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아내에게 선물 받은 헤세 선집 중 여섯 번째 책의 감상문입니다.** 남에게로 향하는 삶. 헤르만 헤세 저, '크눌프'를 읽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가?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눈 앞에 펼쳐지는 낯선 세상, 그리고 비로소 대면하는 익숙하고도 낯선 자아. 함께 떠난 여행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우린 혼자 떠난 여행에서 선물로 받아오곤 한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은 피부와도 같았던 견고한 보호막을 깨부수고 나오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엔 아픔이 동반되기 마련이며, 때론 그로 인해 깊숙하고도 치유되지 않을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대개는 상처가 아닌 치유로 수렴한다. 여행에서 돌아온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
회복된 하나님백성의 삶, 윤리로 번역되다. J. 리처드 미들턴 저, '새 하늘과 새 땅'을 읽고. 학창 시절 내가 배운 '구원'의 의미는 예수 이름 믿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법정적 선언이었다. 죽어서는 썩어질 몸을 떠나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 천국이라는 곳으로 영원히 죽지 않을 나의 영혼만이 올라가 영원토록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루하루를 살게 될 것이라고 배웠다. 거기엔 아픔도 슬픔도 없다고 했다. 현실처럼 아등바등 살 필요도 없다고 했다. 길 가에 주렁주렁 열려있는 사과나 따먹으며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배움의 결과, 어릴 적 자연스럽게 내 머리 속에 그려진 천국의 이미지는 모두 흰 옷을 입고 늘 하프나 켜며 영원히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곳이었다. 그..
하나됨: 공존과 대립을 넘어. 헤르만 헤세 저, '황야의 늑대'를 읽고.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스펙트럼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빛도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빛보다 더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인간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프리즘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하나의 몸과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 여러 개의 자아로 분열하게 되는 걸까? 그 분열된 자아는 전체 자아의 일부일까, 아니면 그들 자체가 수많은 작은 전체들의 집합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그렇게 분열된 자아들이 모여 이룬 하나의 큰 자아일까, 아니면 여러 자아들이 뒤섞인 채 그저 하나의 몸에 갇혀 있는 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헤세는 소설을 통하여 과감히 자아를 분열시킨 후 대립적인 성향을 지닌 등장 인물들에게 그의..
나에게도 두 세계가 있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많은 것들이 버려졌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주변 환경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나의 내면의 변화가 컸다. 심이 깊게 박힌 티눈처럼 내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성공지향적 가치관이 비로소 그 뿌리를 드러내고 참혹히 잘리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 버렸다. 그 죽음이 끝일 것 같아 온 힘을 다해 버텼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유아적 생명은 죽어야만 했던 세계였다. 죽지 않았다면 나는 끝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견고한 알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내 모습을 본다. 예전보다 편안해진 모습이다. 조그만 우물과도 같았던 알 속에서 마냥 조급하기만 했던 내가 부끄럽다. 그렇다.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
**작년 말 아내에게 선물 받은 헤세 선집 중 네 번째 책의 감상문입니다.** 성장 - 시인에서 인간으로. 헤르만 헤세 저, '페터 카멘친트'를 읽고.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쉬지 않고 일한다. 끊임없이 들어주고, 끊임없이 말해준다. 자연은 찾는 이에게 훌륭한 상담가인 것이다. 페터를 붙잡아 주었던 존재도 사람이 아니었다. 장엄하게 늘어선 산맥과 첨탑처럼 솟아오른 산봉우리, 그리고 그 위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구름이었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그에게 안식을 주었고, 난해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었으며, 잠자고 있던 그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선생이었다. 변함 없지만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자연은 그렇게 페터를 맞이했고 또 성장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사랑..
나를 넘어서. 헤르만 헤세 저, '게르트루트'를 읽고.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모진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우린 이런 면에서 커다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올해 들어 세 번째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게르트루트'에서 난 또 다른 헤세의 자아와 그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소설 '게르트루트'는 '쿤'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음악가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다. 헤세는 이 소설 속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쿤'과 오페라 가수인 '무오트'로 분열하여, 자아의 스펙트럼 중 ‘예술가’라는 하나의 채널을 선택하여 증폭시킨다. 그러면서도 그 채널을 역으로 타고 프리즘을 거슬러 올라가 빛의 근원에 도달하려고 시도한다. 거기..
진리를 찾는 구도자. 헤르만 헤세 저, '싯다르타'를 읽고. 평일에 팔다리가 피곤해질 때까지 일을 한 사람들에게 휴일은 더욱 축제처럼 느껴진다. 일상을 잃어본 사람은 일상의 위대함에 전율하기 마련이다. 순식간에 망각은 착각이 되고, 착각은 깨달음이 된다. 보람과 성취감, 그리고 경이감, 이름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는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된 행복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이런 소중한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우리를 찾아왔다가, 아쉬워할 새도 없이 순례자처럼 사라져 버린다. 깨달음은 어느새 착각으로, 착각은 다시 망각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 인간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진리를 찾기 위한 인간의 역사는 곧 철학과 신학의 역사다. 진리가 본질적인 가치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인간은 그것을 찾..
**올해는 신학 관련 도서들을 새롭게 구입해서 읽는 방법 말고도 이미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방법도 사용할 계획입니다. 신학적인 배경이 전무한 아마추어라 예습보단 복습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새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단,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며 제대로 이해한다면 신학적인 안목을 갖는 저의 목적에 더 빨리 이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은 저의 다시 읽기 시리즈의 첫 책을 읽고 쓴, 서평과 감상문의 중간 어디 쯤 있을 것 같은 글입니다.** “사리사욕을 위한 성경읽기를 파면한다!” 김근주 (Keunjoo Kim) 저,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를 읽고. 다들 한 번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새해를 맞아 적어도 한 번 이상 성경을 읽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
누가 한스를 죽였는가. 헤르만 헤세 저, ‘수레바퀴 밑에’를 읽고, 밤 9시가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혼내주기 위해 아버지는 오랜만에 분노의 회초리를 들었다. 그렇지만 같은 시간, 아들은 멀리서 이미 주검이 되어 차디찬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억압의 상징인 수레바퀴 밑에서 기어이 한스는 죽음을 맞이했다. 한스 기벤라트는 재능있는 아이였다. 시골 마을에서 유일하게 주 시험에 응시하여 차석으로 신학교에 입학하는 영예를 누릴만큼. 한스의 합격은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학교 교장의 명예였으며, 마을 목사의 자부심이었다. 한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그는 주위의 칭찬과 격려에 순응적이었다.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며 성공의 피라미드에 오..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 브레넌 매닝 저, '부랑아 복음'을 읽고. 얼마나 오죽했으면 종으로 살게 해달라는 결단까지 하고 아버지를 다시 찾아왔을까? 한 번 떠난,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집에,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재산을 모두 탕진한 채 부랑아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바는 수많은 글과 책에서 다루어졌지만, 브레넌 매닝의 '부랑아 복음'은 그렇게 부랑아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에 중점을 두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묻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런 몰골을 하게 되었는지, 그 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왜 이제서야 돌아왔는지, 가지고 나간 재산은 ..
(이번 글은 서평나 감상문이라기 보단 요약에 가깝습니다. 제가 감히 이런 깊이 있는 로마서 주석책으로 서평이나 감상문을 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 관심 있으신 분이 읽어 보셨을 때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공유해 봅니다.) 세상에 수많은 로마서에 관한 책이 있음에도, 저자 권연경 교수는 거기에 또 하나를 추가했다. 바울의 복음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기본적인 이유 외에도,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를 현재 치우쳐진 교회의 모습에서 찾는다.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대쪽의 치우침이 필요한 법이다. 이 책은 그러한 균형을 잡기 위해 쓰여진 한 성경학자의 외침이다. 로마서가 바울 서신 중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복음을 가장 차근..
내게 혈관이 되어준 책 화창한 날이 다른 곳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여기, 캘리포니아에는 "희망의 도시 (City of Hope)"라는 이름의 병원이 있다.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 '희망의 도시'에는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없다. 대신 여기는 그런 희망이 간절하게 필요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렇다. 내가 일하고 있는 City of Hope는 암 전문 병원이다. 내가 매일 복도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음에 임박한 이들이 많다. 커피를 마시러 스타벅스에 가는 그 짧은 거리에도 매일 난 기쁨이 사라져 버린듯한 회색 빛의 앙상한 얼굴들을 만난다. 많은 이들이 모자를 눌러쓰고 있지만, 그 모자로부터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보이질 않는다. 너무 말라 골격의 구조까지도 쉽게 가늠할 수 있..
거룩하고 온전한 사랑이란?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을 읽고. 제르트뤼드가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죄’였다. “소경이었으면 죄 없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정확하게 역행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서야 그 동안 말로만 듣고 상상만 했던 아름다운 세상을 자신의 두 눈으로 처음 볼 수 있게 된 그 날, 그녀가 선택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살 시도였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의 절정 부분과, 해소의 과정도 없이 갑작스러우리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던 결말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스위스 알프스 산맥 자락에 위치한 어느 한 시골의 목사가 일기 형식으로 담담하게 자신에게 있었던 심리 변화를 기록한,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비교적 짧은 중편 ..
정제된 은혜에 사랑을 더하다. 필립 얀시 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읽고. 누군가는 ‘은혜’라는 단어를 자신의 잘남과 높음, 그리고 상황의 잘됨으로 연결시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큰 은혜 받았던 때를 내게 묻는다면, 난 나의 못남과 낮음, 그리고 상황의 안됨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들을 말하지 않고는 도저히 내겐 ‘은혜’를 설명해 낼 재간이 없다. 여전히 지금도 일상 중에 ‘은혜의 구경꾼’으로 설 때가 더 많은 ‘부끄러운 나’이지만, 필립 얀시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나 역시 한없는 은혜의 수혜자였음을 다시 고백하게 만들어 주었고 감사를 회복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그러나 그 고백을 하기에 앞서, 나는 3년 전 클리블랜드로 다시 돌아가야..
침묵의 역설: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의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침묵 가운데서도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침묵’은 ‘침묵의 소리’로 다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침묵’을 오독했던 독자 중 하나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침묵’을 ‘침묵’으로만 읽었던 많은 독자들 덕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묵의 소리’는 ‘침묵’에 해제를 붙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침묵’에 대한 오독이 엔도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독 덕분에 우리들은 엔도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좀 더 친밀하고 좀 더 친..
합리화인가, 순수함인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기적이 일어날 거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침묵’이라는 제목으로부터 이야기의 결론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긍정적일 수 없을 결론을 예측하며 난 책을 펼쳤다. 엔도 슈사쿠를 처음 만났다. 이 책에서의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을 의미한다. 고난과 역경 한 가운데 놓인 하나님의 백성을 기적을 일으켜 구해주는, 영화나 소설 속의 슈퍼 히어로나 마법사 하나님이 아닌, 17세기 일본, 천주교의 박해 중심에서의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시고 묵인하시는 하나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자 죽음도 무릅쓰고 극심한 고통을 담대히 선택한 자신의 백성들 앞에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공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읽고. 사랑하는 아내와 키스를 하고 잠자리에서 빠져 나와 아들의 방으로 향한다.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천사 같은 아들을 꼬옥 안아주며 볼에 뽀뽀를 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스킨십을 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임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사랑할 수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 그렇다. 우린 인간이다. 몸을 가진 인간이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린 자칫 인간의 육신을 생각할 때면 제한 받고 통제 받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궁극의 답: 하나님의 임재. 김기현 저,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를 읽고. 아주 드물게 일어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건. 때론 자연법칙을 거스르기까지 하지만, 늘 불분명한 원인과 분명한 결과를 가지는 사건.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신비한 사건을 우린 감히 기적이라 부른다. 기적을 통하여 두 번째 삶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큰 감동을 준다. 그들에게 기적은 곧 새로운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생명이 아닌 죽음을 의미할 때가 있다. 바로 고난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경우다. 고난과 고통을 겪는 자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기적이 되고,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자에게는 고난이 오히려 기적이 된다. 이렇듯, 어쩌면 기적은 우리가 정의하기 나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결코 주관적이지 않은 기..
스탠리 하우어워스 & 윌리엄 윌리몬 공저, 복있는사람 출판,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을 읽고. Resident Alien. A. 나는 Resident Alien이다. 미국이라는 땅에 합법적으로 거주 (resident)하고는 있지만, 나의 시민권 (citizenship)은 미국에 속하지 않는다. 현재 나는 외국인 (alien) 신분이다. B. 그리스도인은 Resident Alien이다. 세상이라는 곳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고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현재 모든 그리스도인은 외국인과도 같은 나그네 된 백성이다. C. 나는 미국에 살지만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나의 충성은 미국을 향하지 않는다. 미국 역시 시민이 아닌 나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국에 영향을 받지만 주요 관..
J. 워너 월리스 저, 새물결플러스 출판, “베테랑 형사 복음서 난제를 수사하다”를 읽고, ‘지식의 믿음’에서 ‘신뢰하는 믿음’으로. "기독교인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기독교가 진리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니,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당신의 신앙을 변호할 수는 있는가?" 어쩌다 보니 최근 세계의 도마 위에 오른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된 과학적인 (과학적이라 주장하는, 필자는 동의 못함) 증거 (결코 증거가 될 수 없는)를 들이대며 성경을 증명하려는, 가상하지만 헛된 노력을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모두가 기독교 변증가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짐 월리스는 다음과 같이 강하게 말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단순한 기독교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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