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도서관 미국에서도 도서관은 늘 아들 책 빌리기 위한 장소일 뿐이었다. 직업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 (특히 고전 문학)를 영어로 술술 읽어낼 정도로 내 영어 실력이 좋지도 않을뿐더러, 작가로서 나는 아무래도 영어가 아닌 한글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영어 공부를 겸해서 영어 문학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었다. 한국 와서도 처음엔 상황이 비슷했다. 그동안 동네 도서관에 여러 번 갔었지만 모두 아들 영어 책만 빌리는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정확히 한국 온 지 6개월 반이 되던 날, 처음으로 내 책을 빌렸다. 한국 도서관엔 한국 책이 대부분이라는, 이 당연한 사실을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라도 푼 것처럼 새삼 깨달으며 나는 도서관 문학 코너에 위치한 커다란 책장 사이에서 20분이 넘게 서..
장편소설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 나쓰메 소세키를 나는 그의 작품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그러므로 두 번째 작품이 된다. 약 500 페이지 분량의 장편소설인데, 100 페이지 채 읽지 않았을 때 이미 작품이 다 파악되어 버렸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풍자와 해학이 곁들여진 독특하고 참신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의 필력 또한 출중하여 읽으면서 여러 번 ’참 글 맛깔나게 쓰네‘ 하며 나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상하다. 지금 전체의 70 퍼센트 정도 읽었는데, 진도 빼기가 쉽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갈수록 느려지는 기분이다. 집중이 안 되고 자꾸만 딴 생각이 든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하고 책을 덮고 잠시 생각하다가 의외의 결론에 다다랐다..
읽기는 싫고 쓰고만 싶을 때 읽기는 싫고 쓰고만 싶은 시기를 만날 때마다 나는 점점 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처음엔 그 시기를 쓰기 신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맘껏 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번 그렇지 않았다. 빙글빙글 도는 원 안에 갇힌 기분이랄까. 마치 물은 많으나 정작 마실 물이 없는 홍수처럼 나는 금세 쓰기라는 행위에 갇혀 아무것도 써낼 수 없는 상태로 치닫곤 했다. 읽기도 쓰기도 모두 사라져버린, 죽음의 무풍지대로 진입하곤 했다. 생각해 보면,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재료의 소진이었다. 그리고 내가 목도한 건 나의 가소로움이었다. 수치스러웠다. 기본적으로 나는 읽지 않으면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계적으로 글씨를 쓰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모든 글은 저마다의 ..
공간의 힘 요즘엔 집중해서 책 읽기가 예전 같지 않다. 작년과 비교할 때 올해 읽어낸 책 수가 절반이 조금 넘는다. 감상문으로 남긴 작품도 마흔 편이 안 된다. 이유를 생각해 보면 미국에서 한국으로의 이사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이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공간의 부재다. 공간으로 탓을 돌린 이유는 이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미국에서처럼 밤 10시부터 11시 남짓까지는 내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 가족이 사는 곳은 직장에서 1년 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기숙사다. 신청한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아니기 때문에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운 좋게 입사한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하루에 1만 2천 원만 내면 전기세며 물세..

소설을 읽는 이유 나에게 한 편의 소설은 하나의 세상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낯선 시공간으로 홀로 떠나는 여행과 같다. 시간을 내어 일부러 익숙한 곳을 떠나는 일은 언제나 부담이 되고 용기가 필요하듯, 이 각박한 시대에 한 편의 소설을 손에 들고 읽어나간다는 건 무모할 정도로 우둔한 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하지 않는다면 두 눈을 똑바로 뜨고도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 버리는 법. 무용성의 유용성을 믿고, 효율보다는 의미에 무게를 더 두며, 이야기의 힘을 믿는 나는 저항의 작은 몸짓으로, 건전한 도피의 일환으로, 동시에 나와 내가 속한 세상을 상대화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손쉬운 방편으로 오늘도 소설 한 편을 손에 든다. 서너 권의 다른 책을 동시에 읽어나간 지는 꽤 오래되..
글쓰기 여정 한 달은 넘은 듯하다. 내가 가장 즐겨 읽는 장르인 소설을 손에서 놓은 시기가. 돌이켜보니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가 시작이었다. 그 이후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기 시작했고 아직 끝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를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시작해버렸고, 지금은 아끼느라 일부러 멀리 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정효, 스티븐 킹, 신형철로 이어지는 삼단 콤보로부터 아무래도 나는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글쓰기에 대해서 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습작 소설도 괜히 한 번 더 다듬어보기도 하고, 예전에 썼던 형편없어 보이는 글을 퇴고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지금 준비하고 있는 출판사 대표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버전 2.0으로 내 세 번째 저서가 될 원고..
완성과 기본 신형철을 통해 나는 산문이 주는 매력에 눈을 떴다. 에세이, 감상문, 서평, 비평과 같은 어느 한 형식에 국한시킬 수 없는 그의 글은 밀도 있게 다가와 머리를 먼저 강타한 뒤 마음과 생각을 강탈한다. 홍수 속에서 비로소 마실 물을 만난 사람처럼 나는 문자의 바닷속에서 그의 글을 찾아 읽으며 쉼을 얻는다. 그런데 놀랍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한 사실 하나는 신형철은 글쓰기 책에서 공통적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 사항 몇 가지를 과감하게 무시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신형철은 ‘것’의 사용에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이며, 수동태 문장도 거침없이 사용한다. 두 단문으로 나눌 수 있어 보이는 문장도 장문으로 그냥 써 버린다. 그런데 글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것도 글쓰기 규칙을 잘 지키는 다른 작가들의 글보..
연습의 이유 많은 작가들이 초보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건네는 조언 중 하나는 영감에 기대지 말라는 것이다. 나 역시 동감한다. 그러나 이 조언은 글을 쓸 때 영감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것보다는 성실한 노력이 글쓰기라는 장거리 경주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영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글을 시작할 수는 있을지언정 완성할 수는 없다. 완성은 성실한 인내로만 가능하다. 안정효의 말 대로 ‘요령으로는 뚝심을 당하지 못한다.‘ 어디 글쓰기뿐인가. 내가 아는, 전문성과 창의력을 요구하는 일들은 모두 비슷한 것 같다. 한 분야에서 조금 일을 잘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일을 벌이는 데에는 전문이지만 그 일을 잘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마치 메뚜기라도 된 듯 이 ..
기본기와 개성 기본기도 중요하고 개성도 중요하다. 실없는 질문일지 모르지만,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영역에서는 기본기가 개성보다 더 중요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다른 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인가.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가려야 할 때마다 나는 머릿속으로 한 가지씩 없애본다. 이를테면, ‘기본기 없는 개성’과 ‘개성 없는 기본기’를 상상하고 비교해보는 것이다. ‘기본기 없는 개성’이라고 하면, 왠지 설익었다는 인상을 주는 반면, ‘개성 없는 기본기’는 식상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물론 설익은 것과 식상한 것의 차이를 비교하는 일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콘텍스트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기본기와 개성을 고루 갖춘 사람..
밀도 높은 글 글의 밀도는 글의 형식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소설보다는 시가, 독후 감상문보다는 평론이 밀도가 높다. 물론 나는 시를 쓸 재주도 없고 평론을 쓸 깜냥도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갈수록 밀도 높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막연하게 그것이 나의 글쓰기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게 된다. 내가 쓸 만한 글의 형식으로는 기껏해야 소설이나 에세이 혹은 독후 감상문 정도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며칠간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은 가능한 이전보다 압축, 절제, 간결의 삼중 화음에 좀 더 신경 쓰며 글을 써나가는 것. ‘정확한 글쓰기’는 글의 형식을 떠나 글쓰기 동지들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믿고 읽는 신형철 평론이라고 하면 나는 왠지 경직되는 기분을 느낀다. 논문이라는 단어가 과학계에서 가지는 위상과 평론이 문학계에서 가지는 위상이 내겐 엇비슷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평론은 어렵게만 느껴지고, 고난도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시는 어떤가. 소설이 시보다 좀 더 대중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시는 이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느끼기 위해 읽는다는 말까지 감안한다면, 나에겐 시 역시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저 너머의 무엇인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 든 책은 무려 시에 대한 평론집이다. 시와 평론의 이중창이라… 이 둘의 무게만 생각하면 나는 압사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바로 이 책 저자의 이름이다. 신형철. 믿고 읽어도 되는..
오랜만에 전율을 느끼다 신형철의 신작, ‘인생의 역사’를 펼치고 며칠을 뜸 들인 뒤 나는 오늘 밤이 되어서야 아끼던 선물 포장지를 뜯는 심정으로 프롤로그를 읽어버리고 말았다. 신형철이 쓴 활자는 정확한 펀치가 되어 나를 정통으로 가격했고, 신형철 특유의 힘에 기분 좋게 압도 당한 나는 전율했다. 내가 뜸을 들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 기대가 과장된 나머지 혹시라도 실망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내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력을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싶다. 그의 글쓰기는 내게 인문학의 포문을 열어주었으며, 문학의 깊고 풍성한 맛을 볼 수 있게 해 준 시작점이 되었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마치 그를 잘 안다는 착각..
정확한 글쓰기의 자세 단어를 사용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단어 그 자체보다 그 단어가 쓰인 맥락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동일한 단어라도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예를 들어, ‘낙엽’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연이어 연상되는 단어는 가을, 단풍, 산, 산행, 소풍, 책갈피, 연인, 혹은 고독, 우수, 사색 등의 낭만적인 이미지들일 것이다. 그러나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옷깃을 여밀 무렵 길바닥에서 뒹구는 낙엽을 떠올려보라. 이미지가 그대로인가. 아닐 것이다. 낙엽 밟는 소리는 낭만적이지만, 낙엽이 도로 위를 굴러가는 소리는 낭만적이기는커녕 황량할 뿐이다. 맥락의 중요성은 독자의 배경지식과 연결될 때 더 큰 임팩트를 지닌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 태어나 자란..
당부: 글쓰기 동지들에게 갈수록 글쓰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까닭은 쓰면서 자연스레 늘어가는 비판력 때문이다. 이제 막 글을 써보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글쓰기 연습을 지속하는 사람에게 있어 지뢰와 같은 걸림돌은 다름 아닌 식상함이다. 글을 계속 써나가다 보면 결국 자신의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어휘력, 문장력 등을 스스로 파악하게 되며, 자신의 글이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글을 잘 못 쓴다는 열등의식보다 더 큰 좌절감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감을 잃고, 일부는 글쓰기를 포기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기도 한다. 글쓰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순간들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을 거꾸로 생..
쉽고, 단순하고, 자연스럽고, 정확한 글 여전히 나는 소설 한 권 쓰기를 꿈으로 가지고 있다. 한 달 전부터 읽기 시작했고, 아직 아껴서 읽느라 다 읽지 못한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읽으며, 제대로 된 글쓰기 공부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여러 장르 소설 읽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서에 있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만 고집하기에는 아직 나는 너무 어리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야기 전개에 긴장과 스릴을 넣기 위해서는 추리소설 (혹은 범죄소설) 만한 게 없다.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역시 이러한 장르적 특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던가. 마침 나는 한 달 전 즈음 세계 x대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작품 중 세 편을 구입한 적이 있다. 나는 이게 마치 신의 계시라..
목소리 따라가기 한강 작가의 인터뷰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소설을 어떻게 써나가냐는 질문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등장인물이 말을 걸어온다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글을 써나간다고.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도 결국 작가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에 불과한데, 그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말을 걸고 창조주가 나아갈 길을 인도한다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건 소설 속 등장인물을 작가 내면의 목소리로 이해하면서부터였다. 글을 써나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한 가지 예로, 위에서 든 예처럼 ‘목소리 따라가기’가 있다.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귀에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간다. 반면, 글을 쓸 땐 마음에 들리는 목소리를 ..
글쓰기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준비: 재독 프로젝트와 작가 노트 만들기 어젯밤 다시 원고를 꺼내어 천천히 읽었다. 그제와 달리 썩 괜찮아 보였다. 감동과 교훈, 그리고 몇몇 빛나는 문장들까지 눈에 쏙쏙 들어왔다. 과장하자면, 하루 만에 최하품에서 최상품으로 바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웃음이 났다. 허탈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글은 요물이란 생각이다. 동일한 텍스트라 하더라도 읽는 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심지어 본인이 쓴 글인데도 말이다. 글을 쓰고 만족감에 취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떻게 해도 성에 차지 않을 때가 있다. 참고로 나 같은 경우는 후자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대부분 불만족에서 마무리된다. 만족할 때까지 쓰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그 시점이 언제 올 지,..
살아있는 글 잔잔한 소설이나 시집을 들 때마다 나는 여전히 그것들을 읽어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내 안이 너무나도 시끄러운 탓이다. 그러면 나는 그 책을 내려놓고 다른 책을 들거나 바람을 쐬러 밖을 나간다. 웅숭깊은 무언가를 진지하게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에 여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익살스럽거나 가벼운 이야기들이 즐비한 읽기는 마음의 준비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스마트폰으로 읽어대는, 안 읽어도 무방한 것들은 내 안의 여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끔, 아주 가끔 교훈을 주는 이야기도 간간이 섞여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런 글들은 내겐 한없이 가볍기만 하다. 가벼운 글이 무거운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벼워 보이지만, ..
글 쓰는 즐거움 글쓰기는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예사롭지도 단조롭지도 않다. 오히려 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작정 쓴다고 해서 생기지도 않을뿐더러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이런 면에서 글쓰기의 즐거움은 쟁취하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얻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능동적인 행위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몸부림 따위에 그치지 않는다. 그 행위의 무게중심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있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인정. 그렇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스스로 끊임없이 갱신하는 과정 중에 비로소 얻어지곤 하는 인고의 열매다. 참고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 열매를 한입 가득 깨물면 단맛만 나지 않는다. 쓴맛은 물론이며 신맛, 짠맛, 그리고 매운맛까지 골고루 느낄 수 있다. 이..
무인도에 들고 갈 작품 12편 약 7년에 걸쳐 지금까지 300권이 넘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중 꼭 소장하고 싶은 12편을 ‘무인도에 들고 갈 작품’이라는 이유로 재미 삼아 골라봤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문학을 읽어나갈 것이기에 이 리스트는 계속 수정될 것입니다. 즉, 이 리스트는 2022년 9월 현재에 작성된 기록임을 밝혀둡니다. 재미 삼아 훑어보시면서 참고도 하시면 좋겠습니다. 1.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 마음 같아선 5대 장편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포함)을 모두 들고 가고 싶지만, 물리적인 무게와 부피를 고려하여, 도스토옙스키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만 대표로 고른다. 인간의 본성을 날 것 그대로 맛볼 수 있으며,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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