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원과 하나님 나라이성희 저,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를 읽고이상한 일이다. 한 정원사의 글이 늘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하나님 나라를 재현해 냈다. 마치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내게도 일어난 것 같았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2:8)." 정원사의 언어가 과학자인 내 귀에 들렸고,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11)." 저자가 내게 쓴 글귀가 떠올랐다. "자신의 언어로 복음을 담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별다른 통역 없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한 것이다. 그는 정원사이고 나는 과학자이지만, 그래서 서로 다..
반복과 영원쓰다가 읽다가 졸다가 멍 때리다가,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면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깔깔대며 보드게임도 하고 산책을 나선다. 소리 내어 성경을 함께 읽은 후 아들은 잠자리에 들고 아내와 나는 한두 시간 정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하루 중 내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오롯이 읽고 쓰고 사유하는 시간. 나의 저서는 모두 이 시간으로부터 잉태되었다. 참 괜찮은 삶이라는 생각, 이 정도면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내가 꿈꿔온 삶 중에 이런 삶은 없었다. 오로지 더 위로 더 앞으로 더 빨리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것만이 행복을 보장해 주리라 믿었다. 어리석은 믿음이었다. 어느덧 쉰에 가까운 나이에 다다르니 행복은, 그리고 깊은 만족은 위가 아닌 아래에, 앞이 아닌 옆에,..
선선함이 아닌 추위를 느꼈다. 불과 2주 전만 해도 열대야의 그늘 속에서 투덜대지 않았던가. 어제부터 외투를 꺼내 입었다. 비까지 내리니 벌써 겨울인가 싶을 정도다. 섭씨로 10도 정도 내려갔을 뿐인데 세상이 바뀐 것만 같다. 창문을 닫고 두꺼운 이불을 꺼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추워지는 길목을 사랑한다. 차가운 대기를 느끼고 있자니 괜스레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책을 읽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자꾸만 허공을 응시한 채 한동안 멍하니 있게 된다. 무엇 하나 이룬 게 없다는 생각, 그리고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 사이에서 갈팡지팡 하다가 오후 한때를 보냈다. 그런데 그리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익숙한 기분이 들고, 이제는 그런 질문조차 이 시절에나 할 수 있는 특권처럼 여겨진다...

예술가의 삶, 그리고 상실파스칼 키냐르 저,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고10월의 첫 아침을 맞이하며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날씨는 흐리고 곧 비가 올 것만 같다. 나는 밑줄 그은 문장을 노트에 옮겼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p112)"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문득 지금 이 순간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하루의 시작에 늘 아침이 있었건만, 그 반복되는 무수한 아침 가운데 똑같은 아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마치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감동에 젖는다. 영원한 것도 없지만 똑같은 것도 없다. 이 책은 내게 두 가지 숙제를 남겼다. 하나는 '예술가의 삶에 대한 숙고'이고, 다른 하나는 '상실에 대한 사색'이다. 두 ..
창조의 시작, Something: 작가 노트글쓰기는 창조 활동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조는 아니다. 글쓰기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무가 아닌 유다. Nothing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something에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어떤 단어나 문장, 혹은 어떤 그림이나 자연 풍경 등이 발단이 되어 연쇄적인 텍스트들이 작가 내면에서 쏟아져 나올 때 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를 위해서는, 혹은 글쓰기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깊고 풍성한, 그리고 지속적인 읽기가 수반되어야 한다.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단조로운 읽기는 단조로운 쓰기를, 얕은 읽기는 얕은 쓰기를 제조해 낸다. 단조롭고 얕은 글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본인이 쓴 문장을 어떻게든 아름답게..
기적어떤 글이나 말이 머리와 가슴으로 깨달아지고 삶으로 녹아들어 변화를 이뤄내는 것만큼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영이시고 말씀이신 기독교의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셨던 사건을 원형으로 한다. 깨달아지는 것, 그리고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 이 두 단계를 거쳐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은 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일견 칭의와 성화, 물론 둘을 따로 생각할 수 없지만)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참 그리스도인이란 그 인생이 회심이라는 과정 가운데에 있어야만 하는 존재자라는 문장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실제 삶에서 아무런 변화를 겪어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작가: 읽고 쓰는 삶을 사는 자편집자로부터 어제 바로 피드백을 받았다. 낯선 시선은 언제나 내가 쓴 글에 잠겨 무감각해졌던 나를 깨워 일으키고 객관적인 눈을 회복시킨다. 애정을 가진 첫 독자의 입김은 저자가 가장 귀 기울여야 하는 소리다. 편집자의 제안을 경청하니 나만의 텍스트로 엉성하게 구축되었던 숲의 윤곽이 비로소 체계적으로 보였다. 저자는 프로토타입의 몸을 창조해 내고 편집자는 그것을 개량해서 옷을 입힌다. 그렇게 글은 책이 된다.요청받은 글, 마감이 정해진 글을 학창 시절 숙제처럼 여겼던 나는 과거의 나다. 한때 부담으로 여기던 글쓰기 숙제가 이젠 기다려지고 즐기게 된다. 노예라고 불려도 상관없다. 충실한 노예, 즐기는 노예가 되리라. 읽고 쓰는 삶이 일상 깊숙한 곳으로 자리 잡아 그것을 하지 않..

글쓰기와 소설 쓰기, 그리고 작가와 소설가김연수 저, '소설가의 일'을 읽고2년 전에 읽었던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가 자연스레 소환되었다. 글쓰기 대가들은, 특히 소설을 써본 작가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까?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전혀 지루하지 않게, 그것도 과하지 않은 유머를 고수하면서까지,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이 어떠한 것인지 핵심적인 부분들을 쉽게 풀어주는 두 작가는 닮아도 너무 닮아 보였다. 안정효의 소설을 읽어본 적 없이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읽었던 것처럼, 김연수의 소설을 한 권도 읽어본 적 없이 '소설가의 일'을 읽었다. 글쓰기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분들, 읽고 쓰기가 일상이 되어 읽고 쓰지 않으면 허기를 느끼는 사람들 (나는 이들을 감히 '작가..
글쓰기에서 '무거운 것'글쓰기에 남다른 뜻이 있어 글쓰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이들 중 다음과 같이 막연한 믿음을 갖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을 때 쓰면서 쓰는 만큼 필력도 빠른 속도로 향상될 거라 믿는 믿음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만, 당신이 타고난 글쟁이가 아닌 한 그 나이브한 믿음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물론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한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총알이 다 떨어진 총을 들고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처럼 허탈함으로 가득 찬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해 보지도 않고 글쓰기는 어렵다는 둥, 내가 뭐라고 글쓰기에 도전했냐는 둥, 이런저런 이유를 들이대며 글쓰기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왕왕 있을 것이다. 글쓰기 ..
**그동안 제가 쓴 감상문으로 단 한 번이라도 도움을 받으셨던 분들은 기념으로 댓글 하나 남겨주세요~** 365: #김영웅의책과일상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좋아한다.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서 이것 저것 따지는 것보다 현장에 나가 직접 발로 뛰는 걸 좋아한다. 그래야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언젠가부터 읽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 읽고 쓰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나타날 정도의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티 안 내고 가만히 읽고 가만히 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읽은 것을 글로 써 내는 것이었다. 독후감상문을 지속해서 썼고, 페북과 브런치에도 ..

여전해서 반가웠고, 여전해서 아쉬웠던 정유정 저, ‘영원한 천국’을 읽고 3년 전 그때 그 느낌이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 공포가 엄습해 왔고, 내 가슴은 숨 가쁘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미친놈처럼 연신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 몰입해서 책을 읽은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아, 역시 정유정이었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그리고 3년 전 출간 즉시 읽었던 ’완전한 행복‘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만나는 정유정은 여전했다. 그녀 특유의 휘몰아치는 서사는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을 정도의 긴장 가운데 이번에도 나를 급박하게 내몰았다. 523 페이지도 단편으로 느껴질 만큼. '7년의 밤'과 '완전한 행복'을 나는 1, 2순위로 매긴다. 그리고 이 순위는 이번 작품을..
일탈과 일상 일탈과 일상을 오가는 반복은 역동적인 삶의 중추이며 균형 잡힌 삶을 향한 정도라고 나는 믿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안정감을 선사하는 익숙함은 대부분 반복이 맺은 열매다. 우리는 이 반복을 습관이라 부르기도 하고 일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흔히들 '다람쥐 쳇바퀴' 같이 의미가 상실된 채 단순 반복만으로 구성된 삶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반복'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은 단순함을 훌쩍 뛰어넘는다. 말하자면 매너리즘을 야기하는 것도 반복이지만, 매너리즘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방법도, 아이러니하게도, 반복이다. 요컨대 반복은 반복에 멈추지 않고 초월을 지향한다. 어둠을 모르면 빛의 의미를 알 수 없듯이 안전한 우물 안에서만 순응하며 성장하고 만족하다 보면 그 사람은 결코 우물 밖을 알 수 없..
인간은 동물입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아닌 동물과 비교할 때 인간은 정말 우월한 걸까요?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느끼는 우월성은 인식론적 폭력이라고 해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대답이 아닐까 합니다. 과신대애서 동물을 주제로 다루는 9월호 과신뷰에 부탁을 받고 쓴 글이 공개되었습니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인간이 아닌 동물 사이를 여러분은 어떤 관점으로 보고 계신가요?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 치우쳐 있지는 않은지 이 글을 한 번 읽어 보시면서 점검해 보시길 권합니다. https://www.scitheo.or.kr/column/?idx=99814964&bmode=view&fbclid=IwZXh0bgNhZW0CMTEAAR2VS3f-BPy3p5NeD_c-Sga3..

누가 지혜자인가?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치‘를 다시 읽고재독의 맛은 초독 때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으며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뒤늦게 음미하는 데에 있다. 재방문은 첫 방문의 기억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그 기억을 벗 삼아 처음보다 더 깊은 단맛을 느끼게 해 주고, 좀 더 느긋하게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어울림을 맛보게 해 준다. 적어도 줄거리를 따라가는 급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일까.정말이지 기적 같은 독서모임 덕분에 나는 일생에 한 번도 읽기 힘든 도스토옙스키 주요 작품들을 두 번이나 읽어 나가는 복을 누리고 있다. 독서모임 일주년에 맞춰 읽은 작품 (이른바 '재독 프로젝트'의 아홉 번째 작품)은 ‘백치’였다. 5년 만에 다시 읽었기 때문일까. 앞의 여덟 작품보다 유난히 이 작품..
아마추어 문학도가 읽고, 다시 읽고, 함께 읽는 도스토옙스키'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독서모임이 이번 달로 일주년을 맞이한다. 놀랍게도 매달 열 명 안팎으로 어김없이 모였다. 지난 열두 달간 우린 도스토옙스키의 열 작품을 출간 순으로 읽었다. 초기작으로 '가난한 사람들', '분신', '백야 외'를, 중기작으로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로부터의 수기', '악어 외'를, 후기작으로 '죄와 벌', '노름꾼'을 함께 읽고 나누었다. 다음 주 목요일 (9월 12일)에 있을 일주년 모임에서는 '백치'를 함께 읽고 나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열린책들 버전 번역자인 계동준 교수님이 게스트로 참석하셔서 러시아문학 전공자의 연륜을 나눠주실 예정이다. 앞으로 남..
절박함의 정체 경미해서 다행이었지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던 기억.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뇌경색으로 잠시 졸도한 적이 있었다. 마침 곁에 있던 아내의 도움으로 그 순간을 무사하게 지나칠 수 있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24시간 두통과 편두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생각한 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머릿속은 무엇을 말하라고 하는데 내 입은 그 명령을 거역하고 엉뚱한 단어들을 더듬더듬 내뱉고 있었다. 답답했다. 입을 다물기로 했다. 표정과 몸짓으로 말하는 게 더 정확했다. 졸도하기 직전의 그 몇십 분. 언어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지 못하는 언어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이게 끝인가 싶었다. 아찔한 순간이었..
충만을 향한 결핍나는 독서가다. 평일엔 기껏해야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을 수 있을 뿐이지만, 나는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어딜 가든 내 가방엔 책이 한두 권이 들어 있다. 짬이 나면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시청하지 않고 책을 읽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방랑자이기도 하다. 책을 읽을 때면 움켜쥘 수 있는 글, 문장, 혹은 단어를 나는 늘 찾아 헤맨다. 그것들을 발굴하기 위해 독서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찾아내지 못한 독서에서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충만을 향한 여정에서도 나는 더 자주 결핍을 맛보는 것이다. 닿을 듯 말 듯한 그 아슬아슬함. 이것이 독서를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고, 독서의 참 묘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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