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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힘

헤르만 헤세 저, '페터 카멘친트'를 다시 읽고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땐 주인공 페터 카멘친트의 성장에 눈이 갔다. 깊은 산골에서 천연의 자연과 동화되어 투박하나 순수하게 자란 한 청년의 내면에 시가 깃들고, 그 시가 사람과 사랑, 삶과 죽음을 경험하며 조금씩 성숙해져 가는 과정에 주목했었다. 특히 글 쓰는 사람, 즉 작가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여서 그랬는지 나는 페터로부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도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나의 외부세계는 물론 내부세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글쓰기모임과 함께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자연의 힘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반면, 페터의 성장 이야기는 예전보다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나 역시 성장하고 성숙했다고 여겼건만, 실은 그저 허무하게 늙어버린 건 아닌지, 혹은 너무 현실적이 되어버려 헤세 특유의 낭만성에 무뎌져버린 건 아닌지 우려가 될 정도로 말이다. 아마도 재독 때의 나는 초독 때의 나와 달리 오십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동안 읽어온 수백 권이 넘는 책들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페터의 근간을 이루고, 페터를 옆에서 든든히 지켜주고, 페터를 성장시킨 자연만은 겹겹의 세월을 뚫고 한층 더 매력적이고 한층 더 응축된 존재로 나를 압도했다. 페터는 지나가도 자연은 오래 남은 것이다. 아마도 자연은 또 다른 페터를 잉태하고 있으리라. 

이 글에서는 역동적으로 살아있고, 또 그 어느 생명체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변화를 끊임없이 겪으면서도 언제나 변함없는 존재로 인식되며, 때론 천재지변의 수괴가 되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고향으로 느껴질 만큼 삶의 보금자리이자 안식처로 각인되곤 하는 자연의 신비한 힘에 대해 페터의 삶을 기반으로 해서 조금 풀어볼까 한다. 

헤세를 읽는다는 것은 자아의 발견, 성찰, 성장, 성숙, 그리고 분열과 합일 과정을 찬찬히 간접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는 예술 (미술, 음악, 글쓰기)과 자연을 치열하게 탐구하고 찬양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헤세의 여러 작품 속에서 다뤄지는 주제를 대변하는 인물의 직업으로 자주 등장하는 반면, 자연은 주로 그런 주인공의 내면에 조용히 영향을 끼쳐 주인공에게 위로와 치유를 선사해 주는 고마운 존재로 등장하는데,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헤세의 데뷔작이라고 알려진 ’페터 카멘친트‘에서 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 작품의 구조를 단순화시켜 볼 때, 페터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한 궁극적인 존재는 그의 단짝이었던 리하르트도, 그의 가슴을 울리며 사그라들었던 아그네스도, 그가 목숨을 걸고 절벽 위에 핀 알펜로제를 꺾어 바치려고 했던 첫사랑 기르타너도, 잔잔한 보트 위에서 사랑을 고백하려고 맘 속으로 시도했으나 할 수 없었던 알리에티도, 그가 그다음으로 사랑을 느꼈으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엘리자베트도, 그에게 사랑과 미덕을 가르쳐준 불구자 보피도, 심지어 그에게 지대한 영혼의 스승이었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도 아니었다. 바로 자연이었다. 이 작품 속에서 말없이 숨어 움직이는 주인공이 자연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페터가 태어나고 자란 작은 산골 마을 니미콘을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산과 골짜기, 그리고 호수가 보이는 것만 같다. 젠알프 봉우리를 오르며 페터의 얼굴에 흐르는 구슬땀과 그것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뜨거운 햇살, 각양각색으로 모양을 바꾸며 페터 위를 계속해서 내려다보며 그를 감싸주는 구름, 페터 옆에 피어있는 수많은 이름 모를 꽃들과 나무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푄 바람까지, 모두가 산과 목장에서 뛰어놀던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며 눈앞에 펼쳐진다. 

페터에게 자연은 친숙함과 온화함을 겸비한 안식이었다. 그 역시 니미콘을 이루고 평생 니미콘에 갇혀 사는 숙명을 지닌 여러 카멘친트 중 하나로 인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지만, 우연찮게 쓴 편지 한 통 덕분에 공부를 하게 되었고 끝내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페터만의 방식으로 우정과 사랑을 경험하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도 받아보고, 생계 걱정도 해보면서 조금씩 성장을 해나가는 과중 중 삐걱거리는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늘 마음의 고향인 자연을 찾았다. 그러면 자연은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 따뜻한 손길로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그때마다 페터는 회복을 경험했고 현실을 버티고 초월할 수 있었으며 조금씩 강인해져 갔다. 자연은 그에게 있어 가장 훌륭한 상담가이자 위로자요 치유자였던 것이다. 

자연은 페터에게 두려움과 경외감도 선사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페터는 자신이 작디작고 유한한 인간이라는 존재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겸손할 수 있었다. 자연은 그가 무릎 꿇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인 존재로 다가갔던 것 같다. 사실 작품 속에서 ‘자연’이라는 단어를 ‘신’으로 바꿔 읽어도 의미상으로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실로 자연은 페터에게 두렵고 떨리는 존재, 그래서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신과 같은 이미지가 아니었나 싶다. 자신을 압도하면서 한없는 사랑으로 끌어안아주는 자연을 힘을 페터는 어릴 적부터 느껴왔으며 그 열매로 그는 시인이 되었던, 아니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인 페터 카멘친트는 자연의 두 가지 속성, 즉 친숙함/온화함 그리고 두려움/경외감으로 빚어진 열매였던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지만, 우리가 흔히 즐기는 자연은 친숙함과 온화함의 속성만을 띠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성장하려는 자는 자연의 두 번째 속성, 즉 두려움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연 앞에 설 필요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자신을 능히 압도하고 초월하는 존재 앞에 홀로 신을 벗고 맨발로 설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한때는 안정적인 세계라 믿었으나 어느새 나를 가두고 있는 우물이 되어버린 나의 작은 지경을 넓히고 넘어서서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첩경은 바로 그 순간을 경험할 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쓰여있지 않지만, 나는 페터 역시 그것을 경험했다고 믿는다. 그것은 곧 내 안에 숨겨진 나를 발견하고 성찰하여 보다 성숙한 나로 설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시기가 다를 뿐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언젠가는 그런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목이 마르다. 나는 다시 압도되길 원하고 무릎 꿇길 원한다. 나를 넘어서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시인이 되고 싶다.

* 헤세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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