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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 폭풍의 근원지 에밀리 브론테 저, '폭풍의 언덕'을 읽고 일주일 남짓 나는 거의 매일 한 시간 가까이 책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초 영국 요크셔에 위치한 '워더링 하이츠'와 그로부터 4마일 정도 떨어진 '드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다녀왔다. '워더링 (Wuthering)'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방언이고, '하이츠 (Heights)'는 '높은 곳'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그 뜻과는 별 상관없이 어떤 장소를 지칭할 때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다 (참고로 내가 거주한 첫 미국은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쉐이커 하이츠 (Shaker Heights)였고, 캘리포니아에 살 때 옆 동네는 아시엔다 하이츠 (Hacienda Heights), 라 하브라 하이츠 (La Habra He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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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들을 기꺼이 껴안는 삶 조르주 페렉 저, ‘보통 이하의 것들’을 읽고 처음 읽는 조르주 페렉. 그에게 ‘일상의 글쓰기’라는 타이틀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그 자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 소개된, 다분히 실험적이고 집요하여 당황스럽기조차 한 그의 글들은 넌지시, 그러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익숙한 것들, 대부분의 일상을 이루지만 익숙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어느새 일상에서 탈락되고 배제되어 버린 그 소중한 것들을 다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의 후반전이 빛날 수 있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일까.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서며 내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 장소들, 공간들이 다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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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말고 더 사랑하기 김진영 저, '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김진영 선생님은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들을 쓰셨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한 장을 더 넘기면 차례가 나온다.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의 시간이 덩그러니 적혀있다. 1952년생인 저자 김진영은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2018년 8월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난다.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간은 이미 암덩어리가 장악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공식적인 진단을 받았던 그날 그는 암 환자가 되었다. 그 후, 1년 하고도 1개월. 비록 건조한 문자로 적혀 있지만, 이 책의 차례는 저자가 암 환자가 되고 암에게 육체를 내어주기 직전까지 그의 숨과 그의 정신을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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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의 또 하나의 좋은 안내서 이상환 저, 'Re: 성경을 읽다'를 읽고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안내서로 나는 그동안 여러 번 더글라스 스튜어트와 고든 D. 피가 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김근주 교수가 쓴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를 추천하곤 했다. 이제 한 권 더 늘었다. 바로 이 책, 이상환 목사가 쓴 'Re: 성경을 읽다'이다. 이 세 권을 읽고 본격적인 성경 읽기에 들어간다면 주문 외우듯 수십 번 성경만 통독한 어르신들이 닿지 못한 깊이까지 이해하고 건전하고 건강하게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족과 함께 최근 4년간 성경을 세 번 통독하고 나니 올해부터는 약간의 갈증이 생겼었다. 내년부터는 조금 더 깊고 넓게 성경을 읽고 싶어서 최근에 나는 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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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인식의 다리 파스칼 메르시어 저, '언어의 무게'를 읽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김춘수의 '꽃'에서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그는 그저 하나의 몸짓일 뿐 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일까? 타자에 의해 이름이 불리는 존재만이 비로소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된다는 말일까? 나는 이 시에서 '이름'을 '언어'로 바꿔본다. 그러면 언어는 자연스레 무게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잇는 다리의 무게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겠지만, 작품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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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를 읽고 1876년 '작가 일기'에 실린 이 짧은 소설은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을 담고 있다. '뭐라고?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이라고?!', 하며 놀랄지도 모르겠다. 늘 광인의 변주곡 연주하길 즐기며, 지극히 통속적인 상황에서 지극히 심오한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내는 그에게서 외과의사의 메스 같은 날카로움이나 냉철함이 아닌 햇살 같은 따스함이라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건 도스토옙스키를 절반도 모르기 때문에 넘겨 짚은 성급하고 경솔한 추측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도스토옙스키가 외과의사의 메스이기만 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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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파괴하는 구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온순한 여자‘를 읽고 도스토옙스키의 기발함이랄까 기괴함이랄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걸까. 이번엔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 아내를 테이블에 올려둔 채 상념에 잠긴 한 남자의 이야기다. 섬뜩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언제나 그렇듯, 1876년 '작가 일기'에 발표되었던 이 작품도 결코 호러물로 전개되지 않는다. 상황보다 사람, 그리고 사람의 외면보다 내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다행스러운 건, 적어도 이 작품 속 주인공은 '분신‘이나 ’약한 마음‘의 주인공처럼 정신병원으로 끌려가진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증의 정도는 약한 편이라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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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낙원, 그리고 그것의 한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우스운 사람의 꿈’를 읽고 1877년 '작가 일기'에 수록된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우스운 사람이다. 사람들은 요즈음 나를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에 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 작품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최근에 다시 읽은 '분신'의 골랴드낀이나, 독서모임에서 같이 읽은 '약한 마음'의 바샤, 그리고 '뽈준꼬프'의 뽈준꼬프까지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다시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소외되고 단절되고 자기 안에 갇혔다는 점에서 이 모든 인물들은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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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주제도 빈약한 두서없는 이야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 살의 노파’를 읽고 이 단편 역시 1876년 '작가 일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실망스러울 정도로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모호할뿐더러, 단편소설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임팩트도 없고, 도스토옙스키스러운 면도 보이지 않으며, 작품 속 화자 (도스토옙스키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스스로도 마지막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시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벼운 데다가 주제도 빈약한 이야기이다. 사실, 한 달 동안 들은 사건들 가운데서 무언가 놀랄 만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계획해 보지만, 막상 일에 착수하면 쓰기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적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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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사라져도 소리 내는 인간의 추한 욕망의 잔재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보보끄’를 읽고 이 단편소설은 1873년 '시민'지에 발표된 작품이자, '농부 마레이'와 같이 '작가 일기'에 수록된 작품이다. 죽은 사람들의 대화를 다루는, 가히 도스토옙스키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보끄'는 러시아어로 '콩알'이라는 뜻이다. 의성어로 쓰일 땐 '콩콩거리다' 혹은 '버벅거리다'를 연상하면 된다고 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스스로는 부인하지만, 그래서 더욱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인 것 같은, 그러나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존심이 강한 것처럼 보이는 화자가 초반부터 자기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이상한 일들 중 하나가 바로 '보보끄'라는, 마치 누군가가 옆에서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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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힘, 시선에 변화를 가져오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농부 마레이’을 읽고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후기작인 5대 장편 중 네 번째 작품 '미성년'을 완성한 후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 남기고 있던 1876년 2월 그가 독자적으로 발간했던 '작가 일기'라는 월간지에 실린 회고록 같은 단편소설이다. 같은 단편이지만, 얼마 전 읽었던 백야 외 여섯 작품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 그러니까 시베리아 유형 전에 쓰인 작품에 해당된다는 점은 이 작품과의 큰 차이점이다.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죽음의 코 앞에서 구원받은 자의 글은 아무래도 그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의 기억은 29세 시절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억은 다시 9세 때의 과거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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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강남숙-박은정-상지영-이지성 고쳐 엮은 '하나님 자녀들의 선교'를 읽고 미천하지만, 여태껏 공부한 신학적 지식들은 두 신학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김근주 교수. 두 신학자의 글엔 공통점이 꽤 많다. 구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흡사하다. 매일 같이 신학책과 성경을 읽으며 내적 갈증을 해소하려고 애쓰던 그때 나에게 이 두 신학자의 책들은 생수와도 같았다. 그중 딱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고른다. 지금은 절판된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책을 읽은 직후에 읽고 또 읽었던 책이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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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해학이 녹아있는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을 읽고 ‘참 나, 어이가 없군. 이게 뭐래?’ 이 작품을 읽은 후 나의 첫 반응이다. 아니, 사실 읽는 중에도 그랬다. 이렇게 감상문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안이 벙벙하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장르 (내가 정의한 새로운 장르)에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허를 찔린 기분이다. 아무래도 단편소설이라 그런지 이렇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더 강렬한 것 같다. 입을 쩍 벌리면서 읽다가 (뭥미?) 미처 다물지 못한 채 작품이 끝나버렸다. 뒤늦게 입을 다물고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어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제목만 보면 이 작품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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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의 진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약한 마음’을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나갈 때 꼭 필요한 단어 하나를 뒤늦게 수확한 기분이다. ‘악한 evil’ 마음이 아닌 ‘약한 weak’ 마음. 지금까지 읽어온 많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기이하리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바로 이 단어, ‘약한’ 마음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약함과 악함 사이의 상관관계. 때론 나의 ‘약함’이 타자에겐 ‘악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타자의 눈에 비친 ‘악함’을 인지하게 된 나의 ‘약함’은 비로소 ’악함’으로 변모할 기회를 맞이하고 종종 발현하기도 한다는 것. 약함과 악함 사이의 상관관계는 약함의 변질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 이 작품 속 약한 마음은 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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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이전의 도스토옙스키 맛보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꼬마 영웅’을 읽고 단편소설이라 그런 걸까? 다시 푸시킨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는 장편으로 읽어야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최대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로 풀어내기에는 아무래도 분량은 감수해야 하는가 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갈망한다. 벽돌이라도 좋다. 아직 목이 마르다. 이 작품은 꽤나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도스토옙스키답지 못한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도스토옙스키가 도스토옙스키로 되어가는 과정의 단면이라는 해석이 더 적절할 듯싶다. 평면적인 사랑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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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의 옷을 입은 도스토옙스키의 구전동화 같은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을 읽고 감상문 (특히 문학 작품에 대한)을 남길 때 나는 작품의 제목을 할 수 있는 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저자 (혹은 출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실패다. ‘결혼식’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작품을 다 읽어도 왜 크리스마스나 송년회가 아닌 ‘크리스마스 트리’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별 뜻 없이 도스토옙스키는 연말이라는 시기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했겠거니 하며 넘어가려 한다 (재독 하면 혹시 알게 될까? 내가 이 작품을 다시 읽긴 할까?). 내러티브에서는 도스토옙스키보다 푸시킨이 더 많이 느껴진다. 여태껏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 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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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서 찾아낸 정직함과 인간다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정직한 도둑’을 읽고 ‘정직한 도둑’이라니. 형용 모순인가 싶다. 도둑은 정직보다 거짓에 더 가깝다고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작품을 보기 좋게 관통하고 함축한다. 나는 이 작품 속 정직한 도둑을 인간이라 읽는다. 이 작품을 좀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다른 두 단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가난’과 ‘연민’이다. ‘가난’은 ‘정직‘과 ’도둑’을 ‘연민’이라는 통로를 이용하여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이끈다. 작품은 조촐한 독신자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난한 일인칭 화자의 일상에 아스따피 이바노비치라는 더 가난한 세입자가 침대 하나 놓을 공간 없는 작은 방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어느 날 누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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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인간의 속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뽈준꼬프’를 읽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의 캐릭터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히 낯선 인물로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 친근하고 익숙한 내 분신으로 자리매김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깊숙한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게 되고, 가끔은 소름도 끼친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그 모습이 나일 리가 없다고 극구 부인하는 시기도 종종 도래하는데, 이런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다 보면 정신분열이란 게 어떤 것인지 왠지 알아버린 것 같은 상태까지 나아가게 된다. 타자화된 인물의 동기화, 결코 합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이어지는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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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랴드낀: 인간의 다른 이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분신’을 다시 읽고 서사의 부재는 종종 묘사의 풍요로 발현된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읽어내기란 버거운 일일 때가 많다. 특히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매력, 즉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기대한 독자에겐 커다란 실망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여전히 제자리인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책이라는 늪에 빠져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이랄까. 이 작품의 경우 차라리 풍성한 묘사가 외부환경, 이를테면 아름다운 자연이나 여행지의 풍경, 혹은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풀어냈다면 완독 하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참히 그런 기대를 저버린다. 시종일관 ‘골랴드낀’이라는 한 사람의 내면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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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흔적이 드러나는 삶 제행신 저, ‘지하실에서 온 편지’를 읽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교회 문화 속에서 간증을 접할 때면 늘 조심하게 됩니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다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생 역전했다는 이야기는 등장인물과 배경상황만 다를 뿐 동일한 맥락으로 반복, 도배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그 간증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마음이 불편해지곤 합니다. 물론 이런 해석이 저의 열등감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기승전 잘됨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축복의 전부인 것 같은 뉘앙스는 기복신앙의 메시지와 다를 게 없어 보이고, 간증이 그것을 더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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