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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를 읽고 또 공부하다 석영중 저,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석영중 교수의 ‘백치’ 강의)’를 읽고 들어가며 ’백치’를 두 번 정독했다. 아마추어 문학도가 이 작품의 정수를 알아채고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자유롭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해석해 버린 후 책을 덮고 “나는 그 책을 읽었다”라고 말하는 행위에 대해서 나는 감히 ‘무례하다’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전문학을 대할 때는 더욱더. 몇 달 전 존경하는 석영중 교수님의 ‘백치’ 강의가 책으로 나왔다. 마침 독서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에서 ‘백치’ 함께 읽기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망설임 없이 구매해서 책장에 고이 모시고 있다가 ‘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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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과 하나님 나라이성희 저,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를 읽고이상한 일이다. 한 정원사의 글이 늘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하나님 나라를 재현해 냈다. 마치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내게도 일어난 것 같았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2:8)." 정원사의 언어가 과학자인 내 귀에 들렸고,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11)." 저자가 내게 쓴 글귀가 떠올랐다. "자신의 언어로 복음을 담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별다른 통역 없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한 것이다. 그는 정원사이고 나는 과학자이지만, 그래서 서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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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삶, 그리고 상실파스칼 키냐르 저,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고10월의 첫 아침을 맞이하며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날씨는 흐리고 곧 비가 올 것만 같다. 나는 밑줄 그은 문장을 노트에 옮겼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p112)"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문득 지금 이 순간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하루의 시작에 늘 아침이 있었건만, 그 반복되는 무수한 아침 가운데 똑같은 아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마치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감동에 젖는다. 영원한 것도 없지만 똑같은 것도 없다. 이 책은 내게 두 가지 숙제를 남겼다. 하나는 '예술가의 삶에 대한 숙고'이고, 다른 하나는 '상실에 대한 사색'이다. 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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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소설 쓰기, 그리고 작가와 소설가김연수 저, '소설가의 일'을 읽고2년 전에 읽었던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가 자연스레 소환되었다. 글쓰기 대가들은, 특히 소설을 써본 작가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까?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전혀 지루하지 않게, 그것도 과하지 않은 유머를 고수하면서까지,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이 어떠한 것인지 핵심적인 부분들을 쉽게 풀어주는 두 작가는 닮아도 너무 닮아 보였다. 안정효의 소설을 읽어본 적 없이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읽었던 것처럼, 김연수의 소설을 한 권도 읽어본 적 없이 '소설가의 일'을 읽었다. 글쓰기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분들, 읽고 쓰기가 일상이 되어 읽고 쓰지 않으면 허기를 느끼는 사람들 (나는 이들을 감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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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해서 반가웠고, 여전해서 아쉬웠던 정유정 저, ‘영원한 천국’을 읽고 3년 전 그때 그 느낌이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 공포가 엄습해 왔고, 내 가슴은 숨 가쁘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미친놈처럼 연신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 몰입해서 책을 읽은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아, 역시 정유정이었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그리고 3년 전 출간 즉시 읽었던 ’완전한 행복‘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만나는 정유정은 여전했다. 그녀 특유의 휘몰아치는 서사는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을 정도의 긴장 가운데 이번에도 나를 급박하게 내몰았다. 523 페이지도 단편으로 느껴질 만큼. '7년의 밤'과 '완전한 행복'을 나는 1, 2순위로 매긴다. 그리고 이 순위는 이번 작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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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혜자인가?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치‘를 다시 읽고재독의 맛은 초독 때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으며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뒤늦게 음미하는 데에 있다. 재방문은 첫 방문의 기억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그 기억을 벗 삼아 처음보다 더 깊은 단맛을 느끼게 해 주고, 좀 더 느긋하게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어울림을 맛보게 해 준다. 적어도 줄거리를 따라가는 급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일까.정말이지 기적 같은 독서모임 덕분에 나는 일생에 한 번도 읽기 힘든 도스토옙스키 주요 작품들을 두 번이나 읽어 나가는 복을 누리고 있다. 독서모임 일주년에 맞춰 읽은 작품 (이른바 '재독 프로젝트'의 아홉 번째 작품)은 ‘백치’였다. 5년 만에 다시 읽었기 때문일까. 앞의 여덟 작품보다 유난히 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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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와 함께 한 삶홍종락 저, ‘루이스의 인생 책방’을 읽고루이스의 작품을 여러 권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종태, 강유나, 홍종락, 이 세 번역자 이름에 친숙할 것이다. 이 책은 홍종락 번역가의 저서다. 루이스의 저작들을 읽고 연구하고 번역하며 얻은 깊고 풍성한 통찰과 그것들이 저자의 인생을 관통하며 남긴 고유한 흔적들이 편안한 문체로 쓰여 있다. 루이스와 홍종락, 이 두 이름에 대한 신뢰가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제목이 모호했다. 일견에는 루이스에게 영향을 준 책들을 소개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루이스가 아니라 홍종락에게 영향을 준 여러 루이스 책들을 직간접적으로 소개한 글들의 모음이었다. 참고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개혁신앙'에 이미 연재된 적이 있다. 제목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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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성경 읽기: 참 자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더 크고 깊은 신뢰피터 엔즈 저,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를 읽고비록 십 년 전 출간된 책이지만, 피터 엔즈의 저서가 새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반가운 나머지 아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제목부터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라니! 멋지지 않은가? 원제를 찾아보니 ‘The Bible Tells Me So'이다. 직역하면 ‘성경은 내게 그렇게 말한다’ 정도가 될 텐데, 나 같은 아마추어도 이 문장을 그대로 번역서 제목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영어 관용구가 사용된 원제의 어감이 전혀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말 제목을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라고 바꾼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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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선물 같은 쉼김소영 저,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내게 왜 이 책이 굴러들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저자의 이름을 착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순간은 삶에서 종종 불가항력적인 반전을 만드는 법. 네 번째 저서가 될 초고를 완성하고 갑자기 찾아든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던 중 내 눈에 이 책이 잡혔다. 잡히자마자 손에 들려 반나절 만에 다 읽혀버렸다. 이 책은 내면의 거울이 되어 고전 소설을 즐겨 읽게 된 이후 에세이를 상대적으로 멀리 하던 내 모습을 솔직하게 비추었고, 그로 인해 의기소침해진 나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오랫동안 잃어버린 사람처럼 이 책을 흡수했다. 적시에 찾아온 단비 같은 책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좋은 책이란 객관적이기도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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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체감한 자의 고백김미옥 저,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를 읽고왜 글을 쓰냐는, 아니 어떻게 그렇게 계속 글을 쓸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는 항상 '절박함'을 든다.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며 내 영혼이 차갑게 생기를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내게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어 준 것이 '읽기'였다. 그리고 끝내 주저앉지 않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것은, 저자 김미옥처럼,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내게도 안식이자 도피처이자 탈출구였고, 나는 그로 인해 깊은 위로와 치유를 경험했다. 저자에게 글쓰기의 첫걸음은 '삶에 대한 열망'이었다. 나도 비슷하다. 표현을 달리 하자면, 내게 글쓰기의 첫걸음은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였다고나 할까. 처한 환경과 맥락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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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되는 삶켄트 하루프 저, '플레인송'을 읽고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플레인송'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한 단선율로 작곡된 성가로, 모든 곡이 꾸밈없고 단순한 선율과 곡조를 특징으로 한다'라고 책 서두에 설명되어 있다. 몇 달 전 읽었던 작품 '축복'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레인송' 역시 작가가 창조한 홀트라는 가상의 공간을 주무대로 한다. 그곳은 허구의 공간이면서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갑질을 해대는 천박한 인간들이 있고, 사적인 앙갚음으로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정의를 지키려는 불의하고 비열한 인간들도 있다. 또한 그곳에는 소소하고 빛바랜 일상이 작고 따뜻한 의미를 가지는 일종의 축복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가진 건 별로 없지만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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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권태, 공허, 그리고 뜻밖의 위로앤드루 포터 저, ‘사라진 것들’을 읽고제임스 설터와 켄트 하루프를 섞어 놓은 느낌이랄까. 처음 읽는 앤드류 포터의 글은 덤덤한 일상을 기술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순간들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쉬게 하고 먹먹한 가슴이 되게 만든다.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아낸, 마흔이 넘은 중년 남성이 매 단편의 주인공인데, 주인공과 비슷한 연배라면 아마도 나처럼 책 속의 문장들만이 아닌 행간까지도 자연스레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 나는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서 맛보았던 반짝이는 권태와 공허를 느꼈고, 켄트 하루프의 '축복'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감사하며 소망하게 되었다. 미국 생활을 11년간 해보아서 그런지 이 작품은 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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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골랴드낀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쁘로하르친 씨‘를 읽고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담백하게 세묜 이바노비치 쁘로하르친이라는 한 남자의 삶의 잠시 보여주며 그의 숨겨진 정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 단편소설이다. 단순할뿐더러 작품 구성이나 묘사와 서사 모두에서 내가 알고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다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어 읽는 내내 어리둥절했다. 나름 반전이라고 주인공의 정체가 거지가 아닌 알부자였다는 결말 역시 내겐 놀랍기는커녕 진부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들과 비교할 때 눈에 띄게 미성숙한 글, 혹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라는 나의 인상은 그리 과장되진 않을 것이다.작품 속 주인공인 쁘로하르친은 아무나 상대하기 힘들 만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구두쇠이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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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을 읽고'가난한 사람들'과 '분신' 사이에 쓰인 이 작품은 별다른 설명 없이 뾰뜨르 이바니치와 이반 뻬뜨로비치 사이에 오고 간 아홉 통의 편지로 구성된 아주 짧은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친했던 두 사람이 불과 며칠 만에 절교에 이르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펼쳐 보인다. 두 사람이 만나 직접 대화를 했더라면 아마도 일이 그렇게 불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는 직접 대화보다 언어를 걸러서 정갈하게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 반면, 편지를 읽거나 쓸 때만큼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가진다. 아무리 답장이라도 모든 문장에 대해 응답할 수도 없을뿐더러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관점의 차이 때문에 작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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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한루프의 질문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영원한 남편‘을 읽고석영중 교수는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는 건 통속에서 심오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역시 통속이라는 입구와 '인간의 깊은 본성'이라는 출구로 이뤄진 길이 바로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으로 난 길이라 생각한다. 벽돌 같은 분량과 길고 복잡하고 낯설기까지 한 러시아 이름들, 그리고 종종 등장하여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장광설을 제하고 보면, 실제로 그의 작품이 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지극히 통속적이다 (그래서 결코 진입장벽이 높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정작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읽은 독자들은 한결같이 책을 덮고 나서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는데, 대부분은 그의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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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론을 믿는 노예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노름꾼‘을 다시 읽고귀국하며 새로 장만한 책으로 이 작품을 재독 했다. 3년 전 썼던 초독 감상문을 읽고 그때와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 문장이 노름꾼의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거라 여기는 듯하다. "이쯤 해서 자리를 떴어야 했는데 나는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운명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또 그녀를 혼내 주고 약 올려 주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이다."이상한 느낌. 운명.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구. 이 세 가지는 주인공을 계속해서 도박장에 붙잡아 두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 일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문장은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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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선을 넘어선 자, 영점을 재조정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죄와 벌‘을 다시 읽고 5년 만에 ‘죄와 벌‘을 다시 읽으니 내 시선은 줄거리보다 등장인물에 더 오래 머문다. 게다가 지난 10개월간 독서모임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부터 출간순으로 한 달에 한 작품씩 읽어오며 도스토옙스키의 발전과정을 함께 해서 그런지, 등장인물이 더욱 친근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이 글에서 나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나 자신은 물론 인간을 보길 원한다.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이 글이 아니라 나의 초독 감상문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작품을 읽고 줄거리를 충분히 파악하고 작품에 흐르는 철학과 사상을 느껴본 분들을 위한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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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도 있었을 체스 한 판슈테판 츠바이크 저, ‘체스 이야기’를 읽고우둔해 보이고, 이마가 넓으며, 어느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시키는 일을 제외하고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방에 앉아 있는 게 전부여서 도대체 커서 무슨 일을 할 수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아이가 있었다. 도나우강에서 돛대도 없는 작은 배를 운항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슬라브 남부 출신 선장의 아들이었다. 그는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후 어느 착한 신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신부는 그를 교육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그의 무능력과 무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졌다. 어느 날, 신부가 지방경찰과 체스를 두고 있는데, 그 소년은 말없이 그들 옆에 웅크리고 앉아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체스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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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무게와 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는 책이화정 저, '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을 읽고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얻고 또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였다. 이화정 목사의 '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을 숨 가쁘게 내리읽고 이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 까닭은 저자의 고백도 바울의 고백과 같은 맥락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엄마의 일기는 내가 쓴 박사 학위 논문보다 더 신학적이고 내가 한 어떤 설교보다 목회적이고 내가 한 어떤 기도보다 영성 깊다고 자부할 수 있다. 복음의 씨앗은 이렇게 이름 모를 섬마을의 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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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을 읽고이 작품도 읽고 나서 여전히 구름을 잡는 느낌이지만, 작품 끄트머리에서 화자가 앞의 두 작품 '유리의 도시'와 '유령들'의 화자임을 직접 밝히고 세 작품의 연결고리를 잠시 설명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실체가 잡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앞의 두 작품이 손에 잡히는 건 아니다. 화자가 설명하는 세 작품에 대한 짤막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세 편의 이야기는 결국 같은 이야기지만, 내 의식 속에서는 그 하나하나가 동일한 사건의 각기 다른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세 편의 이야기가 결국 같은 이야기라는 점은 스토리만을 고려하면 아마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리란 생각이다. 드러난 스토리가 아닌 그 스토리가 머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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