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방향 글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소설이 나의 최종 목적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운명이랄까. 아직은 막연한 이끌림이지만, 그 힘은 강한 자력을 지니고 있어 매일같이 나를 끌어당긴다. 이제는 쓰고 있는 습작 소설의 내용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춰보고 다시 읽어보고 살을 붙여나간다. 재작년에 시작했던 일이니 햇수로 따진다면 벌써 3년째에 접어든 셈이다. 이제 겨우 A4지로 다섯 페이지 적었으니 효율을 말하자면 정말이지 대책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식이면 십 년을 써도 스무 페이지밖에 못 쓰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다섯 페이지가 그냥 다섯 페이지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한때는 열 페이지가 넘었다가 다시 한 페이지로 줄었고, 이런 식의 셀 수 없는 반복 끝에 현재 다섯 페이지에 와 있다고..
글의 일시성과 영원성: 작가와 독자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썼던 글은 한동안 읽지 않게 된다. 시간을 많이 투자한 글일수록 더 그렇다. 초고와 퇴고 사이에는 얼마나 많이 반복해서 읽는지 모른다. 퇴고를 끝낸 후 완성이 되었다고 생각한 글에는 더 이상 눈이 가지 않는다.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다. 공을 들인 만큼 애착이 강할 것 같은데, 그래서 계속 옆에 두고 읽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내가 쓴 두 권의 책도 출간된 이후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누가 보면 기피한다고 여길지도 모를 만큼. 왜일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글은 일시성을 가지는 것 같다. 한 편의 글과 함께 보낸 시간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물론 글과 글쓴이 (작가) 관계에 국한된 말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 작가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성실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글을 잘 쓰는 사람 중에 작가가 아닌 사람도 있고, 작가이면서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글을 성실하게 쓰다 보면 쓰지 않는 사람보다는 당연히 잘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가는 글을 잘 쓴다는 표현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글을 잘 써야 작가라고 불릴 수 있다는 말은 능력 위주 사회의 편향된 가치관의 반영이자 작가에 대한 환상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내 맘대로의 정의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한번 작가는 영원한 작가라는 말은 오류다. 방점은 ‘성실’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라는 타이틀..
3찰 어떤 작품은 급하게 내리는 소나기와 같아서 읽는 이의 마음을 일시에 흠뻑 적시는가 하면, 또 어떤 작품은 가랑비와 같아서 읽는 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마음을 적신다. 작품을 읽어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후자의 작품을 선호한다. 갈수록 더 그렇다. 헤세의 말처럼 나도 좋은 작품은 천천히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우러나오는 그 맛을 나는 사랑한다. 급하게 먹어 해치우는 작품이 아닌, 가만히 음미하는 작품. 음미는 풍미를 충분히 즐기며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언젠가부터 천천히 움직이는 것들의 매력에 대해서 조금씩 눈을 떠나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삶의 진리가 많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들 역시 이러한 천천히 움직이..
책, 기억. 가끔은 책 냄새에 압도되는 도서관에 앉아 하루 종일 책만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다가 집중이 흐트러지면 저 책을 읽고, 그 책도 지겨워지면 또 다른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공간. 책들이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웬만하면 내가 앉아있는 자리 주위에 조금은 무질서하게 보일지라도 산처럼 쌓여 있으면 좋겠다.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학교 도서관이 지하였다. – 건물의 정면에서 보면 지하인데, 뒷면에서 보면 지대가 낮아서 지하가 아니라 1층 같았다 – 하지만 건물의 모퉁이에 위치해 있어 오후엔 커다란 창을 통해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졌었다.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종종 도서관에 들러 그 햇살을 받으며 책을 빌리거나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지하..
책 만드는 이유: 구매자 vs. 독자. 갈수록 내로라하는 베스트셀러 책을 구매하기가 망설여진다. 많이 팔리니 많이 읽힐 거라는 생각, 많이 읽힌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 그런 책은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시간이 갈수록 내게서 힘을 잃어간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얼마 전부턴 반동적인 마음까지 생겨났다. 이젠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괜한 색안경을 끼고서 오히려 그 책을 한 발 떨어져 구경하게 된다. 사람들의 평에 영향 받지 않는 나만의 취향이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그동안 베스트셀러 책을 구매하고 읽어보고 실망했던 경험이 누적된 탓일 테다. 스테디셀러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베스트셀러보다는 신뢰하는 편이지만, 이 역시 자본주의의 강력한 힘과 그에..
글을 잘 쓰고 싶은 이유? 글을 잘 쓰고 싶은 이유를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원초적인 시기와 질투가 이유라면 당신은 아직 진지하게 글쓰기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당신의 그 시기와 질투의 이유를 한 꺼풀 벗겨내면 허세라는 두 글자가 그 어두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시기와 질투가 글쓰기의 동력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힘을 발휘하는 한 어느 정도까진 발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곧 그 열기는 식고 말며, 조금 후에는 오히려 글쓰기의 무용성이나 주장하는 등, 글쓰기를 연습하는 주위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마치 글쓰기를 하는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은 이유를 가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말이다. 시기와 질투는 겸손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 타자를 자기 자..
읽고 쓰기: 풍성한 삶을 위하여. 하릴없이 멍하니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쓸모가 있지만, 본인의 직업 이외의 시간을 항상 멍하니 보내는 건 바람직하진 않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가 어쩌면 그 사람의 비공식적인 정체성, 그러니까 사회와 타자와 직업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진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더 잘 대변해주지 않을까 싶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가 솔직한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루에 많아야 두세 시간 정도 생기는 혼자만의 시간에 누군가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는 건 곧 자신의 자발적 의지이며 자신만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내가 사람을 사귈 때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 사람의 직..
책 읽는 시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고,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 나는 오늘도 기꺼운 마음으로 낯선 세상의 여행자가 되어 길을 나선다. 타인의 눈과 귀를 통해 나는 넓어지고 또 깊어진다. 처음엔 낯설어서 불안했다. 지금도 여전히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매번 조금씩 가벼워지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게 무엇인지도 조금씩 알게 된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안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혹은 한 우물만 판다는 꽤나 거창한 이유로 게을리했던 여행들이다. 5년 정도 꾸준히 여행을 지속하며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불안은 떨치는 게 아니라 안고 가는 것이라는 사실. 인간은 존재 자체의 이유를 묻고 그 의미를 찾는 유일한 존재자이기에 불안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불안을..
간판과 거품 사이: 감상에 젖어들기 그리고 글쓰기. 글은 내 안에 있지만 아무 때나 끄집어내어 종이에 쏟아놓을 수는 없다. 그러려면 어떤 특정한 환경이 필요하다. 그 환경이 주는 감상에 젖을 필요가 있다. 흔히들 시상이 떠올랐다거나 영감을 얻었다고 표현하는 순간이다. 똑같은 단어들로 구성되더라도 어떠한 감상에 이끌리는지에 따라 글의 결이 달라진다. 명제적 진술로만 이뤄진 딱딱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좀처럼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뭐 그런 쓸데없는 걸 신경 쓰냐고 타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에겐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나비효과처럼 글의 결을 바꾸어 글의 맛을 확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작가들은 자기가 선호하는 글쓰기 환경이 있다. 그 환경에서 본인이 만족하는..
작가의 글: 고뇌와 미련의 텍스트. 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작아진다. 나는 언어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가 되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에 짓눌려 얼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나는 잠시 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더듬이가 되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게 된다. 제한된 언어와 제한된 시공간, 그리고 제한된 나의 상상력과 글쓰기 역량이 언제나 아쉬울 뿐이다. 아, 내가 느낀 것들을 단 10퍼센트만이라도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래서 글은 언제나 미련이 묻어나는 법이다. 글로 담아내지 못한 90퍼센트 이상의 것들이 흐르는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끝내 살아남은 10퍼센트의 텍스트에 ..
글쓰기의 관점: 현미경과 망원경 되기. 1. 현미경: 단순한 것에서 의미심장함을 안목이라 할 수 있다. 볼 줄 아는 것이다. 세밀한 현미경이 되어 쉬이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능력이다. 과학자의 눈도 필요하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시인의 눈과 철학자의 눈,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과 소망을 품은 눈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극히 개별적인 사건이나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이고 묵직한 무언가를 건드리고 드러내는 힘이다. 2. 망원경: 의미심장한 것에서 단순함을. 좋은 글은 현미경 역할만으론 부족하다. 망원경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즉, 관조할 줄 아는 능력이다. 멀리 떨어져 볼 줄 알아야 한다. 객관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묵직한 사건이나 상황에 압도된, 있는 그대..
습작: 글쓰기의 즐거움. 때로는 형편없는 글을 끄적거리는 것이 유려한 글을 읽는 것보다 더 커다란 만족을 준다. 토로, 해소, 정리, 위로로 이어지는 글쓰기의 유익은 경험해본 자만이 아는 빼앗길 수 없는 즐거움이다. 마음이 답답할 땐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여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와 벌떡대는 맥박 소리가 어느 정도 잔잔해질 즈음을 틈타 조용한 곳에 앉아 글을 쓴다. 물론 형편없는 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을 가장 사랑한다. 공개되지 않은 채 쌓이고, 또 많은 부분은 버려진 글들의 바다에서 나는 조금씩 수영하는 법과 즐길 줄 아는 힘을 기른다. 글쓰기는 무엇보다 내면의 외침이다. 그 외침은 부메랑처럼 나에게로 돌아와 가장 먼저 나에게 효과를 발휘한다..
글의 진정성. 글은 글쓴이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글쓴이를 숨기기도 한다. 드러냄으로써 숨긴다. 또한, 자기 자신의 과거를 솔직히 나누며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글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힘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적절히 포장, 아니 조작하여 써지는 글도 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진정성이란 단지 거짓의 여집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목적에 부합하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삭제, 수정, 축소, 과장하여 글을 쓰게 된다면, 의도치 않게 거짓의 열매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처음엔 그러한 조작이 미약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새 창조된 자신의 페르소나가 대중에게 어필하기 시작하면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은밀하게 자기기만에 능한..
각성과 잔상. 좋은 글을 읽을 때 얻는 유익은 각성에 그치지 않는다. 잔상의 지속력에 방점이 있다. 각성은 한 순간이지만 그것이 삶을 변화시키는 건 아니다. 각성은 이벤트이지만 잔상은 일상으로 스며든다. 스며들지 않으면 변화의 시작은 일어나지 않는다. 각성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마는 효과에 그칠 때가 많다. 시작만 창대하고 끝이 없을 때가 흔하다는 말이다. 강한 각성이 항상 강한 잔상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돌아보면 정말 별 것 아닌 기억의 조각이 잔상으로 남아 그 순간을 추억하게 하는 경험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해보았지 않나 싶다. 머리가 원하고 머리가 좋아하는 것이 삶과 무관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머리가 아닌 몸, 그러니까 습관이 지배한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는 습관을 ..
자발적 매임: 자유. 평일에는 많으면 짜투리 시간을 포함해서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읽거나 쓸 수 있다. 물론 남아도는 시간이 아니라 나름 애써서 확보한 시간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것을 알아채고 소중히 아끼는 자의 몫이다. 다만 너무 강박이 될 정도로 시간에 매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러나 적당히 매이는 건 나쁘지 않다. 자발적 매임은 자유를 최대한 누리는 자의 아름다운 선택이다. 읽고 쓸 건 많은데 제한된 시간에 모두 다 할 수가 없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그날그날 읽고 싶은 글과 쓰고 싶은 글이 다르다. 조금 집중이 필요한 고전문학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때가 있는가 하면, 잠시 짧은 여행을 다녀오듯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손에 들기도 한다. 종종 상상력과 허구에 기반..
느리게 읽기: 갈증보단 충만함을. 고전문학을 읽는 맛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은 풍경 묘사를 읽을 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거나 기묘한 운명의 장난으로 이뤄지는 숨 가쁜 사건 전개가 이야기를 주도하는 방식, 즉 서사 위주의 방식이 현대소설에서 주로 다뤄진다면, 고전문학에서는 자연을 비롯한 풍경이나 상황, 그 가운데 함께 하는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빼놓을 수 없는 주축으로 사용된다. 특별하고 자극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서사에 의존하기보다는 바쁘고 정신없는 현대인들에겐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서정적인 묘사가 고전문학에선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그 인물이 속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소설의 단순한 부수적 요소가 아니다. 때론 먼 훗날 그 책을 기억할 때 머릿속에 ..
살아있는 글: 읽기와 쓰기의 공명. 읽다 보면 쓰고 싶어질 때가 자주 있지만, 쓰다 보면 계속 쓰고만 싶어질 때가 많다. 좀처럼 읽는 모드로 복귀하기가 어렵다. 이런 흐름에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나는 계속 무언가를 쓰고 있다. 책은 한쪽에 멀찌감치 치워둔 채로. 위험한 순간이다. 나 같은 경우, 이미 여러 번 겪어봤는데도 이런 순간을 맞이할 때면 여전히 나는 긴장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인간 본성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낀다.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교만해지는 내 안의 나. 또다시 내면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쳐드는 자기중심적인 자아. 읽지 않고 쓰기만 하려는 나. 섬뜩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읽지 않고 쓰기만 고집할 경우, 그 쓰기의 우물은 금..
읽고 쓰기: 감지하고 반응하기, 민감하게. 읽다 보면 쓰게 된다. 독서하다 보면 어떤 한 단어나 한 문장에 이끌려 읽던 책을 내려놓고 무언가를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소위 말하는 영감이나 시상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가끔은 이런 순간이 잦아서 진도를 내기 힘들 때도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영감 혹은 시상을 놓치며 살고 있을까? 과연 그런 것들은 작가나 시인 혹은 예술가의 전유물일까? 그것들은 빛나지 않는 일상의 언어와 함께 끊임없이 허공에 뿌려진다. 그것들을 하나라도 더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하루는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무뎌진 우리의 더듬이는 빛을 잃었다. 사용하지 않아서다. 나는 그것을 감히 죄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있다. 놓치고 나중에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
긴 글 연습하기. 일반적으로 한 문장보다는 두 문장 쓰기가 어렵다. 문장 간 연결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한 단락보다는 두 단락 쓰기가 어렵다. 단락 간 연결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러 단락으로 이뤄진 긴 글은? 당연히 더 어렵다. 일반적으로 짧은 글보다 긴 글이 쓰기 어렵다 (물론 긴 글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사람들에겐 짧은 글 쓰기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다른 문제다). 문장 간, 단락 간, 나아가 전체 글의 흐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두 문장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멋들어지게 쓸 줄 알면 자신이 글 좀 쓴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 대표적 예가 마치 자신이 지혜자가 된 것처럼 아포리즘으로 툭툭 진리를 선포하듯 써대는 짧은 글들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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