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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유령들'을 읽고난해하다거나 심오하다고 말하기에는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대중성을 폄훼하는 듯한 뉘앙스라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르이고, 그게 소설의 최대 장점인 줄 안다. 그러나 그 상상력이 한낱 꿈의 조각처럼 파편적이거나, 두서없는 망상으로 표현된다면, 적어도 나는 읽어야 할 것들이 언제나 밀려 있는 평소의 상황에서 그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기발함이나 재치 위주의 말초적인 자극이나 충격을 주려는 목적으로 써진 현대 소설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써내려가면서, 아무나 알 수 있지만 누구나 깨닫지 못하는 일상 속에 빛바랜 진리를 재발견하고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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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를 읽고퀸은 작가였다.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지금은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쓰며 산다. 추리소설의 주인공 탐정 이름은 맥스 워크이다. 퀸은 윌슨이 되어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를 고립시켰지만, 한편으로 그는 워크가 되어 여전히 세상에 발을 걸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워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조사하고 미행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퀸에게는 허구일 뿐이다. 이쯤에서 나는 궁금해진다. 퀸이 사는 세상은 실재하는 것일까? 허구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퀸에게 실재와 허구는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닐까? 구분이 되기는 할까?어느 날 전화가 걸려온다. 잘못 걸려온 전화다. 퀸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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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읽기 위한 정직한 자세토마스 머튼 저, '성서를 열다'를 읽고제목이 '성서를 읽다'가 아닌 '성서를 열다'라는 점에 주목한다. 읽기 위해서는 먼저 열어야 하는 법. 그렇다. 이 책은 성서를 본격적으로 읽는 단계가 아닌 그 전단계에 초점을 맞춘다. 성서는 어떤 책인지, 성서를 읽는 나는 누구인지, 성서를 읽을 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성서를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저자의 탁월한 통찰과 뛰어난 필력은 덤이다. 저자는 우리가 종종 성서를 일방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성서를 현실과 상관없이 영적인 세계의 이야기로만 여긴다든지, 거룩하고 독실한 신자들의 전유물로 여긴다든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성, 심지어는 상식에 반하는 책으로 여기는 경우도 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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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싶은 설교프레드릭 비크너 저, '진리를 말하다'를 읽고설교자들이 주요 독자층인 듯한 이 책은 설교를 주로 듣기만 하는 나에게 다시 설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해 주었다. 저자가 말하는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에 잠시 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설교를 들어본 횟수가 손꼽을 정도인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 시대 이 한국 교회에 목사는 참으로 많은데 참 설교자가 요원하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말이다.진부할 정도로 너무 당연해서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명제 중 하나는 '설교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일 것이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비슷한 여정을 겪는다. 특히 늙어가는 중엔 비틀거리면서도 어쨌거나 가야 할 길을 인도받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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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지하 세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다시 읽고 차라리 골랴드낀이 나았다,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이 작품 속 일인칭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지하’라는 또 하나의 세상에서 잉태된 최종 병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스로를 소외 혹은 고립시키면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여실히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조금 과장해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를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고안한 가상의 생체 실험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닫으며 다시 조용히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다! 아무렴, 이 맛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지! (그런데 왜 이 말을 하고도 나는 겸연쩍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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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재료를 아는 사람이 아닌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길 이종태 저, '경이라는 세계'를 읽고 철학, 신학, 문학, 과학 등의 모든 학문, 그리고 모든 지식과 깨달음의 문을 열고 정직하게 걸어가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고, 또 마주해야만 하는 것. 앎이라는 과정의 동반자이자 길잡이, 나아가 그 과정 자체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고, 그것으로 한 걸음 다가간 대상과의 거리를 줄이기는커녕 더 확대시켜 결코 다가설 수 없다는 인정을 마음 중심으로부터 기쁘게 받아 내고야 마는 것. '경이'일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앎이라는 과정을 겪게 된다. 모름과 앎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변증법적인 발전을 해나간다. 그래서 앎은 앎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모름으로, 그 모름은 다시 앎으로 변모해 나간다. 특히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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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아닌 사랑 엔도 슈사쿠 저, '사해 부근에서'를 읽고 묵직한 한 방을 제대로 맞았다. 날카로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먹먹한 가슴이 되었다. 꽤 오래갈 것 같은 예감이다. 아, 이렇게 또 엔도 슈사쿠를 만났다. 명쾌한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책.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대신 자명하게 여겼던 것들까지도 반추하게 만드는 책. 내가 알던 지식과 내가 믿던 믿음이 건강한지, 치우치진 않았는지 다시 묻게 만드는 책. 책은 도끼이기도 하지만 안개 자욱한 숲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나는 찍히고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불안과 의심의 깊은 숲을 홀로 통과하게 된다. 확신의 죄에서 해방받는 유일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책을 읽는, 아니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여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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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돈, 그리고 인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죽음의 집의 기록‘을 다시 읽고 4년 만에 재방문한 ‘죽음의 집의 기록’은 여전히 서사가 부재했다. 게다가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기구한 삶을 모르는 독자가 아니었다. 내게 호기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죽음의 집에서 보낸 4년이라는 시간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병렬식으로 감옥 생활을 소개하는 이 책을 끝까지 집중해서 다시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열 시간 정도 이 책과 씨름하면서 드디어 어젯밤 마지막 페이지를 탈환했다. 진정 도스토옙스키 마니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호기심이 사라진 내 눈에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호기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인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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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이정일 저,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을 읽고 두 전작 ‘문학은 어떻게 더 신앙을 깊게 만드는가‘,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와 함께 이 책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동일하다. 제목에서 문학이 소설로 바뀌었을 뿐 저자의 메시지는 반복된다. 문학이 기독교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스도인이자 아마추어 문학도, 그리고 본업인 과학 만큼 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이런 반복된 메시지가 여전히, 항상 반갑다. 저자와 같은 이유로 나 역시 진지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성경 읽기와 더불어 문학 (그중에서도 고전문학) 읽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작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 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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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에 맞지 않은 새로운 음식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일독 및 재독 하는 방법도 권장할 만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작가의 작품을 용기 내어 한두 권 읽어보는 것도 절대 게을리하지 말라고 나는 문학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전자는 깊이를, 후자는 풍성함을 배가시키는 훌륭한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깊이와 풍성함, 이 두 가지는 문학의 본질과 맞닿아 있으며, 문학이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문학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까지도 포괄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라는 칠레 작가를 처음 만났다.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이 작품을 들었고, 작품 제목에 나온 '네루다'라는 이름이 내 입에 착 감기기도 했으며, 내가 알고 있는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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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교양을 갖춘 정직한 신앙 정한욱 저, '믿음을 묻는 딸에게'를 읽고 제목 (믿음을 묻는 딸에게)과 함께 부제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과 나누고 싶은 질문 25가지)만 읽어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딸이 질문하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을 빌려 저자가 기독교에 관련된 25가지 주제들을 선별하고 일반교양 수준에 맞춰 풀어쓴 글의 모음이다. '시작하며'에 이어 차례를 보면 저자가 다루는 주제들이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신학 혹은 신앙을 전제로 하지만 (저자는 기독교인이다), 그것을 넘어 인문학, 철학적인 내용까지 두루 섭렵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열려있다. 부제에 등장한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이라는 표현을 완전히 이해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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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닌 함께, 내가 아닌 우리 루리 글, 그림, '긴긴밤'을 읽고 밤의 길이는 영혼의 상태를 반영한다. 짧은 밤은 단잠과 함께 치유와 회복을 의미하는 반면, 긴 밤은 불면에 시달리거나 선잠을 자면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긴긴밤을 통과했다는 것은 생사를 오가는 삶의 극한 순간을 간신히 넘어섰다는 표현이리라. 작품 속 주인공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는 이러한 긴긴밤을 숱하게 통과한다. 이 작품의 방점은 단순히 고난과 역경을 극복했다는 데에 있지 않다. 그 긴긴밤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는 데에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말이다. 같은 코뿔소끼리도, 같은 펭귄끼리도 아닌, 코뿔소 한 마리와 버려진 알을 든 펭귄 한 마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 이 작품이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닌 이유다. 코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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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과 저녁 사이에 충만하기 욘 포세 저, '아침 그리고 저녁'을 읽고 낯선 작가의 책을 손에 들고 낯선 세상에 처음 발을 내민다. 용기 내어 조심스럽게 첫 발만 디디면 어느새 나는 숙련된 여행자가 되어 이국의 냄새를 맡고 이국의 소리를 듣고 이국의 사람과 사물과 자연을 보면서 모든 시공간을 향유하기 시작한다. 독서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이다. 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책 한 권으로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로 대체된다. 옹졸하고 편협했던 나는 조금은 더 너그러운 마음과 조금은 더 깊은 눈을 가진 사람으로 확장된다. 문학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낮은 자세로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귀 기울이고 멈추고 가만히 살피게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간다. 하지만 문학은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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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의 문체 최은영 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서양고전문학을 선호하는 나는 한국소설도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려면 베스트셀러 위주로 이미 입소문 난 책들을 먼저 살피게 된다. 최은영 작가는 수년 전부터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이미 주목받는 차세대 한국 현대소설가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책 소개를 보고는 읽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모두 단편집이었기 때문이다. 단편이 주는 의도적인 불친절함과 불가피한 아련함 (혹은 무책임함)보다는 복잡하고 장황하더라도 깊고 풍성함으로 긴 시간 푹 빠져들 수 있는 장편을 나는 사랑한다. 참고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고전문학은 한결같이 장편이다. 나는 책으로부터 여러 방 잽을 맞는 것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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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와 아직 사이의 요원한 대화 신국현 저, '유신진화론과의 대화'를 읽고 1. 후기에 앞서 먼저 이 리뷰는 세움북스 대표님의 리뷰 요청을 수락한 이후 기증된 책을 읽고 쓴 글임을 밝혀둡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제가 구매하지 않고 기증받은 책을 리뷰할 때에는 냉철한 비판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좀 더 고려해서 반영하곤 합니다. 감사하게도 이번엔 대표님께서 비판적인 시각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기에 저는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조금은 더 객관적이고 조금은 더 냉철하게 이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뷰는 어디까지나 저의 주관적인 입장이 반영된 글이라는 점을 숙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시대의 자식이고, 제 글은 제 안에 자리 잡은 세계관, 사상, 신앙 등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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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의 시작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상처받은 사람들‘을 다시 읽고 물리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분량이 만만치 않다. 단편, 중편, 장편을 나누는 기준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지난 작품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이 짧은 장편이라고 할 때, 이 작품 '상처받은 사람들'은 긴 장편에 속한다. 분량이 두 배 가량이고, 도스토옙스키 초중기 작품 중 가장 길다 (열린책들 버전으로 600 페이지가 넘는다). 일견 벽돌을 떠올리게 하는 후기작인 5대 장편을 읽어내기 위한 중간단계, 혹은 연습용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은 후기로 접어들수록 분량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도스토옙스키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제목 정도는 들어봤음직한 작품들이 모두 후기작에 속한다는 점을 고려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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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힘 그리고 읽고 쓰는 삶 C. S. 루이스 저, '책 읽는 삶'을 읽고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의 이 책은 루이스의 여러 저작으로부터 독서에 관련된 문장들을 선별하여 엮은 것이다. 루이스의 작품을 두루 섭렵한 독자라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제목이나 프롤로그 격의 '엮은이의 글'을 읽으면 곧장 이 책이 읽고 싶어질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루이스를 꽤 읽은 나로선 사실 정독할 만한 책은 아니었다. 조금은 낚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낚여보는 것도 괜찮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꽤 유쾌한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길에서 며칠간 십여 분 정도씩 읽어나가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책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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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대단한 선택 클레어 키건 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클레어 키건의 문장들은 일견 건조하게 느껴진다. 따로 떼어내서 보면 실제로 그래 보인다. 그러나 그 문장들이 한데 모여 단락을 이루고, 그 단락들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되면 놀랍게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한다. 태연하고 무심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니 누구보다 섬세하고 애정 어린 사람의 손길임을 문득 깨달았을 때와 같은 느낌일까. 그러므로 건조하게 느껴진 건 선입견으로 가득한 내 첫인상의 극히 일면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애정 없음일 뿐 저자의 애정 없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려한 수사 없이도 이야기를 충분히 이끌고 갈 수 있는 저자의 저력이라 이해하는 편이 옳다는 생각이다. 또한 중첩되는 문장도 불필요한 문장도 찾아볼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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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진 칼의 예리함 클레어 키건 저, '맡겨진 소녀'를 읽고 여백이 많은 글은 독자가 개입할 여지를 남겨 두는 저자의 배려이자 독자가 그 여백으로부터 숨은 의도를 찾아낼 것이라 믿는 저자의 믿음이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글은 속도감을 내기에 적당하지만 그것보다는 간결함과 명료함으로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길뿐더러 글의 여백을 강화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단문으로 가득하면서 여백이 많은 글을 만났다.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 이후 처음 느끼는 이 압도되는 기분. 나의 내면은 고요해지고 청명하게 깨어난다. 마치 이제껏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 나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을 검색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단 두 작품만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아쉽지만 기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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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 자만심의 실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을 다시 읽고 재독이 주는 유익은 깊이와 풍성함에서 찾을 수 있다. 초독과 재독 사이에 바뀌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일 뿐 책은 그대로다. 그러나 재독 할 때마다 나는 책의 동일함보다는 상이함을 더 크게 느낀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풍성함), 이미 보았던 것들은 재해석되어 (깊이)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다시 읽는 데에서 경험하는 익숙함과 반가움, 그리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는 낯섦과의 뜻밖의 조우.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놀이가 바로 재독, 곧 깊이와 풍성함의 향연이다. 현재 나에게 그 대상은 도스토옙스키이고, 나는 가능한 멀리 보면서 한 걸음씩 천천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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