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독서 계획. 내년에 다섯 편 이상 읽을 고전문학작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로 정했습니다. 한국 일정이 12월에 생긴 바람에 미처 다 끝내지 못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더불어 그의 몇몇 단편소설도 내년에 마저 읽을 계획입니다. 또한 제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스타일의 문체로 쓰인 몇 편의 작품도 읽을 계획입니다. 파스칼의 '팡세',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카뮈의 '결혼', 장 그르니에의 '섬' 등입니다. 몇 번씩 시도했으나 번번히 중도 포기했던 작품들이랍니다. 그래서 미련이 많이 남습니다. 내년에는 꼭 읽어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감상문까지 남길 수 있다면 더 좋겠구요. 제가 참여하고 있는 철학 모임에서는 헤겔과 마르크스, 하이데거와 라깡에 대한 입문서 혹은 개론을 읽..
문학적 표현력. "떨리는 가슴으로 나는...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보았다." 여기서 '떨리는 가슴'은 일인칭 용어인 반면, '떨리는 어깨'는 이인칭 용어다. 가슴과 어깨의 차이. 가슴은 앞에 위치하며 내가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내 의지를 반영한다. 반면, 어깨는 내 눈으로 보기가 어렵다. 다른 사람의 어깨를 보는 편이 더 쉽다. 그것도 앞이 아닌 뒤에서 그 사람 몰래 보는 것이다. '떨리는 가슴'은 주로 화자의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흐느껴 울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흥분과 기대에 벅차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떨리는 어깨' 역시 감정을 나타내지만, 화자가 아닌 화자의 시선이 닿아있는 상대방의 감정이다. 온몸이 흔들릴 정도가 아니라 어깨가 떨린다는 것은 미세한 움직임을 뜻한다. 화자의 시선에는 ..
추천 부탁. 대략 한 해에 신학자나 인문학자, 그리고 고전문학작가를 한 명씩 택하고 그들의 작품을 적어도 다섯 편 이상 읽어나가면서 그들의 사상과 필체 등을 배우기로 맘먹은 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다섯 편 넘게 읽은 작가는 헤르만 헤세, C. S. 루이스, 크리스토퍼 라이트, 김근주, 강남순,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읽었으나 감상문으로 미처 남기지 못한 작품도 있고, 추가적으로 더 읽고 싶어 구입은 했으나 아직 책장에 꽂힌 채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작품도 있습니다. 내년에는 톰 라이트의 작품을 읽어보기로 작정해서 이미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전문학작가를 누구로 선정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톨스토이를 제 주위의 몇 분이 공통적으로 추천해 주셨는데, 그만큼 다섯 편 이상 작품을 써..
**다음은 며칠 전 군대 얘기 때문에 잊어버렸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다. 글이 만들어지는 몇 가지 다른 과정에 대한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하는 게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세 가지 글쓰기. 첫 번째, 받아 적는 글이다. 즉,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뿜어져 나오는 생각을 주워 담느라 급급한 마음으로 쫓기듯, 받아 적듯 쓰는 글이다. 보통 어떤 장면을 목격하거나 관찰하면서 마음에 담긴 어떤 불특정한 잔상이 내 안에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던 기억의 조각들에 숨을 불어넣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하곤 한다. 바닥의 먼지처럼 무질서하게 나뒹굴던 생각의 파편 중 몇몇이 알 수 없는 어떤 과정에 의해 선택되어 조용히 공중으로 떠오르면서 무언가 하나의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그림이 퍼즐처럼 맞춰져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읽기. 마흔이 되기 직전 나의 읽기는 위가 아닌 옆을 향하기 시작했다. 다시 독서다운 독서를 시작했으나, 처음에는 방향에 대해 별다른 기준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한 기준이 생겼다. 한 해에 고전문학자 한 명, 신학자 한 명을 힘이 닿는대로 읽어보자는 것이었다. 각각 5권에서 10권 정도 읽어보면 한 두권 읽은 경우보단 조금이나마 저자를 깊게 이해할 수 있고 기억에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신학자의 경우 그 사람의 사상과 그 시대의 신학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흐름을 알 수가 있고, 문학가의 경우는 그 사람의 사상을 포함하여 필체와 문장력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경우, 작년엔 헤르만 헤세, 올해엔 도스토예프스키였다. 한 권 분량이 두 작가가 너무 달라 권 수로는 차이가 나..
감상문. 이번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고 다른 때보다 힘들게 감상문을 쓰면서 다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감상문을 왜 쓰는 걸까?" 지금까지 견지해온 멋쩍은 이유는 "독서의 완성을 위해서"였다. 그냥 한 번 쓱 읽고 지나치는 책은 웬만해선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애써 마음 담아 읽어낸 책을, 나의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날려버리기 싫었다. 아까웠다. 뭔가를 잃는 것 같았다. 또한 나에게 선물로 다가온 책과 그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모든 책이 다 해당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책들을 읽고 나선 뭐라도 남겨야 할 것 같은 절박함이 어느 순간 생겨나기 시작했었다. 나에겐 마침 힘들 때 찾아온 인생의 선물이 독서였다. 내 인생의 나지막한 곡선과 맞물려 그렇게 절박함은 배가..
근력. 글을 읽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이 둘은 서로 상승 효과를 낸다. 읽은 것들은 글을 쓸 때 밑천이 되어주고, 쓴 것들은 글을 읽을 때 보다 넓고 깊은 눈을 열어준다. 많이 읽는 사람이 쓰는 글은 적게 읽는 사람의 글과 다르기 마련이고, 많이 쓰는 사람의 글 읽는 눈은 글을 안 쓰거나 적게 쓰는 사람의 눈과 다른 법이다. 읽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쓰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눈이 있다. 적어도 나에겐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이 둘은 상승 효과만이 아닌 배제 효과도 낸다. 글을 읽기만 하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쓰기만 하고 싶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읽고 싶을 땐 쓰기 싫고, 쓰고 싶을 땐 읽기 싫을 때가 종종 찾아온다. 난 이런 순간..
읽고 쓰는 이유. “왜 그리 독하게 책을 읽으세요? 일도 하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책 읽고 글을 쓰실 수 있으세요? 대단하세요.” 페북에 독후감상문을 올리기 시작하고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재미난 것은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의 말은 감사와 칭찬과 격려로, 누군가의 말은 부러움이나 시기심으로, 또 누군가의 말은 조소 섞인 비아냥거림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주관적인 제 느낌일 뿐이겠지만, 똑같은 말이 이렇게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결국 관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한 두 번 제 글을 읽고 하시는 말씀들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평소에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 지속적으로 비쳐진 제 모습을 제 글과 동일시하기 때문일 ..
글쓰기. 어느덧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글쓰기. 여전히 마음 설레고 즐거운 일이지만, 얼마 전부터 사실 난 한계를 느껴오고 있다.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쓰고 페북을 통해 공개적으로 나누기 시작한 지도 2년이 넘었다. 그 동안 약 150 권 정도의 책을 읽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은 감상문으로 남겼다. 한 주제에 국한된 책만 읽어온 게 아니라서 그런지 다행히 나의 글쓰기는 책의 다양성의 영향으로 단조로운 패턴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양성도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약 100 편의 글이 되니 서서히 고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인 물은 죽음이 예정된 물이다. 한편, 비록 희미하지만, 내 글에서 나만의 필체가 생긴 것 같아 한 동안은 조금 뿌듯하게 여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공식이 되어..
책. 이번 한 달은 어쩌다보니 8권의 책을 눕혀 책장의 가장자리로 보낼 수 있었다. 그 중 7권에 대해선 감상문도 남겼다. 나에겐 감상문을 쓰는 작업이 독서의 마지막 단계다. 책을 다 읽고 가슴에 남아있는 울림과 잔상으로 저자의 의도를 진지하게 한 번은 생각해야만 할 것 같고, 나만이 소화한 부분을 감상으로 표현하여 화답하는 게 작가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어느덧 감상문 수는 거의 100에 가깝다. 예전에 누군가가 내 글은 서평이 아니라고 넌지시 비판 아닌 비판을 했더랬다. 난 서평을 쓰려고 시도한 적도 없었고, 그런 책소개를 해서 뭣하나 싶기도 했으며, 눈을 조금만 크게 떠서 페북세상만 봐도 서평의 천지이기에,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는 건 공해에 가깝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이 생..
2018년 한 해동안 읽었던 책 표지를 캡쳐해서 모아봤습니다. 세어보니 총 56권을 읽었네요. 1년이 52주이니까, 거의 일주일에 한 권 정도 읽은 셈입니다. 이 중 40권은 제가 감상문을 작성해서 페친 여러분과 나누었습니다. 2019년에도 일주일에 한 권씩은 꼭 읽어나가기로 다짐합니다. 꾸준히 감상문 (독후감상문과 서평 사이의 어디엔가 존재할 형식)도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지경이 더 넓어지면서도 동시에 눈이 깊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언젠간 그런 글을 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한 번 읽고 던져버릴 글이 아닌, 독자에게 작은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는 글을 말이지요. 감사합니다.
글쓰기. 하소연하고 싶을 땐 글을 쓰자. 멋지고 완성된 글을 쓰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훈련을 하다보면, 누군가에게 주워담지 못할 말을 일방적으로 내뱉아버리고 난 후에 어김없이 밀려오는 수치와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소연 뿐만이 아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땐 시간을 내어 글을 써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가 되는데, 무엇보다 생각만으로 머물 때 가득했던 감정과 함께 공중에 부유하던 거품이 빠져서 유익하다. 보통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라도 거품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즉, 글을 쓰면 실리를 챙길 수가 있다. 내 것을 만들 수가 있다. 겸손해질 수 있다. 또한 글쓰기는 부가적인 유익이 있는데, 이것은 글을 쓰다가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발전되는..
z축. 내겐, 신학책이 평면이라면 문학책 (그 중에서도 문학고전)은 입체다. 그렇다고 신학책을 폄하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난 그럴만한 자격조차 없다). 신학책은 내게 평면으로 느껴지지만, 입체가 갖지 못하는, 자세한 도면과도 같은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세한 도면이 그려진 종이를 들고 목적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도면 보는 방법을 모르거나, 알아도 경험이 없는 사람은 3차원의 현실에서 그것을 실현해내기가 어려운 법이다. 현실에 살지만 신학 안에만 머무는 신학자들의 괴리나, 교회 안에만 머무는 신앙인들의 괴리는 그들이 도면을 그리지 못하거나 읽지 못해서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평면을 입체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3차원은 공간이다. 평면이 공간으로 되기 위해서는..
캘리포니아 이사 와서 읽은 신학 관련 책 중 내게 흔적을 짙게 남긴 책 top 10. 책 리스트를 간단한 주관적인 코멘트와 함께 정리해 봄. 1.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크리스토퍼 라이트. >>> 하나님나라 복음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맛을 보게 해 준 책. 별개였던 구약과 신약을 하나님나라 복음으로 이어주고 이해하도록 도와준 참 고마운 책. 2. 하나님백성의 선교. 크리스토퍼 라이트. >>>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책. 구약을 통해 하나님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하나씩 짚어준 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답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책. 구약과 윤리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깨닫게 됨. 3. 산둥수용소. 랭던 길키. >>> ..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 지도 벌써 1년 반이 다 되어간다. 연말이고 해서 이사 온 후 읽은 책 리스트를 정리해 봤다. 신학 관련 (신학/신앙/영성) 책이 57권, 문학 (고전/현대) 책이 10권, 철학 책이 2권, 그리고 인문/사회 책이 9권이다. 합치면 78권이다 (내년에는 문학 책을 더 많이 읽을 것이다). 아마 이 정도 숫자는 중학생 때 추리소설에 빠져 지내던 때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 아닌가 싶다. 일주일에 1권 꼴로 읽은 셈이다. 직장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상황 치고는 꽤 많이 읽었다. 성공지향적 가치관으로 얼룩진 나의 2-30대 때, 지난 1년간 읽었던 책의 반, 아니 반의 반만이라도 지속해서 독서에 투자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적어도 지금처럼 설익고 독단독선적인 인격의 소유자가 되어있..
누군가는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읽습니다. 요즘은 페북 세상 덕분에, 서평 쓰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이 허다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유명한 저자의 신간을 먼저 읽고 먼저 서평을 쓰는 데에 열심인 사람도 많더군요. 그들의 능력과 열정을 인정하고 응원합니다만, 그들은 저와는 시작부터가 다른 전문적인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무리 중 하나이긴 합니다만, 제 글은 서평도 아니고 감상문도 아닌, 그 중간 어디 쯤엔가 존재할 것 같은, 정체 모를 아마추어의 글일 것입니다. 주관적인 마음과 생각이 다른 분들의 글에서보다 더 많이 투영되어 있다고 보여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제 글엔 너무 제 자아가 많기도 합니다. 나르시즘으로 비춰지진 않을까 늘 ..
난 글 쓰는 것이 좋다. 잘 써서도, 잘 쓰기 위해서도,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냥 쓰는 게 좋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가 된다. 정리되는 기분이 좋다. 글로 표현되기 전의 생각은 잡념일 때가 많다. 내 것이 아니다. 그냥 구름처럼 떠 있는 조각들일 뿐이다. 물론 그 중엔 꽤 쓸만하거나 아주 창의적인 단편들도 섞여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글로 번역되지 않고서는 그냥 간밤의 꿈처럼 흩어져 버린다. 소중한 것들은 그렇게 처음에는 조각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제멋대로의 모양 때문인지 우린 대부분의 소중함을 놓쳐버린다. 그 조각들은 모두 더 큰 실체의 일부이며, 그 실체는 또한 배후를 가진다. 자신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각인된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과 어떤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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