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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한루프의 질문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영원한 남편‘을 읽고
석영중 교수는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는 건 통속에서 심오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역시 통속이라는 입구와 '인간의 깊은 본성'이라는 출구로 이뤄진 길이 바로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으로 난 길이라 생각한다. 벽돌 같은 분량과 길고 복잡하고 낯설기까지 한 러시아 이름들, 그리고 종종 등장하여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장광설을 제하고 보면, 실제로 그의 작품이 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지극히 통속적이다 (그래서 결코 진입장벽이 높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정작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읽은 독자들은 한결같이 책을 덮고 나서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는데, 대부분은 그의 통찰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대와 문화를 달리하여 도스토옙스키가 지금도 우리에게 읽히는 이유다).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서 통속적인 주제라 함은 돈, 치정, 살인,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제목부터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이 작품에서는 살인을 제외한 (살인미수에 그치는 사건은 등장한다) 돈과 치정, 그중에서도 치정, 또 그중에서도 불륜이 이야기를 이끄는 입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아마도 나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회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영원한 남편' 역시 도스토옙스키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중편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둘째 아내 안나와 함께 한 약 4년 간의 유럽 여행 중에 쓰였다고 한다. 5대 장편에 속하는 '백치'와 '악령' 사이에 발표된 작품이다. 선금을 받고 돈에 쫓기다가 약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노름꾼'이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땐 그나마 심사숙고해서 쓴 작품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5대 장편의 무게와 비교할 땐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고, 도스토옙스키의 전작을 읽으려는 의도가 없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은 두 중년 남성이다. 주인공인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벨차니노프, 그리고 그와 대립각을 세우며 소위 ‘영원한 남편’ 역으로 나오는 빠벨 빠블로비치 뜨루소스끼.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 그리고 그 가운데 묘사되는 심리 공방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나는 이 역시 도스토옙스키적인 설정이라 생각한다. 벨차니노프는 과거 T 시에 1년 간 머물 때 뜨루소스끼의 아내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 얼마 전 아내가 죽고 뜨루소스끼는 벨차니노프가 거주하고 있는 뻬쩨르부르그로 넘어왔다. 혼자가 아니라 그의 어린 딸 리자와 함께 말이다. 우연찮게 벨차니노프는 그런 뜨루소스끼와 마주치게 되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가 결국에는 그와 대면하게 되고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도 그 당시 정부였던 벨차니노프는 합법적인 남편 뜨루소스끼를 대면하기가 거북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게다가 뜨루소스끼의 딸이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작품 마지막에 가서 확인도 하게 되는데, 그때 이미 리자는 병에 걸려 죽고 난 다음이었다.
중요한 것은, 뜨루소스끼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벨차니노프에게 복수하기 위해 뻬쩨르부르그로 왔다는 사실이다. 비록 뜨루소스끼는 벨차니노프에게 접근하여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미지근하고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분열된 양상을 보이며 대했지만 말이다. 벨차니노프 입장에선 뜨루소스끼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뜨루소스끼의 의중을 정확히 몰라 그를 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뜨루소스끼 입장에선 벨차니노프 스스로 자기 아내와의 불륜 사실과 리자의 정체를 말해주길 기다리기도 하고 분노에 차서 죽이고도 싶었을 것이다. 작품 가운데 실제로 뜨루소스끼는 벨차니노프를 죽이려는 시도도 한다. 하지만 손에 상처를 내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벨차니노프는 덩치가 컸고 힘도 훨씬 세서 뜨루소스끼는 간단하게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벨차니노프의 신체적 강함을 차치하고서라도 뜨루소스끼가 벨차니노프를 다치게 할 수는 있어도 결코 죽일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먼저는 제목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의 이름 때문이다. 제목이 '영원한 남편' 아닌가. 그는 아내의 죽음 이후 벨차니노프에게 찾아가 자기가 청혼을 한 여자가 거주하고 있는 별장으로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그는 죽은 아내를 금세 뒤로하고 다시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이 되는 것이 이 자의 인생의 목표 같은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 만큼 나에게 뜨루소스끼는 공감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인물이다).
또한 벨차니노프와 뻬쩨르부르그에서 헤어지고 2년 후 우연찮게 다시 만났을 땐 실제로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편이 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그렇게 결혼한 뜨루소스끼와 그의 아내 곁에는 또 다른 남자가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그 다른 남자와 불륜 관계에 있었을 것이고, 합법적인 남편인 뜨루소스끼는 과거에 하던 대로 또다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아내를 가만히 놓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남편이라는 위치만을 법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신세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벨차니노프는 그 사실을 금세 간파했고, '영원한 남편'이라는 표현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뜨루소스끼라는 단어의 뜻은 '겁쟁이'라고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그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해낼 수 없지만 영원히 남편 자리를 꿰차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차럼 비굴하게 살아가는 남자. 이런 자가 그와 많은 부분에서 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벨차니노프를 쉽게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란 게 내 지론이다.
서로가 서로의 심중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마치 떠 보려는 듯한 자세로 서로에게 가면을 쓰고 대하는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가소롭고 경박한지 느낄 수 있게 된다.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아 진실을 말해도 그것이 진실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느낄 수 있다. 벨차니노프의 우월감과 자기 만족감, 동시에 뜨루소스끼에게 느끼는 비밀스러운 죄책감과 리자의 죽음으로 인해 느끼는 좌절감. 그리고 뜨루소스끼의 열등감과 자기 비하, 동시에 벨차니노프를 향해 느끼는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모순처럼 보이지만 벨차니노프에게 느끼는 사랑과 동경심. 이 두 사람의 심리 공방과 독백을 읽으며 나는 나를 보았고 인간을 볼 수 있었다.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내 안의 나.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본능과 나의 심리. 작품을 다 읽고 이렇게 감상문을 쓰며 이 소설의 작품성이 높지 않다고 평가하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또다시 도스토옙스키의 마법에 걸려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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