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이 만든 선물 같은 쉼김소영 저,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내게 왜 이 책이 굴러들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저자의 이름을 착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순간은 삶에서 종종 불가항력적인 반전을 만드는 법. 네 번째 저서가 될 초고를 완성하고 갑자기 찾아든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던 중 내 눈에 이 책이 잡혔다. 잡히자마자 손에 들려 반나절 만에 다 읽혀버렸다. 이 책은 내면의 거울이 되어 고전 소설을 즐겨 읽게 된 이후 에세이를 상대적으로 멀리 하던 내 모습을 솔직하게 비추었고, 그로 인해 의기소침해진 나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오랫동안 잃어버린 사람처럼 이 책을 흡수했다. 적시에 찾아온 단비 같은 책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좋은 책이란 객관적이기도 하지만 ..

읽고 쓰기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체감한 자의 고백김미옥 저,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를 읽고왜 글을 쓰냐는, 아니 어떻게 그렇게 계속 글을 쓸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는 항상 '절박함'을 든다.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며 내 영혼이 차갑게 생기를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내게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어 준 것이 '읽기'였다. 그리고 끝내 주저앉지 않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것은, 저자 김미옥처럼,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내게도 안식이자 도피처이자 탈출구였고, 나는 그로 인해 깊은 위로와 치유를 경험했다. 저자에게 글쓰기의 첫걸음은 '삶에 대한 열망'이었다. 나도 비슷하다. 표현을 달리 하자면, 내게 글쓰기의 첫걸음은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였다고나 할까. 처한 환경과 맥락은 다..

지속되는 삶켄트 하루프 저, '플레인송'을 읽고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플레인송'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한 단선율로 작곡된 성가로, 모든 곡이 꾸밈없고 단순한 선율과 곡조를 특징으로 한다'라고 책 서두에 설명되어 있다. 몇 달 전 읽었던 작품 '축복'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레인송' 역시 작가가 창조한 홀트라는 가상의 공간을 주무대로 한다. 그곳은 허구의 공간이면서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갑질을 해대는 천박한 인간들이 있고, 사적인 앙갚음으로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정의를 지키려는 불의하고 비열한 인간들도 있다. 또한 그곳에는 소소하고 빛바랜 일상이 작고 따뜻한 의미를 가지는 일종의 축복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가진 건 별로 없지만 기꺼이..

우수, 권태, 공허, 그리고 뜻밖의 위로앤드루 포터 저, ‘사라진 것들’을 읽고제임스 설터와 켄트 하루프를 섞어 놓은 느낌이랄까. 처음 읽는 앤드류 포터의 글은 덤덤한 일상을 기술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순간들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쉬게 하고 먹먹한 가슴이 되게 만든다.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아낸, 마흔이 넘은 중년 남성이 매 단편의 주인공인데, 주인공과 비슷한 연배라면 아마도 나처럼 책 속의 문장들만이 아닌 행간까지도 자연스레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 나는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서 맛보았던 반짝이는 권태와 공허를 느꼈고, 켄트 하루프의 '축복'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감사하며 소망하게 되었다. 미국 생활을 11년간 해보아서 그런지 이 작품은 굉장..

차라리 골랴드낀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쁘로하르친 씨‘를 읽고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담백하게 세묜 이바노비치 쁘로하르친이라는 한 남자의 삶의 잠시 보여주며 그의 숨겨진 정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 단편소설이다. 단순할뿐더러 작품 구성이나 묘사와 서사 모두에서 내가 알고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다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어 읽는 내내 어리둥절했다. 나름 반전이라고 주인공의 정체가 거지가 아닌 알부자였다는 결말 역시 내겐 놀랍기는커녕 진부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들과 비교할 때 눈에 띄게 미성숙한 글, 혹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라는 나의 인상은 그리 과장되진 않을 것이다.작품 속 주인공인 쁘로하르친은 아무나 상대하기 힘들 만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구두쇠이기도 ..

어리석음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을 읽고'가난한 사람들'과 '분신' 사이에 쓰인 이 작품은 별다른 설명 없이 뾰뜨르 이바니치와 이반 뻬뜨로비치 사이에 오고 간 아홉 통의 편지로 구성된 아주 짧은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친했던 두 사람이 불과 며칠 만에 절교에 이르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펼쳐 보인다. 두 사람이 만나 직접 대화를 했더라면 아마도 일이 그렇게 불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는 직접 대화보다 언어를 걸러서 정갈하게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 반면, 편지를 읽거나 쓸 때만큼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가진다. 아무리 답장이라도 모든 문장에 대해 응답할 수도 없을뿐더러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관점의 차이 때문에 작은 오해..

다시 무한루프의 질문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영원한 남편‘을 읽고석영중 교수는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는 건 통속에서 심오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역시 통속이라는 입구와 '인간의 깊은 본성'이라는 출구로 이뤄진 길이 바로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으로 난 길이라 생각한다. 벽돌 같은 분량과 길고 복잡하고 낯설기까지 한 러시아 이름들, 그리고 종종 등장하여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장광설을 제하고 보면, 실제로 그의 작품이 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지극히 통속적이다 (그래서 결코 진입장벽이 높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정작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읽은 독자들은 한결같이 책을 덮고 나서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는데, 대부분은 그의 통..

운명론을 믿는 노예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노름꾼‘을 다시 읽고귀국하며 새로 장만한 책으로 이 작품을 재독 했다. 3년 전 썼던 초독 감상문을 읽고 그때와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 문장이 노름꾼의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거라 여기는 듯하다. "이쯤 해서 자리를 떴어야 했는데 나는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운명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또 그녀를 혼내 주고 약 올려 주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이다."이상한 느낌. 운명.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구. 이 세 가지는 주인공을 계속해서 도박장에 붙잡아 두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 일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문장은 도스토옙스키..

잘못된 선을 넘어선 자, 영점을 재조정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죄와 벌‘을 다시 읽고 5년 만에 ‘죄와 벌‘을 다시 읽으니 내 시선은 줄거리보다 등장인물에 더 오래 머문다. 게다가 지난 10개월간 독서모임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부터 출간순으로 한 달에 한 작품씩 읽어오며 도스토옙스키의 발전과정을 함께 해서 그런지, 등장인물이 더욱 친근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이 글에서 나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나 자신은 물론 인간을 보길 원한다.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이 글이 아니라 나의 초독 감상문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작품을 읽고 줄거리를 충분히 파악하고 작품에 흐르는 철학과 사상을 느껴본 분들을 위한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등장인물..

이길 수도 있었을 체스 한 판슈테판 츠바이크 저, ‘체스 이야기’를 읽고우둔해 보이고, 이마가 넓으며, 어느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시키는 일을 제외하고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방에 앉아 있는 게 전부여서 도대체 커서 무슨 일을 할 수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아이가 있었다. 도나우강에서 돛대도 없는 작은 배를 운항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슬라브 남부 출신 선장의 아들이었다. 그는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후 어느 착한 신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신부는 그를 교육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그의 무능력과 무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졌다. 어느 날, 신부가 지방경찰과 체스를 두고 있는데, 그 소년은 말없이 그들 옆에 웅크리고 앉아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체스판을 ..

기도의 무게와 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는 책이화정 저, '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을 읽고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얻고 또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였다. 이화정 목사의 '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을 숨 가쁘게 내리읽고 이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 까닭은 저자의 고백도 바울의 고백과 같은 맥락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엄마의 일기는 내가 쓴 박사 학위 논문보다 더 신학적이고 내가 한 어떤 설교보다 목회적이고 내가 한 어떤 기도보다 영성 깊다고 자부할 수 있다. 복음의 씨앗은 이렇게 이름 모를 섬마을의 한 여인..

또, 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을 읽고이 작품도 읽고 나서 여전히 구름을 잡는 느낌이지만, 작품 끄트머리에서 화자가 앞의 두 작품 '유리의 도시'와 '유령들'의 화자임을 직접 밝히고 세 작품의 연결고리를 잠시 설명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실체가 잡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앞의 두 작품이 손에 잡히는 건 아니다. 화자가 설명하는 세 작품에 대한 짤막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세 편의 이야기는 결국 같은 이야기지만, 내 의식 속에서는 그 하나하나가 동일한 사건의 각기 다른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세 편의 이야기가 결국 같은 이야기라는 점은 스토리만을 고려하면 아마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리란 생각이다. 드러난 스토리가 아닌 그 스토리가 머금고 ..

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유령들'을 읽고난해하다거나 심오하다고 말하기에는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대중성을 폄훼하는 듯한 뉘앙스라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르이고, 그게 소설의 최대 장점인 줄 안다. 그러나 그 상상력이 한낱 꿈의 조각처럼 파편적이거나, 두서없는 망상으로 표현된다면, 적어도 나는 읽어야 할 것들이 언제나 밀려 있는 평소의 상황에서 그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기발함이나 재치 위주의 말초적인 자극이나 충격을 주려는 목적으로 써진 현대 소설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써내려가면서, 아무나 알 수 있지만 누구나 깨닫지 못하는 일상 속에 빛바랜 진리를 재발견하고 재해석..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를 읽고퀸은 작가였다.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지금은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쓰며 산다. 추리소설의 주인공 탐정 이름은 맥스 워크이다. 퀸은 윌슨이 되어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를 고립시켰지만, 한편으로 그는 워크가 되어 여전히 세상에 발을 걸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워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조사하고 미행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퀸에게는 허구일 뿐이다. 이쯤에서 나는 궁금해진다. 퀸이 사는 세상은 실재하는 것일까? 허구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퀸에게 실재와 허구는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닐까? 구분이 되기는 할까?어느 날 전화가 걸려온다. 잘못 걸려온 전화다. 퀸도 윌슨..

성서를 읽기 위한 정직한 자세토마스 머튼 저, '성서를 열다'를 읽고제목이 '성서를 읽다'가 아닌 '성서를 열다'라는 점에 주목한다. 읽기 위해서는 먼저 열어야 하는 법. 그렇다. 이 책은 성서를 본격적으로 읽는 단계가 아닌 그 전단계에 초점을 맞춘다. 성서는 어떤 책인지, 성서를 읽는 나는 누구인지, 성서를 읽을 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성서를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저자의 탁월한 통찰과 뛰어난 필력은 덤이다. 저자는 우리가 종종 성서를 일방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성서를 현실과 상관없이 영적인 세계의 이야기로만 여긴다든지, 거룩하고 독실한 신자들의 전유물로 여긴다든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성, 심지어는 상식에 반하는 책으로 여기는 경우도 왕왕..

듣고 싶은 설교프레드릭 비크너 저, '진리를 말하다'를 읽고설교자들이 주요 독자층인 듯한 이 책은 설교를 주로 듣기만 하는 나에게 다시 설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해 주었다. 저자가 말하는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에 잠시 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설교를 들어본 횟수가 손꼽을 정도인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 시대 이 한국 교회에 목사는 참으로 많은데 참 설교자가 요원하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말이다.진부할 정도로 너무 당연해서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명제 중 하나는 '설교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일 것이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비슷한 여정을 겪는다. 특히 늙어가는 중엔 비틀거리면서도 어쨌거나 가야 할 길을 인도받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

'나'라는 지하 세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다시 읽고 차라리 골랴드낀이 나았다,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이 작품 속 일인칭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지하’라는 또 하나의 세상에서 잉태된 최종 병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스로를 소외 혹은 고립시키면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여실히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조금 과장해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를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고안한 가상의 생체 실험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닫으며 다시 조용히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다! 아무렴, 이 맛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지! (그런데 왜 이 말을 하고도 나는 겸연쩍은 걸까!)..

별의 재료를 아는 사람이 아닌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길 이종태 저, '경이라는 세계'를 읽고 철학, 신학, 문학, 과학 등의 모든 학문, 그리고 모든 지식과 깨달음의 문을 열고 정직하게 걸어가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고, 또 마주해야만 하는 것. 앎이라는 과정의 동반자이자 길잡이, 나아가 그 과정 자체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고, 그것으로 한 걸음 다가간 대상과의 거리를 줄이기는커녕 더 확대시켜 결코 다가설 수 없다는 인정을 마음 중심으로부터 기쁘게 받아 내고야 마는 것. '경이'일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앎이라는 과정을 겪게 된다. 모름과 앎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변증법적인 발전을 해나간다. 그래서 앎은 앎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모름으로, 그 모름은 다시 앎으로 변모해 나간다. 특히 인간은..

기적이 아닌 사랑 엔도 슈사쿠 저, '사해 부근에서'를 읽고 묵직한 한 방을 제대로 맞았다. 날카로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먹먹한 가슴이 되었다. 꽤 오래갈 것 같은 예감이다. 아, 이렇게 또 엔도 슈사쿠를 만났다. 명쾌한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책.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대신 자명하게 여겼던 것들까지도 반추하게 만드는 책. 내가 알던 지식과 내가 믿던 믿음이 건강한지, 치우치진 않았는지 다시 묻게 만드는 책. 책은 도끼이기도 하지만 안개 자욱한 숲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나는 찍히고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불안과 의심의 깊은 숲을 홀로 통과하게 된다. 확신의 죄에서 해방받는 유일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책을 읽는, 아니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여섯 번째..

자유와 돈, 그리고 인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죽음의 집의 기록‘을 다시 읽고 4년 만에 재방문한 ‘죽음의 집의 기록’은 여전히 서사가 부재했다. 게다가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기구한 삶을 모르는 독자가 아니었다. 내게 호기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죽음의 집에서 보낸 4년이라는 시간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병렬식으로 감옥 생활을 소개하는 이 책을 끝까지 집중해서 다시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열 시간 정도 이 책과 씨름하면서 드디어 어젯밤 마지막 페이지를 탈환했다. 진정 도스토옙스키 마니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호기심이 사라진 내 눈에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호기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인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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