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공동체, 곧 사랑의 공동체. 제럴드 싯처 저, '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읽고. 그는 지금도 사고 직후의 순간을 슬로모션처럼 기억하고 있다. 어두워진 시각, 가족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였다. 맞은 편에선 차량 한대가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커브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중앙선을 넘어 그가 운전하던 밴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는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마 영혼에 새겨졌을 정도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충돌 직후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네 살 난 딸과 어머니의 몸은 구부러져 있었다. 의식은 없었다. 즉사였다. 의식이 남아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찌그러진 창문을 통해 아이들을 데리고 차에서 빠..
제자: 습관을 지배하는 자. 제임스 K. A. 스미스 저, '습관이 영성이다 (원제: You are what you love)'를 읽고. 살아가면서 아주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관통하는 커다란 축복 같은 깨달음도 언제나 말초에 있는 손과 발까지 그 힘이 전달되지는 않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머리와 가슴을 통과한 대부분의 뜨거운 피는 손과 발까지 다다르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 운명을 맞이한다 (기억하라, 작심삼일. 우리의 오래된 벗 아닌가). 머리를 먼저 강타한 지성도, 가슴을 먼저 울린 커다란 감성도 모두 체내에서 흡수되지 못한 채 배설물로 폐기처분 되는 현상. 이 비극적인 악순환이 혹시 우리들 일상의 (혹은 영성의) 현주소는 아닐까.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
그림자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는 용기). 황정은 저, ‘百의 그림자’를 읽고. 며칠 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편두통이 말끔히 사라진 오늘, 공교롭게도 날씨가 흐리다. 그림자 하나 생기지 않을 정도로 빛이 자취를 감췄다. 정오 즈음 되니 비도 추적추적 내린다. 모처럼 말끔한 머리로 맞이하는 간만의 흐린 하루. 밖을 나와 비 냄새를 맡으니 이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함께 젖어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의외로 안정감과 편안함까지 느껴진다. N과 일대일 미팅 중이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그녀가 응답하는 사이, 난 오피스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랗고 투명한 창을 통해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조용히 비가 오고 있었다. 순간 뜬금없이 엄마 품에 안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
잃어버린 일상의 조각을 찾아서. 프레드릭 뷰크너 저, ‘주목할 만한 일상’을 읽고. 내가 만약 신이었다 하더라도 진리처럼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가장 높은 곳이나 가장 빛나는 곳이 아닌 오름직한 곳, 먼지가 끼고 빛이 바래 손님을 맞이할 때면 늘 분주하게 빗자루질과 걸레질을 해야하는, 평범하고 소소한 우리들의 ‘일상’ 가운데 감추어두었을 것이다. 버젓이 존재하지만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존재들의 향연. 뒤돌아보면 또 놓쳐버린 아쉬움으로 가득 찬 기억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 매일 우리들을 찾아오지만, 마치 투명인간처럼 우리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 소중한 시간들. 늘 높고 빛나는 특별함만을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무시나 희생을 당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어 한층 낮은 자세로 두 번째 인생을..
잊혀짐. (개인적 제목: 단문의 미학) 크리스토프 바타유 저,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원제: ANNAM)를 읽고. 신형철은 평론가다.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하는 그의 글은 정확하고 예리한 칼이 되어 읽는 이의 머리와 가슴 깊숙한 곳까지 찔러 진지하게 생각하고 깊이 공감하게 한다. 하지만 그의 좋은 글이 내게는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어려웠다. 독서량이 부족해서도, 독서 편식을 해서도, 또 분석적인 글읽기를 못해서도 아니었다. 매주 서점에 들를 때마다 신형철의 책을 집어 들고 한두 페이지를 정독해온 지도 벌써 여러 주다. 여전히 난 적응을 못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했다. 그의 신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끝에 보면, 그가 추천한 도서 목록이 나온다. 그가 직접 쓴 글 말고 그가 ..
역사에서 다시 인간을 보다. 조선희 저, '세 여자'를 읽고.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는 팩션 (faction)이다. 역사적 사실 (fact)이 작가의 상상력이란 옷을 입고 탄생한 소설 (fiction)이기 때문이다. 책 끝머리에서 작가는 “역사기록에 반하는 상상력은 자제했고, 소설이 역사를 배반하지 않도록 주의했다”고 썼다. 책에 이름 석 자로 등장한 사람들은 모두 실존인물이다. 정확하게 표기된 날짜들은 모두 실제 역사기록이다. 역사도 해석의 산물이기에, 더군다나 불완전하며 불연속적인 기록의 파편들로 짜깁기될 수밖에 없는 시대를 다루고 있는 책이기에, 작가가 이 책을 쓰는 입장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실로 방대한 연구와 고증 절차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작가가 이..
바울을 이해하기에 좋은 길잡이. 존 M. G. 바클레이 저, '단숨에 읽는 바울'을 읽고.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사탕을 준다고 해서 교회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네 식구였던 우리 집은 전세에 단칸방이었다. 사탕 같은 간식은 내겐 아주 귀했다.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난 그 교회를 계속해서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친구는 얼마 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대로 교회 다니는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가문에서 처음으로 소위 '예수쟁이'가 탄생한 것이었다. 동시에 내겐, 이젠 30년이 넘는, 하나님을 향한 굴곡진 여정의 시작이었다. 사탕 하나로 이 기나긴 여정이 시작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내가 다니던 교회 (예장 합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게 저, '미움 받을 용기 2'를 읽고. 이 책의 전작, '미움 받을 용기'에서 청년은 철학자를 통해 아들러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깨달음을 얻은 뒤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과거의 덫에 얽매이지 않고 미움 받을 용기와 행복해질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지금, 여기'를 살아내기 위한 새로운 결단도 내렸다. 그것의 일환으로 청년은 자신의 열등감이 얽혀있던 직업을 그만두고, 아직 인생의 때가 묻지 않은 아이들에게 아들러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러나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했던 탓일까? 의욕이 넘쳤던 청년은 아이들 교육 분야에서만큼은 아들러의 가르침이 엉터리이고 속임수이며, 심지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단정짓게..
정확하고 아름다운 필체가 순수함을 담아낼 때. 막스 뮐러 저, '독일인의 사랑'을 읽고. 지난 주말도 가족과 함께 중고 서점에 들려 많은 책들에 둘러싸인 채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이런 생활도 벌써 수 개월째 지속하고 있으니, 어느덧 우리 가족의 일상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난 일상에 흩어진 행복의 조각을 찾는 듯한 심정으로 매주 이 시간을 기다린다. 늘 여러 책을 뒤적거리지만, 서점에 들어서서 항상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매주마다 새로운 책이 눈에 띄는데, 저번 주는 아주 오래된 고전 하나가 내 관심을 끌었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중학생 시절, 어머니 덕에 문학을 알게 되어 한동안 고전문학에 빠져있을 무렵 접했던 책 중 하나였다. 아주 ..
작지만 겸손한 내러티브들의 향연. 양희송 저, '세계관 수업'을 읽고. 자신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오면서 심각한 모순이나 갈등에 부딪혔던 경험이 있다는 증거다. 세계관은 의식세계 이면에 존재하기에, 무엇이든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차원적인 세상에선 그 존재를 자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우린 숙명처럼 낯설고 불편한 세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 동안 별 문제 없었던 ‘나’만의 작은 세상에서 드디어 ‘너’와 ‘우리’, '그들'로 이루어진 큰 세상을 만나게 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위계질서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뉜 채, 섞이지 않는 혼합물처럼 어쨌거나 다수와 함께 살아간다.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한 이 '다양성'이라는 무시 못할..
'낯섦'을 환대하며 하나님 알아가기. 김동문 저,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구약편'을 읽고. 성경은 모든 답을 알려주는 마법 책이 아닐 뿐더러, 인간의 성공과 번영을 위한 참고서도, 또 자기계발서도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 사이에 생긴 관계의 단절, 그 단절로 인한 결과, 그리고 그 불가항력적인 결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 회복의 메시지가 담긴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목적은, 김근주 교수의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에서도 강조되듯,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가 참이라면,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도 참이다.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안위와 유익만을 위해 보험이나 부적 같은 용도로 ..
겸손의 뿌리. 한나 앤더슨 저, '겸손한 뿌리'를 읽고. 하나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을 닮고, 또 닮으려고 노력하며, 실제로 닮아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과정에 죄가 개입했다는 사실도 우린 익히 알고 있다. 인간의 타락이 묘사된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인간은 뱀의 거짓말에 마음이 동하여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어긴다. 모든 짐승 중 가장 간교한 뱀은 선악과만 따먹으면 인간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뱀 덕분에, 자신은 피조물이면서도 조물주와 같아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하나님을 닮는 정도가 아니라 같아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은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소위 '원죄..
**오랜만에 감상문 하나 올립니다. 다양한 책을 읽으려 시도하는 중이기도 하고, 턱 하니 감상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주는 책을 만나지 못했던 탓인 것 같습니다.** 용기의 역설로 찾는 행복.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게 저, '미움 받을 용기'를 읽고. ‘과장은 열등감의 표출’이고, ‘열등감과 오만함은 교만의 두 얼굴’이라는 분석은 인간관계로부터 숱하게 치이고 당하면서 맘 속에 쌓여온 차마 말 못할 설움과 함께 비싼 값을 치르고 얻어낸 나의 인간심리에 대한 통찰이다. 충분히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의 심리라는 것 자체가 어떤 방정식의 결과가 아니기에, 인간관계로부터 고민을 해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공감하고 납득할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일주일 전, ‘모든 고민은 인..
**작년 말 아내에게 선물 받은 헤세 선집 중 마지막 열 번째 책의 감상문입니다**소원 하나 성취했습니다**제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Yay!** 카스탈리엔의 빛. 헤르만 헤세 저, ‘유리알 유희’를 읽고. 살아가면서 우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 생을 마감할까.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알고 사랑하고 섬겼다면 그 인생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이 만남이고 만남의 가치가 양이 아닌 질에 있다면, 의미 있는 인생이란 깊이 있는 교제와 그 사람에 대한 깊고 풍성한 앎에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숨쉬며 서로의 이름을 알고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론 스킨십을 나누면서 오감을 길들이는 것이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반적인 방법이겠지만, 점점 각박해져 가는 현대를..
공감: 고통의 정서적 문제에 대한 답. C. S. 루이스 저, ‘헤아려 본 슬픔’을 읽고. 어쩌면 우린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철이 들고 어른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슬픔은 고통스럽고, 고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빙빙 도는 원과도 같다. 그러나 ‘나’에 갇히지 않고 나를 넘어 남에게로 향하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슬픔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지 못한다면, 나의 고통과 슬픔은 내 안의 나를 더욱 키울 뿐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고통과 슬픔은 우리가 늘 두려워했던 것, 즉 ‘자멸의 무기’가 될 수 있다.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는 과정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타인을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은 목적일 것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눈에 비춰진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을 살아내는..
의심을 환대하기. 피터 엔즈 저, '확신의 죄'를 읽고. 의심은 예고도 없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간다. 사소하고 우연한 일상의 조각들도 모두 의심의 통로가 될 수 있기에, 우린 달갑지 않고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한 이 손님의 방문을 결코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의심은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이다. 이 방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주무시지도 않고 성실하신 의심님의 공격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외부로부터의 모든 공급이 차단된 채 안에서 곪거나 굶어서 자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불청객을 오히려 환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의 단점은 무너지는 것이 결국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버티는 동안은 자신이 견고하게 쌓아왔던 믿음의 성벽..
인간의 고통 이면에 계시는 사랑의 치료자 하나님의 손길. C. S. 루이스 저, '고통의 문제'를 읽고.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피조물들의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이 물음은 하나님의 선함과 전능하심에 대한 의심을 유도하며, 신정론과 함께 아주 오래된 질문입니다. 루이스는 고통이 야기하는 이러한 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책, '고통의 문제'를 썼다고 합니다. 그의 날카로운 변증이 잘 드러나있는 이 책은 고통의 문제를 바로 다루기 위해 먼저 기독교의 기원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 설명에 이어 인간의 악함과 타락에 대하여 고찰한 후, 마지막으로 고통의 의미를 풀어주고 있습니다. 비록 술술 읽히진 않지만, 텍스트 속에 담겨있는 그의 명징한 논리는 이를 이..
눈먼 자들을 통해 본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주제 사라마구 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산둥 수용소’에서 랭던 길키는 인간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충분히 넘어서며 그것들보다 더 깊이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심’을 보고한다. 그리고 그 ‘이기심’은 책에서 인간의 ‘죄’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그 책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도 취할 수 있으며 나중엔 그 행동까지도 합리화해버리는 존재였다. 인간의 관대함과 인격적 성숙이 한낱 껍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그 껍데기 안에는 이기적이고도 위선적인 자아가 숨어있어 언제든 상황이 허락할 때면 즉시라도 고개를 쳐들고 큰 소리를 내어 단번에 인간의 ..
살아낸다는 것.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신성모독과 음담패설 등이 취미인 것 같은 망나니, 육욕에 충만하여 정신적 세계를 단박에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리는 방탕한 이단, 말초적 쾌락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이 된듯한 그에게서 왜 난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떠올렸던 것일까. 성육신이야말로 그가 말로 주장하고 삶으로 보여주었던 것들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거룩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혹시 바로 여기에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숨은 역설이 담겨있는 건 아닐까? '나'라는 화자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의 주인공 이름은 '조르바'이다. 이 책은 화자가 조르바를 만나면서부터 그가 죽기까지의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짜여져 ..
논리를 넘어서는 은혜. C. S. Lewis 저, ‘예기치 못한 기쁨 (원제: Surprised by Joy)’을 읽고. 기독교 변증가로 잘 알려진 C. S. Lewis의 삶이 온통 기독교적인 색채들, 이를테면 말씀 듣고 읽고 묵상하고 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행위들로 가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허다한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의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던 그이지만, 실상 그는 목사나 신학자도 아닐 뿐더러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릴적부터 신앙심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태어나는 시대와 장소를 선택할 수 없었기에 북아일랜드의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을 뿐, 머리가 조금씩 크면서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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