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공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읽고. 사랑하는 아내와 키스를 하고 잠자리에서 빠져 나와 아들의 방으로 향한다.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천사 같은 아들을 꼬옥 안아주며 볼에 뽀뽀를 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스킨십을 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임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사랑할 수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 그렇다. 우린 인간이다. 몸을 가진 인간이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린 자칫 인간의 육신을 생각할 때면 제한 받고 통제 받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궁극의 답: 하나님의 임재. 김기현 저,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를 읽고. 아주 드물게 일어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건. 때론 자연법칙을 거스르기까지 하지만, 늘 불분명한 원인과 분명한 결과를 가지는 사건.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신비한 사건을 우린 감히 기적이라 부른다. 기적을 통하여 두 번째 삶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큰 감동을 준다. 그들에게 기적은 곧 새로운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생명이 아닌 죽음을 의미할 때가 있다. 바로 고난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경우다. 고난과 고통을 겪는 자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기적이 되고,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자에게는 고난이 오히려 기적이 된다. 이렇듯, 어쩌면 기적은 우리가 정의하기 나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결코 주관적이지 않은 기..
스탠리 하우어워스 & 윌리엄 윌리몬 공저, 복있는사람 출판,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을 읽고. Resident Alien. A. 나는 Resident Alien이다. 미국이라는 땅에 합법적으로 거주 (resident)하고는 있지만, 나의 시민권 (citizenship)은 미국에 속하지 않는다. 현재 나는 외국인 (alien) 신분이다. B. 그리스도인은 Resident Alien이다. 세상이라는 곳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고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현재 모든 그리스도인은 외국인과도 같은 나그네 된 백성이다. C. 나는 미국에 살지만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나의 충성은 미국을 향하지 않는다. 미국 역시 시민이 아닌 나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국에 영향을 받지만 주요 관..
J. 워너 월리스 저, 새물결플러스 출판, “베테랑 형사 복음서 난제를 수사하다”를 읽고, ‘지식의 믿음’에서 ‘신뢰하는 믿음’으로. "기독교인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기독교가 진리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니,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당신의 신앙을 변호할 수는 있는가?" 어쩌다 보니 최근 세계의 도마 위에 오른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된 과학적인 (과학적이라 주장하는, 필자는 동의 못함) 증거 (결코 증거가 될 수 없는)를 들이대며 성경을 증명하려는, 가상하지만 헛된 노력을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모두가 기독교 변증가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짐 월리스는 다음과 같이 강하게 말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단순한 기독교인'인..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저,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를 읽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를 향한 신뢰,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자칫하다간 자신의 신앙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이 자신의 고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느껴지고, 자신만 숨 막히는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난과 훈련의 유익함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는 '욥기'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 가운데, 왜 욥이 고..
폭력의 흔적, 그리고 발현. 한강 저, ‘채식주의자’를 읽고. 폭력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문신처럼 영원히 남아 자신이나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야 만다. 다만 그 시기가 개인마다 다를 뿐, 뒤늦게 발현되는 형질을 가진 유전자처럼, 폭력이란 실체는 어떻게든 발현이 되어 결국은 그 파괴성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다. 영원불멸한 힘을 가진 것만 같은 치명적인 암세포처럼,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영혜에게 각인된 폭력의 흔적은 그녀가 성인이 되고 나서 느지막이 찾아온 어느 날 밤 그녀의 꿈에서 마침내 깨어났다.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그녀의 작품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2004년과 2005년에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그리고 ‘문학 판’에 독립적으로 실렸던 3개의 중편..
인간. 랭던 길키 저,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출판)를 읽고,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존재의 심연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익숙하지만 낯선 자신의 벌거벗은 실체를 대면하는 시기다. 우리가 고난이라고도, 환란이라고도 부르는 순간이다. 소스라쳐 뒤로 물러서거나, 없는 것처럼 무시해버리지 않고, 이를 정면으로 맞설 용기만 있다면, 반드시 그 심연으로부터 우리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을 편리하게 만든 문명의 발달과 사회에 팽만한 구조적 악은 불행히도 우리가 그 순간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가 숨을 수 있는 여유까지도 충만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우린 좀처럼 그런 순간을 기회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이 준비 없이 오는 것처럼, 고난 또한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어찌 ..
선입관이나 고정관념만큼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왜곡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더욱이 소시오패스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요즈음,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이것의 암묵적인 배후세력으로 규정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사람을 공감하지 못해 사람을 해치는, 이 기형적인 존재의 탄생은 어쨌거나 우리 시대가 낳은 괴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전적 요인의 기여도를 차치한다면, 소시오패스의 모습은 자기자신을 서민이라 여기는 평범한 우리들에게도 존재한다. 공감능력상실이 항상 범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옳고 그름을 자신의 유익에 근거해서만 판단하는 모습은 비단 범죄자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든 인간은 아직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을 ..
50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짧은 책은 우리를 1세기 로마로 데려간다. 푸블리우스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하여 우리는 브리스가 아굴라의 가정 교회를 방문하게 되고 그들의 삶의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아굴라를 인습에 매이지 않는 유대인으로 소개받은 푸블리우스는 아굴라가 자신이 알고 있던 유대인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이유가 필요했다. 그는 아굴라의 과거 삶의 경험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동행했던 글레멘드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의미 있는 대답을 듣게 된다. 아굴라가 그 동안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인 이유가 더 크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유는 글레멘드와 유오디아가 고린도에서부터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와 함께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새로운 관점은 예수 복음을 의미했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삶의 예..
보통 읽는 속도에 비해 3배 정도 느리게 읽었다. 그만큼 책을 꼭꼭 씹어가며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작은 꼭지는 평균 2-3페이지 정도로 짧고 쉽게 쓰여져 있고, 공감이 가는 글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져 페이지를 휙휙 넘기려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책을 가만히 덮고 묵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쉼호흡을 하고 책을 폈다. 저자의 삶에 녹아 있는 하나님나라를 충분히 느끼고 싶었고, 가능한 많은 것을 배우고 내 삶에 적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자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여겼다. 나 역시 직장 현장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하나..
폴 칼라니티 저, "숨결이 바람 될 때 (서른 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를 읽고. 화창한 날이 다른 곳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여기, 서던 캘리포니아에는 "희망의 도시 (City of Hope)"라는 이름을 가진 병원이 있다. 그러나 이 좋은 첫 느낌은 이 병원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완벽한 역할을 한다. 이 희망의 도시는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아닌, 그런 희망이 간절하게 요구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일하고 있는 City of Hope는 암 전문 병원이다. 커피 한잔을 위해 걷는 2분 거리에도, 커피를 기다리는 짧은 5분의 순간에도 매일 난 기쁨이 사라져 버린듯한 회색 빛의 앙상한 얼굴들을 만난다. 많은 이들이 모자를 쓰고 있지만, 그 모자로부터..
성경에서 처음으로 공의 (쩨다카)와 정의 (미슈파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부분은 창세기 18장 1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는 한 사람, 아담의 반역으로 시작되어 죄악에 물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부르시고 보내시며 시작된, 소위 ‘하나님의 선교’에서의 핵심 포인트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보내시고 함께 하심은, 하나님을 믿으면 단지 높아지고 만사형통하게 된다는 표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통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복의 목적지는 만민이지 아브라함이나 ..
무크따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에서 박 기자와 한 교수라는 두 명의 가상 인물을 설정하고, 그 배후에서 모든 걸 조율했던 우종학 교수 (존칭 생략)가 그의 두번째 책, 과도기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무대 뒤에서 연극을 보여주며 간접적으로 목소리를 내다가, 이번엔 나이를 예측하기 힘든 동안의 (^^) 감독이 무대 앞에 나와서 직접 관중들과 만나며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작품을 설명하는 셈이다. 무크따를 읽는 독자는 한 교수가 박 기자에게 하는 친절한 일대일 과외에 동참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과학과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면, 기독교인들이나 심지어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무크따는 부담없는 입문서로써 적절하다. 반면, 과도기는 저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을 읽었다. 21세기 현재, 나와 동시대를 살며, 같은 하늘과 같은 해와 달을 보며 아침과 밤을 맞이하는, 게다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의 글이어서 그랬는지, 문학 고전을 읽을 때나 신학이나 철학 책을 읽을 때와는 책이 성큼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결코 크진 않았지만, 소신이 뚜렷한 움직임이었다고 해야 할까. 공감해 달라고, 감동해 달라고, 아니면 교훈을 발견하라고, 은유 속에 숨겨놓은 깊은 뜻을 찾아내라고 하는 요구도 없었다. 그냥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마치 그 어느 것보다 내가 더 공감할 거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랬다. 정말 그랬다. 별 생각 없이도 뭘 말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이 책은..
평소 같았으면 방금 읽은 책의 잔상에 의지하여 노트북 앞에 앉아 감상을 써내려 갔을 것이다. 그러나 어젠 그러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어젯밤,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는 내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잔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랬는지 밤엔 불쾌한 꿈을 꿨다.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오늘을 맞이했다). 어떤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아니었고, 교훈을 얻을만한 잠언집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설국"이 남겨준 것처럼 그림 같은 이미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복잡하지도 않다. 등장인물은 박경리의 “토지”에 비하면 그 수가 십분의 일도 안되었고, 책에서 설정한 시공간의 단순함, 결코 많지 않은 대화, 그리고 불과 200페이지 정도의 분량 때문인지 플롯 자체도 단순..
"고도를 기다리며" "데미안"을 넘어 "좁은문"을 지나 "토지"를 밟고나오자 "설국"이었다.(그 유명한 책의 첫 문장을, 한 달간 내가 읽어온 문학 작품의 순서대로 패러디해봤다. 의미없음.) 얼추 파악했다고 생각한 스토리, 난 그것이 책의 마지막까지 지속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내심 어떤 사건을 기대했고 그러는 와중에 긴장까지 했다. 어떤 복선이 그려지지 않나 싶어 작가가 묘사하는 자연의 풍경이라든지 여자들의 행동과 말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런 사건도,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렇게 밋밋하게 책은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추운 날 겨울, 휑하니 스쳐지나 가버린 기차처럼 마흔이 되어서야 처음 맛본 "설국"은 그렇게 내게 왔다가 가버렸다. 한참 동안 책 앞 표지를 바라보며 "설국"이 남긴 잔상에 잠..
성경의 내레이터(들) - 그 존재의 의미 - 곽건용 목사님 저, "알 수 없는 분"을 읽고, 오렌지 카운티 북클럽에 참석하고. 난 모세오경의 저자가 진짜 모세인줄 알았다. 물론 그 40년간의 광야생활에서 어떻게 기록이란 걸 했을까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었고, 정말 그게 가능했을까 하며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의심은 언제나 그리 오래 가질 못했다. '그래도 하나님은 못 하시는 게 없잖아...'하며 매번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상상의 나래를 스스로 싹둑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덮어놓고 믿는 맹목적 믿음을 부추기는 가장 강력한 소스로 작용했던 것 같다. 교회를 30년 가량 다녔지만, 아무도 내게 정확한 사실에 대해서 말해준 사람..
책에 몰입을 해보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만나기 전까진 독서하며 한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엄마의 도움으로 "데미안"을 읽게 되면서 문학세계에 들어왔던 나는 문학고전들을 기회가 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당최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단테의 신곡, 책보단 짧은 연극을 보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던 괴테의 파우스트, 지루하기만 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길고 난해하여 여러 번 시도 끝에 겨우 마칠 수 있었던 도스트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책도, 뭔지 모를 의무감 반 호기심 반으로 읽어냈다. 내가 "좁은문"을 읽었던 시기가 그 어려운 책들을 읽고 난 이후인지 읽기 전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확실히 내 뇌리에 박힌..
기괴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주인공이 쪄들어 냄새가 날 것 같은 부랑자였기 때문이었거나, 하마터면 철학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이나 수준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반복을 거부하지만 또 반복되고야 마는, 그리고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그들의 허무한 삶 때문도 아니었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의 일상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쓴 나물을 먹은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얼른 깨끗하게 샤워라고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문득 그들이 갇혔던 일상이 우리 인간들의 실존적인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기괴하기만 했던 기분은 금새, 겉으론 우스꽝스럽지만 속으론 아주 깊고 묵직하게 내면을 터치당했다는 기분으로 바뀌었다. 책 전체엔 허무함이 줄줄 흐..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초월일까, 독선일까, 아니면 그저 무관심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 그런 사람은 교만하다든지, 반항적이라든지, 아니면 무책임하다는 말을 각 진영으로부터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런 자세가 진리를 향한 것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특히 기독교 안에 있는 교파들과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고, 그럴 의도조차 없으셨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전해온 약속의 성취요,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께서 죄와 악으로 물든 창조세계를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하신, 열방에 복을 주시는 구원 계획의 완성이시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