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감상문이 아닙니다. 책을 1/3 가량 읽고 묵상하다가 끄적거린 글입니다.** 신앙의 여정: 사귐이 있는가? 김영봉 저, '사귐의 기도'를 읽으며. 몇 달이나 꽂혀 있었을까. 며칠 전, 새롭게 읽을 책을 하나 고르려고 뻔한 내 책장을 찬찬히 훑는 순간, 이상하게도 내 눈은 김영봉 목사의 ‘사귐의 기도’에서 멈췄다. 예전에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이후 책장에 꽂아두고 한 번도 끄집어낸 적이 없던 책이었다. 항상 다른 책에 우선순위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나로선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던 경험이라, 책을 꺼내어 앞부분을 들춰보다가 순식간에 수십 페이지를 읽고 나서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 잠시 책을 덮고 조용히 묵상하며 나의 내면세계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되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었을 무렵, 고질적으로 ..

이성과 믿음의 조화로 온전한 신앙을. 레프 톨스토이 저, '고백록'을 읽고.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성을 향한 한낱 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성에 천착한 사람은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엄연한 질서를 가지고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의 또 다른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언젠간 대면하게 된다. 반대로, 이성을 배제한 믿음만으로 무장한 사람 역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믿음인 줄 알았던 것의 실체가 자신의 미련한 고집이었음을 언젠간 발견하게 되고, 그 고집으로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며, 사람들로부터는 오히려 무분별하다거나 ‘나누는 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어 맹목적인 사회악으로 자리매김하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성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인생을 마..

현장의 눈으로. 김동문 저,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신약편’을 읽고. 구약편에 이어 6개월 만에, 기다리던 신약편을 만났다. 이번엔 가능한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자칫하다간 금새 또 빨려들어가 한 시간 이내에 다 읽어버릴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 시간 정도에 걸쳐 다 읽어버리고, 지금은 이렇게 여전히 입맛을 다시고 있다. 그림과 글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비록 단편적이지만 성경시대를 독자의 눈 앞에 펼쳐주는 이 책은, 구약편에서도 그랬듯, 참 아쉽기만 하다. 만화 형식이 가미되어서인지, 그림이 주는 시각적 효과 때문인지, 몇 문장 안 되는 글들이 심금을 울려서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구약편에 이어 신약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읽고나서 똑같은 갈..

‘웅깃’에서 ‘프시케’로 (각색한 신화에서 복음을 추출하다). C. S. 루이스 저,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를 읽고. 난해한 이 소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유명한 그리스로마신화, ‘큐피트와 프시케’ 이야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루이스가 그 신화를 각색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에로스’로 알려진 사랑의 신 큐피트는 미의 여신 비너스 (헬라어로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어느 날 비너스는 인간들이 자신에게 경배하러 오는 발걸음이 갑자기 줄어든 원인을 알게 된다. 인간세상의 세 공주 중 막내인 프시케의 아름다움 때문에 인간들은 굳이 비너스를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비너스는 금새 질투와 분노에 휩싸였다. 그래서 아들인 큐피트에게 세상에서 가장 추한 존재와 프시케가..

나는 누구의 제자인가? 달라스 윌라드 저, '하나님의 모략'을 읽고. 2013년 5월,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곳,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에서 그는 생을 마감했다. 향년 77세였다. 77년생인 나는 그가 타개한 지 7년째에 접어들던 지난 달부터 약 3주 간에 걸쳐 그의 대표작인 ‘하나님의 모략’을 읽어냈다. 짧은 기간이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깃든 그의 숨결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비록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직접 대면할 수 없겠지만,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가르침은, 이미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믿음의 선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수의 제자로 살길 소망하는 나에게도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그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철학적 관점으로 ..

치유와 새로운 시작. 무라카미 하루키 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두 명의 여학생과 세 명의 남학생. 언뜻 봐도 짝이 맞지 않는다. 남학생 하나가 남기 떄문이다. 또 하나, 공교롭게도, 다섯 중 하나만 자신의 이름에 색이 없다. 나머지는 모두 이름에 색을 의미하는 단어가 들어있다. 레드, 블루, 화이트, 블랙. 그러나 그의 이름에만 색이 없다. 그의 이름은 다자키 쓰쿠루. 색채가 없는 이름이다. 운명이었을까. 대학에 진학할 무렵, 다섯 명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고 유지되었던 도시 나고야를 떠나 그는 홀로 도쿄로 진학하게 된다. 그 결과, 나고야엔 다섯이 아닌, 넷이 남게 되었다. 그들이 대학교 2학년이 되기까진 공간만 떨어져있을 뿐 모든 게 똑같다고 여겨졌다..

"미안하지만 나는 환대로 정의를 노래하련다." 강남순 저, ‘정의를 위하여’를 읽고. “All are welcome.” “모든 사람을 (혹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나도 인간이다. 그래서 위의 문장 속 ‘모든 사람’ 혹은 ‘누구나’에 포함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왜 난 이 당연한 말을 듣게 될 때면 (특별히 교회 안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까? 마치 환영 받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마치 그 동안은 환영 받지 못했던 것처럼. 아마도 사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모든 것은 정치적’이라는 말에서처럼,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속한 시대와 장소, 그리고 그것들을 빼곡히 이루고 있는 인간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적인 감정뿐만이 아닌 구조적인 무언가가 내 가슴을 터치했음을 ..

참담한 현실인 한국의 구조악: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고발/고찰하기. 정희진 저,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이 책은 비유나 상징이 아닌,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저자의 직접적인 해석과 더불어, 가부장제 문화에서 습관처럼 배제되었던 여성과 소수자의 시각을 되살려내는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정상적인’ 해석의 편협함과 그 안에 내재된 폭력성을 드러내는 재해석 작업, 그리고 그로 인해 젠더나 성별 이슈를 넘어 인식의 모든 대상에 대한 대안적 인식론을 우리 모두가 가지기를 소원하는 저자의 한이 가득 담긴 글의 모음집이다. 실제 저자는 페미니즘을 ‘지식의 형성 과정, 권력의 작동 지형과 역사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학문이자 실천’으로 정의하며, 여성학이나 여성주의라는 명칭조차도 생물학적 여성에..

상실과 믿음: 집으로. 얀 마텔 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읽고. 단 일주일 만에 토마스는 어린 아들과 아내, 아버지를 차례대로 잃는다. 이후 그는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뒤로 걷기 시작한다.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발하기 위해서다.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긴 마당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반발밖에 없었다. 박물관에서 보조로 일하는 토마스는 어느 날 박물관에 기증된 유물들의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성공회 기록 보관소로 파견된다. 거기서 그는 리스트에서 누락된 얇은 책을 발견한다. ‘율리시스’라는 신부가 쓴 일기였다. 그는 그 일기장에 곧 빠져들었고, 율리시스 신부가 포르투갈의 식민지 섬, '상투메'에 머물 당시 쓴 글에 매료된다. “이곳이 집이다. 이곳이 집이다.” 이 짧은 문장은 여러 페이지에 ..

예수 왕의 복음: 개인구원을 위한 천국티켓을 넘어서. 스캇 맥나이트 저, ‘예수 왕의 복음’ (새물결플러스 출판)을 읽고. 사영리식 전도의 목적은 영혼 구원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 결단을 위해 전도자는 피전도자를 설득해야 한다 (선포가 아닌 설득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설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에 따른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그래서?” 하는 무관심한 반응과 “정말?” 하는 관심의 반응이다. 물론 전도자는 후자의 반응을 기대한다. 일단 전도자는 피전도자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로 작정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상황이다. 시나리오대로 피전도자의 반응이 나와준다면,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 더 구원하는 셈이..

누가 백치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치’를 읽고. ‘백치’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한영사전에선 ‘(informal) idiot, (offensive) moron, (offensive) imbecile’로 설명되어있다. 즉, ‘백치’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만약 누구든지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충분히 모욕적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설사 실제로 뇌에 의학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의학용어가 아니기에, 결코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는 단어인 셈이다. ‘죄와 벌’에 이어 이번에 읽은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소설 중..

“배운다, 고로 존재한다 (I learn, therefore I am).” 강남순 저, ‘배움에 관하여’를 읽고. 정착이 가져다 주는 안정감이 있다. 떠남이 일상이 된 나그네의 비애는 보장된 내일이 없다는 안정감의 결여다. 하지만 여기서 ‘안정감’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안정감이란 것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안정할까?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독특하게 구별되는 이유를 한 문장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인간은 결코 육체적인 필요 (이를테면 의식주 문제)가 채워지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평생 욕구불만족 상태로 살아가는 비극적 운명을 지닌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 지구상 유일한 생..

데니스 O. 라무뤼 외 저, '아담의 역사성 논쟁'을 읽고.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이나 갈등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인류의 기원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자연스럽게 아담이란 존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자칫 발칙하거나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 의문은 기존에 아무 의심 없이 가지고 있었던 우리들의 믿음과 확신을 재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인류의 기원이 기록되어 있다고 보는 창세기 앞부분을 무언가 놓친 게 있나 스스로 반신반의하며 수없이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그 부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직접 능동적으로 찾아보기도 합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 순간이 기존 교회 안에서 담을 수 없었던 기독교 영역을 처음으로 접하는 계기가 ..
평범한 삶: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존 윌리엄스 저, '스토너'를 읽고. 새로운 작가의 글, 처음 만나는 세상, 가슴 설레는 기쁨. 하지만 이런 것들도 잠시. 어느새 난 책 속에 빠져들어 책의 일부가 된다. 더 이상 가슴 설레는 구경꾼이 아닌, 그 세상의 일부가 된다. 내겐 낯설기만 한 시공간,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세상에선 나만 이방인이다. 그곳에서 난 바라보고 듣고 느끼는 일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난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외적인 사건과 내적인 의식의 흐름까지도 파악해가는 유일한 자리를 꿰찬다. 그렇게 난 그 낯선 세상에서 어느덧 신적인 이방인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기꺼이 또 다른 한 권의 책의 독자가 되어 또 다른 낯선 세상을 여행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첫 번째 작품 '죄와 벌'을 읽고 쓴 감상문입니다. 워낙 방대하고 심오한 작품이라 감히 서평이라든지 감상문을 쓴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글도 참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더 넓어지기 위한 과정이라 믿고 느리더라도 지속해서 전진하겠습니다. 응원 부탁드립니다.** 사랑: 파괴된 관계에 구원이 임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죄와 벌'을 읽고. 찌는 듯이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해질 무렵,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미 수십 번이나 머리 속에서 계획했던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사전 답사를 가는 길이다. 대상은 전당포 주인이자 고리대금업자였던 한 노파였고, 살인 도구는 도끼가 될 예정이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나도 세속성자다. 양희송 저, '세속성자'를 읽고. '가나안 성도'에 합류한 지 반 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어느 특정한 제도권 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채 여러 교회를 방문하며 사뭇 다른 예배 스타일을 접하기도 하고, 주일성수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 물으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일요일을 보내기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그러니까 1980년대 중반부터 교회라고 불리는 잘 지어진 독립된 건물에서 거의 매주 일요일, 상당한 시간을 보내온 나로선, 또한 한때는 교회오빠였고, 성인이 된 이후엔 차세대일군이나 리더로 불렸던 젊은이였으며, 나중엔 안수집사직까지 제의 받았던 나로선, 교회를 스스로 걸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시간만 생각해도 30년이란 세월은 교회 ..
죽음 앞에서. 시바타 쇼 저,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읽고.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그저 화려한 옷과 같다면, 그 옷을 벗게 되는 날, 나는 누구일까? 벌거벗은 몸으로 흙이 되는 날, 나는 무엇일까? 내가 부숴지고 갈아지면, 나는 과연 무슨 맛을 낼까? 죽음 앞에서 진지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음의 탄환은 단 한 번도 육체를 빗나간 적이 없다. 죽음은 궁극의 승리자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날만이 아니다. 우린 살아가면서도 죽음을 경험한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겐, 언젠가는 적어도 한 번 이상,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꺾이고 무너지고 부숴질 시기.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날 때다. 이 책,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서,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사노'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문..
뒤늦은 묵념. 한강 저,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작가 한강은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 그녀가 여전히 국민학생이었던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선 전두환의 지휘 하에 수많은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다. 5.18 민주화 운동, 광주항쟁이라고도 불리는 사태다. 한국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도 잊혀지지도 않을, 치명적이고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보다 30년 전에 벌어졌던 6.25 한국전쟁 역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적어도 그땐 민간인들을 학살할 목적으로 나라가 군을 동원하여 탱크를 앞세우고 총검을 휘두르진 않았다. 그러나, 믿을 수 없지만, 1980년 5월 18일은 그랬다. 군의 일방적인 살육 행위였다. 불의와 폭력과 탐욕이 인간을 지배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상처 입은 공동체, 곧 사랑의 공동체. 제럴드 싯처 저, '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읽고. 그는 지금도 사고 직후의 순간을 슬로모션처럼 기억하고 있다. 어두워진 시각, 가족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였다. 맞은 편에선 차량 한대가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커브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중앙선을 넘어 그가 운전하던 밴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는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마 영혼에 새겨졌을 정도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충돌 직후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네 살 난 딸과 어머니의 몸은 구부러져 있었다. 의식은 없었다. 즉사였다. 의식이 남아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찌그러진 창문을 통해 아이들을 데리고 차에서 빠..
제자: 습관을 지배하는 자. 제임스 K. A. 스미스 저, '습관이 영성이다 (원제: You are what you love)'를 읽고. 살아가면서 아주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관통하는 커다란 축복 같은 깨달음도 언제나 말초에 있는 손과 발까지 그 힘이 전달되지는 않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머리와 가슴을 통과한 대부분의 뜨거운 피는 손과 발까지 다다르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 운명을 맞이한다 (기억하라, 작심삼일. 우리의 오래된 벗 아닌가). 머리를 먼저 강타한 지성도, 가슴을 먼저 울린 커다란 감성도 모두 체내에서 흡수되지 못한 채 배설물로 폐기처분 되는 현상. 이 비극적인 악순환이 혹시 우리들 일상의 (혹은 영성의) 현주소는 아닐까.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