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독서량이 뚝 떨어졌다. 일주일에 한두 권씩 읽어나가는 게 보통인데, 지난 보름간 단 한 권밖에 읽지 못했다. 그것도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사실 독서에 할애한 시간은 거의 변동이 없었다. 이 책 저 책을 집적거렸다. 심지어 그중 두 권은 모두 백 페이지 가량 읽기도 했다. 하지만 지속하지 못했다. 아니,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해야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끝내 덮어버린 후 다음에 처음부터 다시 읽자 다짐하고 책장에 도로 꽂아 넣었다. 진득하게 자리에 앉아 집중하는 내 모습이 희미해진 것 같다. 가을을 맞이하려고 한 발짝 늦게 준비했다가 결국 맞이한 게 겨울이라 그런 걸까. 갑자기 추워지며 연말연시의 분위기가 되어버려 그런 걸까.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에 내 마음도 ..
전복적인 저항 관찰에서 성찰로, 성찰에서 통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나는 삼찰이라고 부른다.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감지하면 인간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경험이 축적되고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생기며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결론은 다른 일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주어 좀 더 종합적인 해석을 할 수 있게 해 주며, 미래를 예측하거나 어떤 일을 예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대부분 본능에 따른다. 생존본능인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나는 현대인들에게도 이렇게 생존본능에 충실한 경우를 목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공 가도를 달리는 눈먼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들이 특히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더 높이 더 위로,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더 앞으로 ..
골랴드낀: 인간의 다른 이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분신’을 다시 읽고 서사의 부재는 종종 묘사의 풍요로 발현된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읽어내기란 버거운 일일 때가 많다. 특히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매력, 즉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기대한 독자에겐 커다란 실망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여전히 제자리인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책이라는 늪에 빠져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이랄까. 이 작품의 경우 차라리 풍성한 묘사가 외부환경, 이를테면 아름다운 자연이나 여행지의 풍경, 혹은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풀어냈다면 완독 하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참히 그런 기대를 저버린다. 시종일관 ‘골랴드낀’이라는 한 사람의 내면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
보기 좋다는 말 보기 좋다는 말은 아주 오래된 말이다. 단지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표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이 신과 사람 사이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용되는 현장을 목도한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일방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뉘앙스로써 주로 힘 있는 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보기 좋다는 말은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이다. 나는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보기 좋다는 말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힘 있는 자들이 상대적으로 힘 없는 자들에게 보기 좋은 모습이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주로 관습에 의지한다. 그 관습은 힘 있는 자들을 형성하고 성장시킨 환경이다. 중요한 건 그 공간 역시 하나의 우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흔적이 드러나는 삶 제행신 저, ‘지하실에서 온 편지’를 읽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교회 문화 속에서 간증을 접할 때면 늘 조심하게 됩니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다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생 역전했다는 이야기는 등장인물과 배경상황만 다를 뿐 동일한 맥락으로 반복, 도배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그 간증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마음이 불편해지곤 합니다. 물론 이런 해석이 저의 열등감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기승전 잘됨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축복의 전부인 것 같은 뉘앙스는 기복신앙의 메시지와 다를 게 없어 보이고, 간증이 그것을 더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자기중심설 어떤 분야에서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즐기며 그곳을 삶의 바운더리로 삼는 사람들. 거기에서 삶의 이유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나아가 점점 견고해지는 자기애에 빠지는 이들을 보며 ‘고인 물’이라는 단어 만큼 적절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면 고인 물이란 표현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다. 어느 날 보니 자신이 고인 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상석에 앉길 즐기는 사람들, 대접받길 좋아하는 사람들 중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들 역시 수동태의 삶을 살고 있다면, 다시 말해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면, 이들의 삶을 본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
박명 ‘트와일라잇 (twilight)'으로 더 잘 알려진 박명은 해뜨기 전이나 해 진 후 빛으로 밝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 시간은 길지 않다. 곧 해가 뜨거나 어둠이 찾아온다. 노을이 자주 동반되는 이 시간은 낮과 밤의 경계에 해당한다. 어릴 때부터 이 시간을 동경했다. 해뜨기 전에 밖이 환해진다는 사실이 내겐 신비할 정도로 낯설고 놀라운 일이었나 보다. 여전히 어두운 시간, 나는 조용히 집을 나서곤 했다. 동네 뒷산에 올라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르다 보면 주위가 금세 환해졌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조급해진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 기다렸던 일출을 볼 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때 내가 기다렸던 건 일출이었지만 나와 함..
가을 추워지는 길목을 사랑한다. 주위에 울긋불긋한 나무들과 화사하게 핀 꽃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른 아침과 늦은 밤 건물과 건물을 오가며 그 안에서 세상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착각 속에 더 이상 빠지지 않고 이렇게 눈을 들어 밖을 쳐다보고 바깥으로 나와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시간에 쫓겨 빠르게 차로 오갈 땐 보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멍하니 창밖을 쳐다볼 때, 자전거를 타고 크리스피한 대기를 가로지를 때,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걸을 때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아무나 볼 수 없는 것들. 이런 것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창조주의 손길에 경탄까지 하는 내 모습이 좋다. 이제서야 뭔가 가진 듯한 기분이다. 어느덧 시월 말이다. 조만간 산을 찾을 생각이다.
그럼에도 읽고 쓰는,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가난한 사람들’을 다시 읽고 독서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의 태동과 함께 드디어 시작된 나만의 소소한 프로젝트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는 예전에 한 번 읽고 감상문을 남겼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출간 순으로 다시 읽고 다시 감상문을 남기는 과업이다. 이른바 ‘재독 프로젝트’. 앞으로 약 2년 간 지속될 예정이다. 그 첫 작품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선정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를 문단에 데뷔시킨 첫 소설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작품처럼 화려한 데뷔를 바라진 않는다. 그저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까지 묵묵히 전진하고 싶은 마음이다. 3년 전 초독..
듣고 싶은 말들 1. 파멸하지 않기 위해 돈을 벌었는데, 돈 때문에 파멸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도 나는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생각 때문에 제 가슴이 더 무너집니다. 2. 모든 걸 회복할 수 있을 줄 알고 다 희생하며 버텼습니다. 이제 그 버팀의 끝이 찾아왔습니다. 회복할 것들이 내게 하나도 남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나만 남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쫓았던 걸까요. 3. 저는 별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렇다는 것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부끄럽기도 합니다. 4. 음주뿐만 아니라 일에도 무절제가 있습니다. 열정인 것 같지만 실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늘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선 바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흔들림 없는 신앙 흔들림 없는 신앙은 어려움이 닥쳐와도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런 신앙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단 하나의 체제만이 진리인 것처럼 믿고 따르게 만드는 방법이다. 엄연히 다른 체제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심산 (배려일까???)으로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들을 숨기고 하나만을 알려주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다양한 체제들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체제만을 따를 때 빠질 수 있는 경솔한 확신에 대해 주의를 주는 방법이다. 이는 다양성에 노출될 때의 혼란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차피 거쳐야 한다면 경솔한 ..
기억의 스냅샷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아두는 일. 내가 글쓰기라 부르는 일이다. 나는 이 행위에 대해 일종의 부채감을 가지는 것 같다. 그 누구도 요구한 적 없었다. 이런 것을 자처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다만, 운명이랄까, 사명이랄까 하는 무언의 책무를 느낀다. 내가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 단순히 글쓰기를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 글쓰기의 팔 할이 절박함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기록하고 남기는 행위로부터 나는 신성한 그 무엇을 감지하는 듯하다. 마치 사진사가 추억의 한 장면을 스냅샷으로 남기듯, 나는 기억의 순간들을, 그 찰나들을 글로 남기려 한다. 특정한 목적이 있지도 않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낄 뿐이다. 그 부름에 순응할 뿐이다. ..
내가 기준인 정의와 불의 나는 정의가 구현되는 것보다 불의가 척결되는 장면에서 더 쾌감을 느낀다. 선한 자가 승승장구하는 것보다 악한 자가 파멸에 이르는 장면에서 더 짜릿함을 느낀다. 왜일까. 아마도 나의 모자람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나는 정의의 구현과 선한 자의 잘됨을 진심으로 바라는 것일까. 여전히 정의가 아니라 나의 유익에 부합하는 바가 구현되길 바라고, 선한 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잘되길 바라는 게 아닐까. 어쩌면 불의한 자나 악한 자의 파멸도 그들이 나의 유익에 부합하지 않거나 내 눈에 거리끼는 사람과 동일인물일 때에 한해 기뻐하는 건 아닐까. 정의의 실현과 선한 자의 잘됨을 바라는지 묻기 전에 그걸 바라는 나 자신의 상태부터 점검해야겠다.
누가 예수인가 서진교 저, ‘예수행복학 개론’을 읽고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앞부분에 소개되는 몇몇 대표적인 내러티브를 예수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며 소설의 형식을 빌려와 약간의 주해와 해석을 가한 서진교 목사의 이 작품은 마태복음 25장 40절로 수렴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는 저자의 첫 저서 ‘작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간증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저자의 일상적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며, 혹은 읽기 전이나 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글의 제목으로 쓴 ‘누가 예수인가?’이다. 이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구..
인생과 인간, 코미디 같은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80페이지 채 되지 않는 이 얇은 책은 세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에세이로 구성된다. 그중 가장 짧은 작품이 표제로 쓰인 ‘깊이에의 강요’이다. 수년 전에 이 책을 구입했을 때에도 나는 이 작품밖에 읽지 않았다. 다 읽는 데 십 분 채 걸리지 않는 이 소설은 의외로 여운이 강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주관적이고 무분별한 평가가 한 예술가를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깊이가 없다는 한 문장 때문에 저명한 예술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쫓노라면 씁쓸함이라는 자갈을 씹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씁쓸함의 정점은 자살 후 남겨진 예술작품을 같은 비평가가 깊이에의 강요가 느껴진다고 평가하는..
내적 자유를 찾는 여정, 지금도 계속되는 싸움 타라 웨스트오버 저, ‘배움의 발견’을 읽고 소설로 보이는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국어판 표지에선 알아채기 힘들다. 한국에서 붙인 제목 ’배움의 발견‘을 봐도, 부제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를 읽어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원서 표지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원제 ‘Educated' 오른쪽 아래에 'A MEMOIR'라고 쓰여있다. 그것도 대문자로, 별다른 설명 없이, 덩그러니.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회고록’이라는 뜻의 ‘Memoir'라는 단어가 이 작품에 대한 독법의 시작점이라고. 소설과 회고록의 차이는 허구와 실제의 차이다. 소설 속 화자의 이야기는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회고록 화자의 이..
처음 읽는 푸시킨 알렉산드르 푸시킨 저 ’눈보라‘를 읽고 미천한 상식으로, 학창 시절부터 내게 각인된 푸시킨이라는 이름은 그저 외국 시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비롯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그들의 입을 통해 자주 들려진 푸시킨은 그 이상이었다.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선 작가라는 위상을 넘어 러시아 문학을 있게 한 근원 같은 느낌이랄까. 러시아 국민은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숱한 러시아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푸시킨.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는 푸시킨으로부터 뻗어 나온 지류의 깊고 풍성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푸시킨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언제 한번 읽어봐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녹색광선 책으로 드디어 푸시킨을 읽게..
잔혹함과 나약함 사이에서 엔도 슈사쿠 저, ‘바다와 독약’을 읽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던 1945년 5월, 일본을 공습하던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의 초대형 폭격기 B-29 한 대가 오이타현과 구마모토현 경계 근처에 추락하여 탑승원 12명이 모두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중 8명은 서부 사령부로부터 재판도 없이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데, 때마침 생체실험용으로 제공해 달라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의 제안이 승인되는 바람에 이들은 모두 끔찍한 실험동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만행은 실화다.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해 5월 17일부터 6월 2일에 걸쳐 실제로 벌어진 이 처참한 인권유린 사건을 역사는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이라고 기록한다.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은 이 작품 ‘바다와 독약’의..
악인과 함께 숨 쉬면서 정의를 행하기 그들은 말을 아꼈다. 상대방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쓰는 방법은 어딜 가나 동일했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뒤에서 특정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지도 않고, 특정 행동에 대해 객관적인 비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해당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축이 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 속에 혹시나 하는 부정적인 가능성을 귀신 같이 찾아내어 그들에게 다가가 자극시키고 활성화시키고 증폭시켜 그것이 마치 사실인 듯 스스로 믿게 (넘겨짚게) 만든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나는 이들을 악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철저히 무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
은은하게 오래 지속되는 빛 즉각적인 유익에 아마도 나는 가장 둔감한 사람 중 하나일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그렇다. 기초과학이 그렇고, 문학이 그렇고, 철학과 신학도 그렇고, 글쓰기도 마찬가지며, 매일 30분에서 한 시간 운동하는 것도 그러며, 저녁시간을 가족과 어지간하면 함께 보내는 것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내 일상은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가끔 정체된 것처럼 느끼기도 하지만, 그런 순간들 때문에 이 소중한 일상을 버리고 허상을 쫓는 어리석은 바보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다. 진리는 진부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며, 자기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눈을 뜰 때에야 비로소 진리로 여겨지는 법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것들. 나는 이런 것들 안에 많은 진리와 보화가..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