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볍고 주제도 빈약한 두서없는 이야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 살의 노파’를 읽고 이 단편 역시 1876년 '작가 일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실망스러울 정도로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모호할뿐더러, 단편소설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임팩트도 없고, 도스토옙스키스러운 면도 보이지 않으며, 작품 속 화자 (도스토옙스키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스스로도 마지막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시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벼운 데다가 주제도 빈약한 이야기이다. 사실, 한 달 동안 들은 사건들 가운데서 무언가 놀랄 만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계획해 보지만, 막상 일에 착수하면 쓰기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적절하지..

의식이 사라져도 소리 내는 인간의 추한 욕망의 잔재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보보끄’를 읽고 이 단편소설은 1873년 '시민'지에 발표된 작품이자, '농부 마레이'와 같이 '작가 일기'에 수록된 작품이다. 죽은 사람들의 대화를 다루는, 가히 도스토옙스키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보끄'는 러시아어로 '콩알'이라는 뜻이다. 의성어로 쓰일 땐 '콩콩거리다' 혹은 '버벅거리다'를 연상하면 된다고 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스스로는 부인하지만, 그래서 더욱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인 것 같은, 그러나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존심이 강한 것처럼 보이는 화자가 초반부터 자기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이상한 일들 중 하나가 바로 '보보끄'라는, 마치 누군가가 옆에서 속..

기억의 힘, 시선에 변화를 가져오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농부 마레이’을 읽고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후기작인 5대 장편 중 네 번째 작품 '미성년'을 완성한 후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 남기고 있던 1876년 2월 그가 독자적으로 발간했던 '작가 일기'라는 월간지에 실린 회고록 같은 단편소설이다. 같은 단편이지만, 얼마 전 읽었던 백야 외 여섯 작품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 그러니까 시베리아 유형 전에 쓰인 작품에 해당된다는 점은 이 작품과의 큰 차이점이다.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죽음의 코 앞에서 구원받은 자의 글은 아무래도 그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의 기억은 29세 시절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억은 다시 9세 때의 과거로 우리..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강남숙-박은정-상지영-이지성 고쳐 엮은 '하나님 자녀들의 선교'를 읽고 미천하지만, 여태껏 공부한 신학적 지식들은 두 신학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김근주 교수. 두 신학자의 글엔 공통점이 꽤 많다. 구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흡사하다. 매일 같이 신학책과 성경을 읽으며 내적 갈증을 해소하려고 애쓰던 그때 나에게 이 두 신학자의 책들은 생수와도 같았다. 그중 딱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고른다. 지금은 절판된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책을 읽은 직후에 읽고 또 읽었던 책이다. 그렇..

도스토옙스키의 해학이 녹아있는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을 읽고 ‘참 나, 어이가 없군. 이게 뭐래?’ 이 작품을 읽은 후 나의 첫 반응이다. 아니, 사실 읽는 중에도 그랬다. 이렇게 감상문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안이 벙벙하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장르 (내가 정의한 새로운 장르)에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허를 찔린 기분이다. 아무래도 단편소설이라 그런지 이렇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더 강렬한 것 같다. 입을 쩍 벌리면서 읽다가 (뭥미?) 미처 다물지 못한 채 작품이 끝나버렸다. 뒤늦게 입을 다물고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어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제목만 보면 이 작품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

약함의 진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약한 마음’을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나갈 때 꼭 필요한 단어 하나를 뒤늦게 수확한 기분이다. ‘악한 evil’ 마음이 아닌 ‘약한 weak’ 마음. 지금까지 읽어온 많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기이하리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바로 이 단어, ‘약한’ 마음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약함과 악함 사이의 상관관계. 때론 나의 ‘약함’이 타자에겐 ‘악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타자의 눈에 비친 ‘악함’을 인지하게 된 나의 ‘약함’은 비로소 ’악함’으로 변모할 기회를 맞이하고 종종 발현하기도 한다는 것. 약함과 악함 사이의 상관관계는 약함의 변질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 이 작품 속 약한 마음은 관청..

도스토옙스키 이전의 도스토옙스키 맛보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꼬마 영웅’을 읽고 단편소설이라 그런 걸까? 다시 푸시킨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는 장편으로 읽어야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최대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로 풀어내기에는 아무래도 분량은 감수해야 하는가 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갈망한다. 벽돌이라도 좋다. 아직 목이 마르다. 이 작품은 꽤나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도스토옙스키답지 못한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도스토옙스키가 도스토옙스키로 되어가는 과정의 단면이라는 해석이 더 적절할 듯싶다. 평면적인 사랑 이..

푸시킨의 옷을 입은 도스토옙스키의 구전동화 같은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을 읽고 감상문 (특히 문학 작품에 대한)을 남길 때 나는 작품의 제목을 할 수 있는 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저자 (혹은 출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실패다. ‘결혼식’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작품을 다 읽어도 왜 크리스마스나 송년회가 아닌 ‘크리스마스 트리’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별 뜻 없이 도스토옙스키는 연말이라는 시기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했겠거니 하며 넘어가려 한다 (재독 하면 혹시 알게 될까? 내가 이 작품을 다시 읽긴 할까?). 내러티브에서는 도스토옙스키보다 푸시킨이 더 많이 느껴진다. 여태껏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 비해..

인간의 본성에서 찾아낸 정직함과 인간다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정직한 도둑’을 읽고 ‘정직한 도둑’이라니. 형용 모순인가 싶다. 도둑은 정직보다 거짓에 더 가깝다고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작품을 보기 좋게 관통하고 함축한다. 나는 이 작품 속 정직한 도둑을 인간이라 읽는다. 이 작품을 좀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다른 두 단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가난’과 ‘연민’이다. ‘가난’은 ‘정직‘과 ’도둑’을 ‘연민’이라는 통로를 이용하여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이끈다. 작품은 조촐한 독신자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난한 일인칭 화자의 일상에 아스따피 이바노비치라는 더 가난한 세입자가 침대 하나 놓을 공간 없는 작은 방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어느 날 누군가 ..

스스로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인간의 속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뽈준꼬프’를 읽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의 캐릭터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히 낯선 인물로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 친근하고 익숙한 내 분신으로 자리매김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깊숙한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게 되고, 가끔은 소름도 끼친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그 모습이 나일 리가 없다고 극구 부인하는 시기도 종종 도래하는데, 이런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다 보면 정신분열이란 게 어떤 것인지 왠지 알아버린 것 같은 상태까지 나아가게 된다. 타자화된 인물의 동기화, 결코 합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이어지는 분열..

골랴드낀: 인간의 다른 이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분신’을 다시 읽고 서사의 부재는 종종 묘사의 풍요로 발현된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읽어내기란 버거운 일일 때가 많다. 특히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매력, 즉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기대한 독자에겐 커다란 실망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여전히 제자리인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책이라는 늪에 빠져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이랄까. 이 작품의 경우 차라리 풍성한 묘사가 외부환경, 이를테면 아름다운 자연이나 여행지의 풍경, 혹은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풀어냈다면 완독 하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참히 그런 기대를 저버린다. 시종일관 ‘골랴드낀’이라는 한 사람의 내면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

하나님의 흔적이 드러나는 삶 제행신 저, ‘지하실에서 온 편지’를 읽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교회 문화 속에서 간증을 접할 때면 늘 조심하게 됩니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다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생 역전했다는 이야기는 등장인물과 배경상황만 다를 뿐 동일한 맥락으로 반복, 도배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그 간증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마음이 불편해지곤 합니다. 물론 이런 해석이 저의 열등감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기승전 잘됨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축복의 전부인 것 같은 뉘앙스는 기복신앙의 메시지와 다를 게 없어 보이고, 간증이 그것을 더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읽고 쓰는,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가난한 사람들’을 다시 읽고 독서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의 태동과 함께 드디어 시작된 나만의 소소한 프로젝트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는 예전에 한 번 읽고 감상문을 남겼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출간 순으로 다시 읽고 다시 감상문을 남기는 과업이다. 이른바 ‘재독 프로젝트’. 앞으로 약 2년 간 지속될 예정이다. 그 첫 작품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선정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를 문단에 데뷔시킨 첫 소설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작품처럼 화려한 데뷔를 바라진 않는다. 그저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까지 묵묵히 전진하고 싶은 마음이다. 3년 전 초독..

누가 예수인가 서진교 저, ‘예수행복학 개론’을 읽고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앞부분에 소개되는 몇몇 대표적인 내러티브를 예수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며 소설의 형식을 빌려와 약간의 주해와 해석을 가한 서진교 목사의 이 작품은 마태복음 25장 40절로 수렴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는 저자의 첫 저서 ‘작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간증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저자의 일상적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며, 혹은 읽기 전이나 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글의 제목으로 쓴 ‘누가 예수인가?’이다. 이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구..

인생과 인간, 코미디 같은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80페이지 채 되지 않는 이 얇은 책은 세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에세이로 구성된다. 그중 가장 짧은 작품이 표제로 쓰인 ‘깊이에의 강요’이다. 수년 전에 이 책을 구입했을 때에도 나는 이 작품밖에 읽지 않았다. 다 읽는 데 십 분 채 걸리지 않는 이 소설은 의외로 여운이 강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주관적이고 무분별한 평가가 한 예술가를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깊이가 없다는 한 문장 때문에 저명한 예술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쫓노라면 씁쓸함이라는 자갈을 씹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씁쓸함의 정점은 자살 후 남겨진 예술작품을 같은 비평가가 깊이에의 강요가 느껴진다고 평가하는..

내적 자유를 찾는 여정, 지금도 계속되는 싸움 타라 웨스트오버 저, ‘배움의 발견’을 읽고 소설로 보이는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국어판 표지에선 알아채기 힘들다. 한국에서 붙인 제목 ’배움의 발견‘을 봐도, 부제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를 읽어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원서 표지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원제 ‘Educated' 오른쪽 아래에 'A MEMOIR'라고 쓰여있다. 그것도 대문자로, 별다른 설명 없이, 덩그러니.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회고록’이라는 뜻의 ‘Memoir'라는 단어가 이 작품에 대한 독법의 시작점이라고. 소설과 회고록의 차이는 허구와 실제의 차이다. 소설 속 화자의 이야기는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회고록 화자의 이..

처음 읽는 푸시킨 알렉산드르 푸시킨 저 ’눈보라‘를 읽고 미천한 상식으로, 학창 시절부터 내게 각인된 푸시킨이라는 이름은 그저 외국 시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비롯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그들의 입을 통해 자주 들려진 푸시킨은 그 이상이었다.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선 작가라는 위상을 넘어 러시아 문학을 있게 한 근원 같은 느낌이랄까. 러시아 국민은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숱한 러시아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푸시킨.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는 푸시킨으로부터 뻗어 나온 지류의 깊고 풍성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푸시킨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언제 한번 읽어봐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녹색광선 책으로 드디어 푸시킨을 읽게..

잔혹함과 나약함 사이에서 엔도 슈사쿠 저, ‘바다와 독약’을 읽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던 1945년 5월, 일본을 공습하던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의 초대형 폭격기 B-29 한 대가 오이타현과 구마모토현 경계 근처에 추락하여 탑승원 12명이 모두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중 8명은 서부 사령부로부터 재판도 없이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데, 때마침 생체실험용으로 제공해 달라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의 제안이 승인되는 바람에 이들은 모두 끔찍한 실험동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만행은 실화다.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해 5월 17일부터 6월 2일에 걸쳐 실제로 벌어진 이 처참한 인권유린 사건을 역사는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이라고 기록한다.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은 이 작품 ‘바다와 독약’의..

결핍을 머금은 평범하고 충만한 삶 장일 저, ‘결핍의 위로’를 읽고 장일은 목사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다. 그리고 희귀 질환인 크론병 환자다. 그렇다면 이 책은 목사의 이야기일까, 남편이자 아빠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크론병 환자의 이야기일까. 버스를 오가면서 읽다가 마지막 책장을 덮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답을 내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이 책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구나. 직업이 목사일 뿐 이 책은 목회 관련 에피소드도 설교집도 아니다. 저자는 남편이자 아빠이지만 이 책은 부부관계나 육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리고 저자는 크론병 환자이지만 어떤 아픔을 가진 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두 가지 유형에 빠지지 않는다. 즉, 그 아픔에 구속되지도 않고 그것을 훈장처럼 여기지도 않는다..

침묵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읽고 이 책의 부제는 ‘성경 속 7인을 통해 듣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성경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상상력을 통해 눈물과 탄식 가운데 있었던 7명의 성경 인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내러티브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셨던 말씀을, 성경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가운데 쓰인 예레미야애가를 우리에게 주셨던 이유의 연장선에서, 들어보자고 요청한다. 코로나로 흉흉했던 시대를 함께 지내온 크리스토퍼 라이트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으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이 글은 저자가 선택한 7명의 인물과 그에 따른 소주제에 따른 나의 짧은 감상들로 대신한다. 1. 아브라함, 시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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