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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세
정여울 저, '헤세'를 읽고
우리나라에서 정여울만큼 헤세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작가가 또 있을까. 헤세 선집을 두 번째 읽어 나가고 있는 나로서는 정여울 작가를 지나칠 수 없었다. 한국 들어오자마자 '헤세로 가는 길'을 구해서 읽었다. 그 책에서 정여울 작가는 헤세가 거주했던 독일과 스위스를 여행하며 자신만의 단편적인 감상과 해석을 남겼고,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싯다르타‘, 이렇게 네 작품에 대해서는 융의 정신분석학적 통찰을 빌려 전문가다운 서평을 남겼다. 2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그 책을 떠올리면, 헤세의 흔적을 쫓으며 치열하게, 그러나 정갈하게 글을 써낸 정여울 작가의 설렘 가득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헤세를 읽으며 내면의 치유를 경험했고, 헤세를 좇으며 헤세를 파고들었으며, 이젠 헤세를 쓰면서 헤세를 널리 알리는 정여울 작가를 헤세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꼭 한 번은 읽어보길 권한다.
'헤세로 가는 길’은 2015년 출간, '헤세'는 2020년 출간되었다. 5년 만에 정여울은 헤세를 다시 쓰게 된 셈이다. '헤세로 가는 길'이 '여행 중'인 정여울의 글쓰기라면, '헤세'는 '여행을 마친' 정여울의 정리된 글을 읽는 듯했다. arte 출판사에서 기획한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 하나로 헤세가 선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정여울이 가장 적격이었기에 이 책이 만들어지기도 했겠지만, 두 책은 성격이 사뭇 다르기 때문에 두 권 모두 읽어보는 건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대만족이었는데, 특히 '헤세'에는 헤세가 아닌 작가 정여울의 읽고 쓰는 솔직한 생각과 실제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매력 때문에 올해가 마침 다시 5년이 지난 2025년이니 또 다른 컨셉으로 정여울 작가가 헤세를 써주면 좋겠다는 소소한 바람도 가지게 된다.
빛의 스펙트럼에 의한 한국적인 무지개 색 수를 따른 것인지 이 책에서 독자는 헤세의 일곱 분신을 만날 수 있다. 같은 헤세이나 저자에 의해 일곱 가지 다른 성격과 역할이 부과된 헤세의 모습과 그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1부 ‘여행자’에서 정여울은 헤세의 발자취를 쫓았던 여행 기록을 바탕으로 헤세와의 내적 교감을 글로 써낸다. 헤세가 태어난 칼프, 헤세가 가정을 이루고 세 아이를 낳았던 가이엔호펜, 그리고 전쟁 때문에 옮겨가야 했던 스위스 몬타뇰라를 직접 방문하면서 느낀 정여울의 살아있는 감상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페이지 두 문장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토록 애써본 적이 있었던가. 헤세의 흔적을 따라 걸어간 그 머나먼 길은 결국 ‘데미안’의 한 대목이 말하듯 ‘나 자신을 향한 길’이었다.” 사랑하는 한 작가의 삶의 여정을 밟다 보니 그것이 가리키는 목적지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 많은 공감이 되었다. 헤세로 가는 길은 나에게 가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헤세가 삶이라는 여행을 글로 남겼듯 작가 정여울도 그 뒤를 쫓아 고유한 삶의 여행을 글로 수놓고 있는 것 같았다.
2부 ‘방랑자’는 헤세의 초기 작품, 그러니까 ‘데미안’ 이전 작품들에서 도드라진 정착과 방랑의 대립구조를 조명한다. ‘수레바퀴 아래서’와 ‘크눌프’를 깊게 파고들며 에고와 셀프, 의식과 무의식의 대비를 말하고 자유를 드러낸다. 역시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음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만약 당신이 알 수 없는 방향에서 이상하리만치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온다면, 머릿속에서 곡조를 들어본 적 없는 낯설지만 달콤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면, 그 산들바람을, 그 휘파람을 무시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때가 바로 당신 안의 크눌프가 당신에게 잠시 ‘쉬어 가라’고 속삭이는 순간이니. 재산을 축적하고, 명성을 관리하고, 인간관계를 조종하는 정착민의 욕심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가 지닌 것을 돌아보고, 사랑한 흔적들에 만족하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축복하는 삶을 살라는 크눌프의 작은 소원이 당신의 심장에 가닿는 순간이니.”
3부 ‘안내자’에서 저자는 ‘데미안’ 이전과 이후로 헤세를 구분한다. ‘데미안’ 이전의 헤세의 작품세계가 다분히 서정적이고 자연친화적이며 시적이면서 방랑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이었다면, ‘데미안’ 이후의 작품들은 뚜렷한 세계관에 기반하여 쓰였다. ‘데미안’은 하나의 기준점으로써 ‘개성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융의 정신분석학과 깊은 연계를 이룬다. 세상이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새로운 싸움을 개성화라고 정의하면서 정여울은 융의 정신분석학적인 통찰을 빌려 ‘안내자’에 대한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문장을 써낸다. “안내자의 공통점은 친절함이 아니라, 뼈아픈 깨달음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점이다. 그 고통 때문에 우리는 가야 할 길을 거부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길을 거부하면 개성화의 길이 그만큼 멀어진다. 우리가 진정한 나 자신으로 거듭날 기회를 잃을 때마다 또 다른 안내자가 나타나 길을 재촉한다. 헤세에게 융도 바로 그런 안내자였다.” 그리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페터 카멘친트’를 깊게 파고들며 ‘사회화’와 대비되는 ‘개성화’를 더 풍성하게 설명한다.
4부 ‘탐구자’에서 정여울은 ‘데미안’을 주로 다루면서 헤세를 읽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개성화’를 더 깊게 조명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는 여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싱클레어라면 데미안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셀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억눌린 셀프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과정이 바로 개성화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149페이지 마지막 단락에서 내가 밑줄을 그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두 번째는 자신의 무의식이라는 내면의 자궁 안에서. 두 번째 탄생은 오직 ‘의식’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다.”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끌어안고 개성화를 이루는 것은 종교적으로 보면 일종의 구원과도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건 새로운 삶, 부활을 경험한 삶일지도 모른다.
5부 ‘예술가’에서 다뤄지는 작품은 ‘게르트루트’와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바로 예술가가 주인공이라는 점인데, ‘게르트루트’에서는 음악가가,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에서는 화가가 주인공이다. 예술가라는 의미에 대해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와 일맥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예술가의 열정과 혼을 셀프에 빗대고, 타인의 시선을 에고에 빗대어 읽는다면 헤세의 작품세계에서 예술의 의미는 곧 나다운 나를 이루는 DNA 같은 그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헤세는 예술가가 등장하는 작품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동일한 메시지를 내고 있는 것이다.
6부 ‘아웃사이더’가 다루는 작품은 ‘황야의 늑대’다. 내가 몰랐던 사실이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황야의 늑대’ 때문에 헤세는 197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히피들의 우상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에 치를 떨던 사람들은 ‘시민으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한 ‘황야의 늑대’ 주인공 하리 할러에게 열광했다고 한다. ‘황야의 늑대’를 시민이라는 굴레에 억눌린 자유로운 영혼을 끌어내는 작품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환상적인 부분들이 자극적인 도구로 등장하기도 해서 히피들을 더욱 자극시켰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문학작품을 읽는 히피들이라니. 2025년 현재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비하면 그 당시 히피들의 수준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정여울 작가가 쓴 문장이 내가 볼 땐 ‘황야의 늑대’의 의의를 정확히 잡아낸 것 같다. “‘황야의 늑대’에서는 주인공이 죽지는 않지만 주인공으로 하여금 거의 죽음에 가까운 고통과 환각을 겪게 함으로써, 헤세는 ‘주인공의 문학적 죽음’과 ‘작가의 현실적 부활’을 동시에 쟁취해 낸다.” 헤세는 하리 할러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방출했던 것이다.
마지막 7부 ‘구도자’에서는 ‘싯다르타’가 다뤄진다. 저자는 이 작품이 다른 모든 헤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색다른 작품이라고 꼽는다. 나 역시 ‘싯다르타’를 진정한 나를 찾아 나선 여행이라기보다는 사랑을 찾아 나선 여행이라고 읽었다. 주인공 싯다르타가 궁극적으로 다다른 길의 끝에는 사랑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깨달음이나 감정이나 욕망의 초월 그 너머에 있는 가장 숭고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싯다르타’의 핵심 메시지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불교적인 사상도 도가적인 사상도 결국 사랑이라는 한 단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싯다르타를 작품 속에서 만나게 되면 이게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사랑을 통해 인간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이 강력한 메시지가 ‘싯다르타’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곱 챕터를 살짝 훑어봤다. 순서와 상관없이 읽어도 무방하다. 각 챕터가 다루는 헤세의 작품들을 읽지 않고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작품을 다 섭렵한다면 다시 이 책을 손에 들고 읽어 보라고 꼭 권하고 싶다. 헤세를 먼저 알고 경험한 정여울 작가의 글이 더욱 깊고 풍성하게 와닿을 것이다.
#arte
#김영웅의책과일상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6. 데미안:
7. 황야의 늑대: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9. 싯다르타: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14. 헤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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