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동물입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아닌 동물과 비교할 때 인간은 정말 우월한 걸까요?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느끼는 우월성은 인식론적 폭력이라고 해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대답이 아닐까 합니다. 과신대애서 동물을 주제로 다루는 9월호 과신뷰에 부탁을 받고 쓴 글이 공개되었습니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인간이 아닌 동물 사이를 여러분은 어떤 관점으로 보고 계신가요?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 치우쳐 있지는 않은지 이 글을 한 번 읽어 보시면서 점검해 보시길 권합니다. https://www.scitheo.or.kr/column/?idx=99814964&bmode=view&fbclid=IwZXh0bgNhZW0CMTEAAR2VS3f-BPy3p5NeD_c-Sga3..
아마추어 문학도가 읽고, 다시 읽고, 함께 읽는 도스토옙스키'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독서모임이 이번 달로 일주년을 맞이한다. 놀랍게도 매달 열 명 안팎으로 어김없이 모였다. 지난 열두 달간 우린 도스토옙스키의 열 작품을 출간 순으로 읽었다. 초기작으로 '가난한 사람들', '분신', '백야 외'를, 중기작으로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로부터의 수기', '악어 외'를, 후기작으로 '죄와 벌', '노름꾼'을 함께 읽고 나누었다. 다음 주 목요일 (9월 12일)에 있을 일주년 모임에서는 '백치'를 함께 읽고 나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열린책들 버전 번역자인 계동준 교수님이 게스트로 참석하셔서 러시아문학 전공자의 연륜을 나눠주실 예정이다. 앞으로 남..
절박함의 정체 경미해서 다행이었지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던 기억.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뇌경색으로 잠시 졸도한 적이 있었다. 마침 곁에 있던 아내의 도움으로 그 순간을 무사하게 지나칠 수 있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24시간 두통과 편두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생각한 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머릿속은 무엇을 말하라고 하는데 내 입은 그 명령을 거역하고 엉뚱한 단어들을 더듬더듬 내뱉고 있었다. 답답했다. 입을 다물기로 했다. 표정과 몸짓으로 말하는 게 더 정확했다. 졸도하기 직전의 그 몇십 분. 언어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지 못하는 언어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이게 끝인가 싶었다. 아찔한 순간이었..
충만을 향한 결핍나는 독서가다. 평일엔 기껏해야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을 수 있을 뿐이지만, 나는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어딜 가든 내 가방엔 책이 한두 권이 들어 있다. 짬이 나면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시청하지 않고 책을 읽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방랑자이기도 하다. 책을 읽을 때면 움켜쥘 수 있는 글, 문장, 혹은 단어를 나는 늘 찾아 헤맨다. 그것들을 발굴하기 위해 독서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찾아내지 못한 독서에서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충만을 향한 여정에서도 나는 더 자주 결핍을 맛보는 것이다. 닿을 듯 말 듯한 그 아슬아슬함. 이것이 독서를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고, 독서의 참 묘미가 아닐까 한다.
수치와 죄책과 글쓰기 수치와 죄책은 주머니 안의 송곳과 같아서 일상의 사소한 바람에도 강한 화학작용을 일으켜 종종 분노로 표출되곤 한다. 잘 숨겨오던 것들이 와해된 통제력을 뚫고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숨겨진 자아는 고요한 게 아니었다. 그 억눌린 감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송곳처럼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법이다. 불행한 건 자주 그 대상이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일 때가 많다는 점인데, 이때가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러나 그 상황보다 더 중요한 시기는 그 이후다. 왜 스스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을까 자책하는 마음이 아니라 앞으로는 오랫동안 억눌린 감정과 생각을 건강하게 표현하며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려는 시도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시한폭탄이 되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기억하라. 사랑하..
투고 브릭에서 21주간 성황리에 연재했던, 저의 대학생, 대학원생 시절의 이야기를 팩트 40, 픽션 60 정도로 버무려 쓴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이라는 제목의 팩션을 정리해서 투고했습니다. 투고는 처음이라 어리둥절합니다. 몇몇 자료를 찾아 보니 적어도 백 군데 이상은 보내 봐야 한 군데 될까 말까 한다고 하네요. 일단 서른 군데 보냈습니다. 정말 출판사가 우리나라에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큰 출판사 위주로 보냈기 때문에 안 될 확률이 높겠지요. 그래도 이게 수순인 것 같아서 밑져야 본전이니 그냥 질렀습니다. 한 달 뒤엔 또 다른 중소형 출판사들에게 보낼 작정입니다. 이렇게 서너 번 반복하면 저도 백 군데 정도 투고하는 셈이겠네요. 한 편의 글과 한 권의 책의 차이를 이번에 조금 더 실..
지키려고 늘 애쓰는 글쓰기의 원칙1. Personal but not private개인적이나 사적이지 않게>>> 아무도 당신의 사적인 일과에 관심 없다. 그러나 사적인 차원을 넘어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생각과 감정을 건드리는 글이 되어야 한다.2. Authentic but not too serious진정성 있으나 너무 진지하지 않게>>> 자기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되 불필요하게 무거워지면 그 글은 읽히지 않는다. 절제가 필요한 이유다.3. Simple but not aphoristic 단순하나 아포리즘이 아니게>>> 단문을 선호한다. 미사여구 없는 간결한 문장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것이 경솔한 경구처럼 보이면 그것 역시 가면이다. 거짓겸양은 교만의 다른 이름이며 글이 그런 것을 드러내..
채워지는 기분적어도 인생 후반전은 궁극적으로 내가 아닌 남을 향해야 한다는 나의 믿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내 인생의 전반전은 오로지 나의 확장과 증폭으로 점철되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내 이기적 의지라기보다는 시대와 문화 탓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해 보지만, 이 부끄러운 마음은 깊이 박힌 못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었고 나의 정체성의 중추로까지 자리 잡았다. 나는 탁월함과 명석함, 그리고 신속, 정확한 기술을 숭배했고 거기에 충실한 신자였다. 내 기준에 못 미치는 것들은 하등 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암묵적인 우월감에 취해 있었고 그게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자의 숙명이라 믿고 받아들였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흔적들을 일종의 부채감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삶에서의 회심의 순간이라 할 수 있..

'닮은 듯 다른 우리' 다시 읽기"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는 책 '닮은 듯 다른 우리'가 출간되어 기쁘고 반갑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세포생물학, 분자생물학, 유전학의 코드로 읽는 동시에 대문호의 인문학적 깊이로 생물학의 본질을 천착하는 신선하고 도전적인 책이다. 친절한 설명 덕분에 술술 읽히지만 인간다움의 심연을 응시하는 저자의 혜안이 예사롭지 않다. 문학과 생물학의 융합이라는 개척지에서 저자가 던지는 질문이 새삼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다른 이도 아니고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영중 교수님이 친히 추천사 (사진의 빈칸을 장식한)를 써 주신 나의 두 번째 저서를 오늘 책장에서 꺼내어 다시 훑어봤다. 이 책 역시 선율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지만, ..
써야만 써지는 글독자를 붙들 수 있는 강력한 자석과도 같은 문장을 쓰고 싶은 욕망은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은 갖게 된다. 불행하게도 그건 어렵다. 여전히 나는 영감의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축에 속하지만, 성실함만으로 그런 문장을 써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영감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하는 방법은 하나다. 물론 그런 문장을 항상 써낼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장들을 곧잘 써낼 수는 있다. 이를테면 뻔한 주제이지만 뻔하지 않게 써낼 수 있는 시각, 개별성 가운데 보편성을 찾아낼 수 있는 통찰, 적절한 대조를 찾아내어 글을 진부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환기, 등을 담아내는 문장들을 써낼 수는 있다는 말이다...
책을 읽는 한 가지 이유책을 읽는 한 가지 이유는 어떤 문장에 붙들리기 위해서다. 희열이랄까, 전율이랄까 하는 이 쾌감을 느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문장은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고, 가끔 가슴 저 밑바닥까지 침투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 잊히고 마는데, 어느 날 문득 데자뷰와 같은 순간을 맞이하면서 오래전에 침전된 그 문장이 떠올라 다시 마음 깊은 울림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순간은 주로 또 다른 책을 읽을 때에 찾아온다. 이것만으로도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이런 가슴 설레는 반복 속에 내 삶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잠시 세상의 모든 행복을 맛본 자가 된다.
미국 두 번, 중국 한 번을 3주 만에 다녀오니 한국은 어느덧 장마다. 어제는 비행기 안에서 쓴 추천사와 복상 청탁 원고를 정리해서 보냈다. 생각해 보면 1박 3일간의 이번 미국 여행은 꿈만 같다. 실제로 내가 다녀왔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여전히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 일상이 갖는 치유의 힘을 기대한다. 내일은 7월. 아, 그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벌써 2024년 절반이 간다. 남는 건 글밖에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글은 기억이 되고 나의 역사가 된다. 계속 글을 써야 할 한 가지 이유다.
예의땡볕을 걷다가 풍성한 가지가 드리운 그늘 아래로 들어서면 동공이 확장되면서 비로소 눈이 열린다. 저 멀리서 어둡게만 보였던 숲 속 세상이 보란 듯이 내 앞에 펼쳐진다. 어떤 표현이 가장 적당할까 하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층층의 많은 가지들 덕분에 옅어진 햇살은 싱그럽게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정확한 단어는 정확한 경험에서 우러난다. 책을 많이 읽어도 직접 겪어내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텍스트 읽기에 멈추지 말고 자연을 읽고 사람을 읽고 세상을 읽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텍스트에 힘을 부여하는 방법이고, 부여된 텍스트를 마침내 온전히 읽어내는 방법이며, 텍스트를 완성하는 방법이다. 글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힘은 책상에서 쓰인 텍스트가 아닌 책상 밖에서 완성된 텍스트인 것이..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사람을 읽고 나를 읽고 삶을 나눈다 이틀 전 목요일 저녁,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아홉 번째 만남이 있었다. 6시부터 8시까지가 공식적이라 할 수 있는 계획된 모임 시간인데, 보통 9시 10시까지 나눔이 지속된다. 중간에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서 한 달 만에 회포도 풀고 도스토옙스키 덕분에 터져 나온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나눈다. 대부분 비슷한 고백을 하신다. ”내가 왜 이런 말을 여기서 하는 거죠? 나 이런 얘기 밖에서 잘 안 하는데...“ 그러나 우린 이제 안다.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는 건 사람을 읽는 것이고, 또 나를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의 외면을 비추는 건 거울이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면에서 내면을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책을 읽고 궁극적으로 ..
이야기의 힘, 문학의 힘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땐 책을 집어든다. 그 속에 답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책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깨닫게 된 한 가지는 책은 답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책은 답이 아닌 답을 이끄는 실마리, 혹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그것도 무한으로. 어쩌다 한 권의 책이 나에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도 책 자체라기보다는 그 시간 그 공간에 위치한 나의 생각과 마음과 눈에 보이지 않는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책을 매일 읽어도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순간들. 가끔, 아주 가끔 그런 예기치 못한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전율하게 되고 살아 있어서, 혹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마음 깊이 감동이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 책을 드는 이유도 그런 기대 때문일 것이다.독..
잘 쓰기 위해 분별해서 읽기 읽기와 쓰기에 대해 그동안 쓴 글만 해도 수십 편이 되겠지만, 수백 편이라도 모자랄 주제이기에 오늘 하나 더 보탠다. 먼저 질문 한 가지.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하나요?”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두 가지 답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네,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합니다.” >>> 쓰는 행위는 출력에 해당된다. 출력은 입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궁극적인 입력은 읽기다. 또한, 쓰는 행위는 움직임이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에너지는 섭취한 음식을 소화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읽기가 곧 음식이다. 다시 말해, 쓰기라는 행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읽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진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다. 이젠 말 같은 말을 해볼 차례다. 읽는다면 ..

공간, 사람, 기억, 그리고 문학과 소설 공간은 그리움을 매개한다. 그리움은 그 공간을 볼 때마다 그곳을 충만하게 채웠던 그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흔적이라고도 불리는 공간에 대한 사적인 기억. 사람은 사라져도 공간은 남는다. 그리움이 그렇듯이 공간은 시간을 초월한다.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지만, 유독 그리운 사람이 연관될 때마다 분리가 일어난다. 아마도 그리움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공간은 휘고 낮게 가라앉는다. 이에 맞춰 시간은 느리게 가기 시작하고 어느 점에서 멈추어 선다. 우리가 향수의 끝이라고 부르는 지점이다. 반복된 향수가 언제나 같은 지점에서 끝이 나는 이유다. 재현되지 않는, 아니 재현될 수 없는, 아니 재현되지 않아야 할 향수가 우리에게 언제나 아련함으로 다가오..
휴식 내가 써온 300편이 넘는 독서감상문 중 가장 긴 시간을 투자했던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었다. 두 번째는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었고, 그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들였던 작품은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등이었다. 작품의 분량 및 난이도와 감상문에 들어간 시간이 얼추 비례했다. 어젯밤 완성한 감상문의 경우는 예외에 해당된다. 그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열 시간은 족히 사용했던 것 같다. 아마도 '악령' 다음으로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감상문일 것이다.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비판적인 글을 쓸 때에는 특히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불필요한 감정을 건드리..
성실한 글 글쓰기를 이제 막 배우며 시작하시는 여러 분들의 글 중 빈번하게 눈에 띄는 특징이 있어 소개해보려고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거들먹거리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단문 위주로 쓰려고 애쓰는 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용한 단문이 그저 성의 없게 보인다거나,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다 아는 척하는 것처럼 보인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자신이 지혜자인 듯 착각한 나머지 아포리즘을 구사하는 식으로 보인다면, 나는 차라리 단문을 사용하지 마시라고 권하고 싶다. 오히려 구구절절, 비록 장문이 된다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식으로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 단문의 미학은 장문을 쓸 줄 아는 다음 단계에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길게 쓸 줄 모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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