아있는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을 읽고 ‘참 나, 어이가 없군. 이게 뭐래?’ 이 작품을 읽은 후 나의 첫 반응이다. 아니, 사실 읽는 중에도 그랬다. 이렇게 감상문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안이 벙벙하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장르 (내가 정의한 새로운 장르)에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허를 찔린 기분이다. 아무래도 단편소설이라 그런지 이렇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더 강렬한 것 같다. 입을 쩍 벌리면서 읽다가 (뭥미?) 미처 다물지 못한 채 작품이 끝나버렸다. 뒤늦게 입을 다물고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어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제목만 보면 이 작품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
시간 ‘킬링 타임’이라는 표현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어쩌면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황상태에 빠질 것 같았다. 그리고 물었다. 나는 시간을 사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죽이고 있을까? 사용하는 것과 죽이는 것의 차이. 전자에선 존중하고 아끼는 자세가 느껴지는 반면, 후자에선 함부로 여기고 낭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즉, 시간을 죽인다는 것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고 버린다는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모르는 건 무지다, 어리석음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버리는 행위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다. 나에게 주어진 현재라는 시간. 이 소중한 시간을 죽이지 않고 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killing time’이 아니라 ‘saving tim..
깊은 독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파스칼 메르시어의 장편소설 ‘언어의 무게’를 천천히 읽어나가고 있다. 장편일수록 앞부분은 일부러 천천히 읽는다. 뿌리를 견고히 내린다고나 할까, 아니면 베이스캠프를 친다고나 할까. 앞으로 수백 페이지라는 대양을 건너기 위해선 출발지점이 어딘지 명확히 알아야 하고, 그래야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중해서 읽다 보면 속도는 언젠간 나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서두르다 보면 모든 걸 놓치기 마련이며, 그 어떤 두꺼운 책도 읽어내지 못하게 될뿐더러, 아예 그런 책은 앞으로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벽돌책 깨기의 나름대로의 노하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말 별 거 아니지만 말이다. 아내와 아들이 늦게 집에 들어오는 바람에 두 시간 정도 집에 혼자 ..
기억의 문 낯선 식당. 처음 듣는, 그러나 집중하지 않아도 귀에 착 감겨오는 재즈의 선율.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흘러나오는 리드미컬한 보이스. 괜스레 울적해졌다. 이럴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는 어김없이 미국이다. 먼 이국의 땅. 아는 사람,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새로운 세상. 모든 것이 낯설 땐 낯설다는 표현은 힘을 잃는다. 그것은 완전한 새로움. 새로운 각인이기 때문이다. 아주 잠시, 알 수 없는 메커니즘에 의해서 나는 잊어버렸던 2011년의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일상 속엔 이렇듯 다른 시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는 문이 존재한다. 그 문은 노래 한 곡일 수도 있고, 데자뷰일 수도 있다. 우연찮게 비친 햇살이 만들어내는 각도일 수도, 코 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그 ..
약함의 진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약한 마음’을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나갈 때 꼭 필요한 단어 하나를 뒤늦게 수확한 기분이다. ‘악한 evil’ 마음이 아닌 ‘약한 weak’ 마음. 지금까지 읽어온 많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기이하리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바로 이 단어, ‘약한’ 마음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약함과 악함 사이의 상관관계. 때론 나의 ‘약함’이 타자에겐 ‘악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타자의 눈에 비친 ‘악함’을 인지하게 된 나의 ‘약함’은 비로소 ’악함’으로 변모할 기회를 맞이하고 종종 발현하기도 한다는 것. 약함과 악함 사이의 상관관계는 약함의 변질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 이 작품 속 약한 마음은 관청..
도스토옙스키 이전의 도스토옙스키 맛보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꼬마 영웅’을 읽고 단편소설이라 그런 걸까? 다시 푸시킨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는 장편으로 읽어야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최대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로 풀어내기에는 아무래도 분량은 감수해야 하는가 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갈망한다. 벽돌이라도 좋다. 아직 목이 마르다. 이 작품은 꽤나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도스토옙스키답지 못한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도스토옙스키가 도스토옙스키로 되어가는 과정의 단면이라는 해석이 더 적절할 듯싶다. 평면적인 사랑 이..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우리를 깨우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그 책을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 독서 경력이 5년이 넘은 지인이 읽는 책들을 살펴본 적이 있다. 평균 한 달에 다섯 권 정도 읽는다고 했다. 나 역시 책을 좋아하기에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직접 가방을 열어 가장 최근에 구입한 책이라며 보여주었다. 자기 계발서와 연예인들이 쓴 에세이, 그리고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다. 최근에 읽은 책 중 추천할 만한 작품이 있으면 한두 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대답 안에 도끼는 없었다. 이유식과 죽과 미음이 있을 뿐이었다. 실망스러운 마음..
푸시킨의 옷을 입은 도스토옙스키의 구전동화 같은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을 읽고 감상문 (특히 문학 작품에 대한)을 남길 때 나는 작품의 제목을 할 수 있는 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저자 (혹은 출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실패다. ‘결혼식’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작품을 다 읽어도 왜 크리스마스나 송년회가 아닌 ‘크리스마스 트리’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별 뜻 없이 도스토옙스키는 연말이라는 시기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했겠거니 하며 넘어가려 한다 (재독 하면 혹시 알게 될까? 내가 이 작품을 다시 읽긴 할까?). 내러티브에서는 도스토옙스키보다 푸시킨이 더 많이 느껴진다. 여태껏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 비해..
인간의 본성에서 찾아낸 정직함과 인간다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정직한 도둑’을 읽고 ‘정직한 도둑’이라니. 형용 모순인가 싶다. 도둑은 정직보다 거짓에 더 가깝다고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작품을 보기 좋게 관통하고 함축한다. 나는 이 작품 속 정직한 도둑을 인간이라 읽는다. 이 작품을 좀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다른 두 단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가난’과 ‘연민’이다. ‘가난’은 ‘정직‘과 ’도둑’을 ‘연민’이라는 통로를 이용하여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이끈다. 작품은 조촐한 독신자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난한 일인칭 화자의 일상에 아스따피 이바노비치라는 더 가난한 세입자가 침대 하나 놓을 공간 없는 작은 방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어느 날 누군가 ..
스스로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인간의 속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뽈준꼬프’를 읽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의 캐릭터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히 낯선 인물로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 친근하고 익숙한 내 분신으로 자리매김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깊숙한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게 되고, 가끔은 소름도 끼친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그 모습이 나일 리가 없다고 극구 부인하는 시기도 종종 도래하는데, 이런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다 보면 정신분열이란 게 어떤 것인지 왠지 알아버린 것 같은 상태까지 나아가게 된다. 타자화된 인물의 동기화, 결코 합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이어지는 분열..
일차적인 독서를 넘어서 정작 감성이 풍부한 독자는 감성팔이 책을 읽지 않는다. 감성이 풍부한 작가 역시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감성팔이 책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감성팔이 책은 주로 누가 쓰고 누가 읽는가. 왜 여전히 이런 책이 잘 팔리는가. 한 가지 이유로 나는 대부분 독자들의 독서가 일차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흥적이고, 감각적이며, 읽기 편하고,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이해가 쉬운 책들 위주로 진행되는 독서. 며칠 전 포스팅에서 이미 언급했듯 이러한 일차적인 독서는 아주 중요하다. 얕아도 재미, 흥미, 유익, 교훈 등을 쉽게 접하며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도 지적했듯이 독서가 이런 단계에 머물게 되면 독서는 하나의 우물이 되고 독자는 그 안에 갇힌 채 독서를 지속..
독서의 쓸모 가볍고 쉬운 책에 길들여질 땐 일부러 두껍고 어려운 책을 고른다. 한 페이지, 아니 한 단락, 아니 한 문장을 이해하기에도 집중을 요구하는 책을 손에 든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집중해서 천천히 읽어나간다. 독서의 또 다른 묘미다. 독서의 일차적인 용도는 여가생활로써 우선 재미를 동반해야 한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차적‘이다. 독서는 반드시 공부로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여기서 공부라 함은 교과서 같은 책으로 진행하는 학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계발하고 성장시키며 초월시키는 모든 행위를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학생들이나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모든 인간은 자기라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길이..
이성과 믿음 익숙하지 않은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데엔 세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별 일 있겠냐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 별 일이 생겨도 어떻게든 처리하면 되고 처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설사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결국 손해 볼 건 없고 나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도전은 이성이 아닌 믿음에 기반을 둔다. 물론 그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를 초월의 순간으로 이끈다. 중력에서 벗어나게 돕는다. 이성만으로 이뤄진 세상엔 진보는 있을지언정 도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도약은 이성을 갱신시키고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 이성은 언제나 한 발 느리다. 무모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믿음이 먼저 간다. 이성은 믿음으로 행해진 결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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