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아내에게 선물 받은 헤세 선집 중 여덟 번째 책의 감상문입니다.** 하나의 색을 넘어 하나의 빛을 향하여. 헤르만 헤세 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스펙트럼 중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의 시작과 끝, 그리고 희망의 약속이 담긴 무지개 색의 시작과 끝. 우린 빨간색을 좋아할 수도 있고 보라색을 좋아할 수도 있으며, 빨간색이 될 수도 있고 보라색이 될 수도 있다. 단, 기억해야 할 두 가지는 두 색 모두 하나의 빛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보이지 않는 빛의 영역이 보이는 영역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짧은 나머지, 그나마 드러난 현존재 격인 가시광 영역의 다양함과 다채로움조차도 모두 맛보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는 숙명을 지닌다. 빛 자체가..
저주의 쇠사슬을 끊고. J. D. 밴스 저, ‘힐빌리의 노래’를 읽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공감할 수 있다. 크든 작든 공통된 경험이 없다면, 상호 간의 소통은 어렵기 마련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으로라도 독자가 저자를 공감하지 못하면, 독서 자체는 노동이 되어 버리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특히 그 책이 회고록이라면 더욱 그렇다. 공감 없이 끝까지 읽어내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힐빌리의 노래’라는 책을 읽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한 백인 남성의 인생을 공감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긴 하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짧은 시간 끝까지 읽어내도록 만들었을까? 내게 있어 첫 미국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근교다. 쉐이커 ..
악은 질병일까? 스캇 펙 저, '거짓의 사람들'을 읽고. "악은 질병일까? 치료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이질감이 먼저 느껴지는 건 아마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신학적으로 아주 오래된 문제인 '악의 존재와 근원'에 대해서 질문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명쾌한 답이 없지만, 그래도 이 질문은 꽤 익숙하기라도 하고, 의미 있는 사유거리로도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악을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본다는 관점이 낯설게만 느껴진 것은, 그만큼 우리가 '악'을 인간이 다루거나 조절할 수 없는 어떤 상위 개념으로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다. 악은 과학적인 접근이기보단, 아무래도 우리에겐 형이상학적인 접근으로 다가서야 하는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여러 사람들..
제자리. 생텍쥐페리 저, '야간 비행'을 읽고. 늦은 밤, 아직도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아내의 전화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아들은 감기 기운이 있는지 아침부터 코를 훌쩍댄다. 몸도 마음도 무겁다. 나 역시 점심을 거르면서 또 하루를 살아냈다. 하지만,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이렇게 늘 있던 자리에 와 있다. 아내도 두어 시간 후면 올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제자리에 있게 된다. 나는 그제서야 다리를 뻗고 잠을 청할 수 있을 테다. '제자리'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제자리는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 아니, 지켜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가만히 멈춰있는 곳이 아니라 또 다시 돌아온 곳이다. 그러므로 제자리는 결코 정적이지 않다. 거기엔 보이지 않는 희생과 부단한 노력이..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유진 피터슨 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IVP 출판)을 읽고. 정갈하면서도 뼈가 있고,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을 만난다는 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커다란 행운이다. 그 글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보석 같은 메시지를 들추어내어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때보다 더 큰 신선함과 놀라움, 그리고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을 조용히 전달해주는 글. 난 이런 글을 만날 때면 어느새 경건한 자가 되어 한층 더 낮아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마침내 나를 넘어서는 기로에 서게 된다. 벽을 뛰어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
**작년 말 아내에게 선물 받은 헤세 선집 중 일곱 번째 책의 감상문입니다. 한 달동안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장 그르니에와 카뮈를 짧게 책으로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겐 헤세가 더 잘 와닿습니다. 한 달만에 돌아온 헤세의 맛은 참 좋았습니다. 조금 슬프기는 했지만요.** 두 개의 심장. 헤르만 헤세 저, '로스할데'를 읽고. 책을 덮고, 아들을 향한 나의 마음은 주체할 수 없는 사랑과 함께 후회와 반성으로 벅차올랐다. 태어난 지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들은 간질병 진단을 받았었다. 아직 젖도 끊지 않았고 말도 못하는 갓난아이에게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형벌과도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상징후가 발견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아들에게 부모인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
공공성: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다. 김근주 (김근주 (Keunjoo Kim)) 저, '복음의 공공성'을 읽고. 서론에서부터 김근주 교수는, 만약 기독교인들이 정치와 구별하여 개인의 영적 문제에 치중하는 것을 옳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견해라고 명료하게 밝힌다. 특히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마치 영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과 다름 없는 한국 교회의 분위기는 이를 잘 뒷받침하는 듯하다. 정치 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만을 마치 복음의 전부인 듯 부각시켜, 다른 것들은 모두 영적이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 그 동안 많은 교회는 복음을 사적인 영역에 가두었고, 교인들에게는 바울의 칭의 개념만을 강조하여 개인구원론을 복음의 전부인 것마냥 가르쳐왔다. 그러나 ..
**작년 말 아내에게 선물 받은 헤세 선집 중 여섯 번째 책의 감상문입니다.** 남에게로 향하는 삶. 헤르만 헤세 저, '크눌프'를 읽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가?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눈 앞에 펼쳐지는 낯선 세상, 그리고 비로소 대면하는 익숙하고도 낯선 자아. 함께 떠난 여행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우린 혼자 떠난 여행에서 선물로 받아오곤 한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은 피부와도 같았던 견고한 보호막을 깨부수고 나오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엔 아픔이 동반되기 마련이며, 때론 그로 인해 깊숙하고도 치유되지 않을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대개는 상처가 아닌 치유로 수렴한다. 여행에서 돌아온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
회복된 하나님백성의 삶, 윤리로 번역되다. J. 리처드 미들턴 저, '새 하늘과 새 땅'을 읽고. 학창 시절 내가 배운 '구원'의 의미는 예수 이름 믿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법정적 선언이었다. 죽어서는 썩어질 몸을 떠나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 천국이라는 곳으로 영원히 죽지 않을 나의 영혼만이 올라가 영원토록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루하루를 살게 될 것이라고 배웠다. 거기엔 아픔도 슬픔도 없다고 했다. 현실처럼 아등바등 살 필요도 없다고 했다. 길 가에 주렁주렁 열려있는 사과나 따먹으며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배움의 결과, 어릴 적 자연스럽게 내 머리 속에 그려진 천국의 이미지는 모두 흰 옷을 입고 늘 하프나 켜며 영원히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곳이었다. 그..
하나됨: 공존과 대립을 넘어. 헤르만 헤세 저, '황야의 늑대'를 읽고.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스펙트럼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빛도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빛보다 더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인간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프리즘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하나의 몸과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 여러 개의 자아로 분열하게 되는 걸까? 그 분열된 자아는 전체 자아의 일부일까, 아니면 그들 자체가 수많은 작은 전체들의 집합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그렇게 분열된 자아들이 모여 이룬 하나의 큰 자아일까, 아니면 여러 자아들이 뒤섞인 채 그저 하나의 몸에 갇혀 있는 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헤세는 소설을 통하여 과감히 자아를 분열시킨 후 대립적인 성향을 지닌 등장 인물들에게 그의..
나에게도 두 세계가 있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많은 것들이 버려졌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주변 환경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나의 내면의 변화가 컸다. 심이 깊게 박힌 티눈처럼 내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성공지향적 가치관이 비로소 그 뿌리를 드러내고 참혹히 잘리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 버렸다. 그 죽음이 끝일 것 같아 온 힘을 다해 버텼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유아적 생명은 죽어야만 했던 세계였다. 죽지 않았다면 나는 끝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견고한 알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내 모습을 본다. 예전보다 편안해진 모습이다. 조그만 우물과도 같았던 알 속에서 마냥 조급하기만 했던 내가 부끄럽다. 그렇다.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
**작년 말 아내에게 선물 받은 헤세 선집 중 네 번째 책의 감상문입니다.** 성장 - 시인에서 인간으로. 헤르만 헤세 저, '페터 카멘친트'를 읽고.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쉬지 않고 일한다. 끊임없이 들어주고, 끊임없이 말해준다. 자연은 찾는 이에게 훌륭한 상담가인 것이다. 페터를 붙잡아 주었던 존재도 사람이 아니었다. 장엄하게 늘어선 산맥과 첨탑처럼 솟아오른 산봉우리, 그리고 그 위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구름이었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그에게 안식을 주었고, 난해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었으며, 잠자고 있던 그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선생이었다. 변함 없지만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자연은 그렇게 페터를 맞이했고 또 성장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사랑..
나를 넘어서. 헤르만 헤세 저, '게르트루트'를 읽고.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모진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우린 이런 면에서 커다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올해 들어 세 번째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게르트루트'에서 난 또 다른 헤세의 자아와 그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소설 '게르트루트'는 '쿤'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음악가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다. 헤세는 이 소설 속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쿤'과 오페라 가수인 '무오트'로 분열하여, 자아의 스펙트럼 중 ‘예술가’라는 하나의 채널을 선택하여 증폭시킨다. 그러면서도 그 채널을 역으로 타고 프리즘을 거슬러 올라가 빛의 근원에 도달하려고 시도한다. 거기..
진리를 찾는 구도자. 헤르만 헤세 저, '싯다르타'를 읽고. 평일에 팔다리가 피곤해질 때까지 일을 한 사람들에게 휴일은 더욱 축제처럼 느껴진다. 일상을 잃어본 사람은 일상의 위대함에 전율하기 마련이다. 순식간에 망각은 착각이 되고, 착각은 깨달음이 된다. 보람과 성취감, 그리고 경이감, 이름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는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된 행복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이런 소중한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우리를 찾아왔다가, 아쉬워할 새도 없이 순례자처럼 사라져 버린다. 깨달음은 어느새 착각으로, 착각은 다시 망각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 인간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진리를 찾기 위한 인간의 역사는 곧 철학과 신학의 역사다. 진리가 본질적인 가치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인간은 그것을 찾..
**올해는 신학 관련 도서들을 새롭게 구입해서 읽는 방법 말고도 이미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방법도 사용할 계획입니다. 신학적인 배경이 전무한 아마추어라 예습보단 복습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새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단,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며 제대로 이해한다면 신학적인 안목을 갖는 저의 목적에 더 빨리 이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은 저의 다시 읽기 시리즈의 첫 책을 읽고 쓴, 서평과 감상문의 중간 어디 쯤 있을 것 같은 글입니다.** “사리사욕을 위한 성경읽기를 파면한다!” 김근주 (Keunjoo Kim) 저,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를 읽고. 다들 한 번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새해를 맞아 적어도 한 번 이상 성경을 읽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
누가 한스를 죽였는가. 헤르만 헤세 저, ‘수레바퀴 밑에’를 읽고, 밤 9시가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혼내주기 위해 아버지는 오랜만에 분노의 회초리를 들었다. 그렇지만 같은 시간, 아들은 멀리서 이미 주검이 되어 차디찬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억압의 상징인 수레바퀴 밑에서 기어이 한스는 죽음을 맞이했다. 한스 기벤라트는 재능있는 아이였다. 시골 마을에서 유일하게 주 시험에 응시하여 차석으로 신학교에 입학하는 영예를 누릴만큼. 한스의 합격은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학교 교장의 명예였으며, 마을 목사의 자부심이었다. 한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그는 주위의 칭찬과 격려에 순응적이었다.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며 성공의 피라미드에 오..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 브레넌 매닝 저, '부랑아 복음'을 읽고. 얼마나 오죽했으면 종으로 살게 해달라는 결단까지 하고 아버지를 다시 찾아왔을까? 한 번 떠난,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집에,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재산을 모두 탕진한 채 부랑아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바는 수많은 글과 책에서 다루어졌지만, 브레넌 매닝의 '부랑아 복음'은 그렇게 부랑아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에 중점을 두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묻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런 몰골을 하게 되었는지, 그 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왜 이제서야 돌아왔는지, 가지고 나간 재산은 ..
(이번 글은 서평나 감상문이라기 보단 요약에 가깝습니다. 제가 감히 이런 깊이 있는 로마서 주석책으로 서평이나 감상문을 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 관심 있으신 분이 읽어 보셨을 때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공유해 봅니다.) 세상에 수많은 로마서에 관한 책이 있음에도, 저자 권연경 교수는 거기에 또 하나를 추가했다. 바울의 복음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기본적인 이유 외에도,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를 현재 치우쳐진 교회의 모습에서 찾는다.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대쪽의 치우침이 필요한 법이다. 이 책은 그러한 균형을 잡기 위해 쓰여진 한 성경학자의 외침이다. 로마서가 바울 서신 중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복음을 가장 차근..
내게 혈관이 되어준 책 화창한 날이 다른 곳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여기, 캘리포니아에는 "희망의 도시 (City of Hope)"라는 이름의 병원이 있다.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 '희망의 도시'에는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없다. 대신 여기는 그런 희망이 간절하게 필요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렇다. 내가 일하고 있는 City of Hope는 암 전문 병원이다. 내가 매일 복도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음에 임박한 이들이 많다. 커피를 마시러 스타벅스에 가는 그 짧은 거리에도 매일 난 기쁨이 사라져 버린듯한 회색 빛의 앙상한 얼굴들을 만난다. 많은 이들이 모자를 눌러쓰고 있지만, 그 모자로부터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보이질 않는다. 너무 말라 골격의 구조까지도 쉽게 가늠할 수 있..
거룩하고 온전한 사랑이란?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을 읽고. 제르트뤼드가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죄’였다. “소경이었으면 죄 없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정확하게 역행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서야 그 동안 말로만 듣고 상상만 했던 아름다운 세상을 자신의 두 눈으로 처음 볼 수 있게 된 그 날, 그녀가 선택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살 시도였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의 절정 부분과, 해소의 과정도 없이 갑작스러우리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던 결말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스위스 알프스 산맥 자락에 위치한 어느 한 시골의 목사가 일기 형식으로 담담하게 자신에게 있었던 심리 변화를 기록한,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비교적 짧은 중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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