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역사성과 의미를 묵상하며 존 도미닉 크로산, N. T. 라이트 외 저, ‘예수 부활 논쟁’을 읽고 미국 와서 교회력에 친숙해지고 난 이후 매 사순절마다 예수의 부활에 관계된 책을 한 권씩 읽는다. 부활절이라고 삶은 달걀 위에 알록달록 물감을 칠해서 하나씩 나눠 먹는, 나로선 잘 이해가 안 가는 퍼포먼스보단 누군가의 글을 읽고 깊이 묵상하며 부활절을 맞이하는 편이 사순절을 더 의미 있게 보내는 방법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 내가 읽은 책은 크로산과 라이트의 주장과 해석을 비교 대조하고 그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몇몇 신학자들의 논문을 한데 모은 책이었다. 새물결 플러스에서 출간된 ‘예수 부활 논쟁’이라는 책이다. 약 3년 전부터 나에게 외면을 받은 채 줄곧 책장에 꽂혀있었다. 하필 그즈음이 신학 ..
인간이란 무엇인가 프리모 레비 저,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2차 세계대전’ 하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우슈비츠’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단어는 반지성적인 우생학에 기반하여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신봉했던 ‘히틀러’나 ‘나치’가 아닌, 그들에 의해 실행된 유대인 대학살, 이른바 ‘홀로 코스트’이다. 악의 발현, 아니 악 그 자체라고 표현해도 여전히 충분하지 못한 것 같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아닌, 그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희생당한 유대인들이 왜 나에겐 먼저 떠오르는 것일까. 유럽 각지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은 하루아침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보다 못한 고깃덩어리로 전락했고, 엄청난 수가 도살되듯 강제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나에게 아우슈비츠는 세상에서 가장..
말하지 못해도, 보지 못해도 한강 저, ‘희랍어 시간’을 읽고 불연속성, 불친절함,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의식 저 아래에서 퍼 올린 조각난 단상들,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드는 상처의 깊은 흔적과 그 기억의 파편들, 그것들을 활자로 대면하면서 생경하게 느껴지는 강한 이질감,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거부할 수 없는 불편함.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다. 때론 숨이 막혀서, 때론 내 심장이 귓가에서 하도 쿵쾅대서 잠시라도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녀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어둡고 무겁다. 공간으로 말하자면 인적이 드문 시골, 시간으로 말하자면, 곧 해가 뜰 새벽 다섯 시 정도가 아니라 가장 어둡고 가장 적막한 새벽 두세 시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어두운 밤이 아닌 밝은 밤 최은영 저, ‘밝은 밤’을 읽고 서양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며, 한국어로 소설 쓰길 갈망하고 또 실제로 준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 현대 소설의 지형과 흐름을 대략적이라도 파악하는 일은 꼭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 작업을 2년째 틈나는 대로 해오고 있다. 그래 봤자 지금처럼 여러 가지가 제한된 환경에서는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 몇 개씩 읽어나가는 일에 불과하지만, 그런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낼 때마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주제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항상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남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고전을 좋아하고 그 깊은 맛을 사랑하는 내 취향 때문이리라, 하고 추측할..
절대적 평범성, 그리고 진정한 겸손함 카렐 차페크 저, ‘평범한 인생’을 읽고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평범하다’는 것은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는 뜻이다. 뛰어나거나 색다르다는 것은 비상하거나 특별하다는 의미로써, 그렇게 판단하기 위해선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평범하다는 의미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이를테면, 휴대폰 사용자가 평범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건 아주 최근의 일이고 (시대 영향), 한국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건 평범하지 않아도 미국에서 사용하는 건 당연할 정도로 평범한 일이다 (문화 영향). 평범하다는 건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평범함은 이렇듯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정의하기 나름일..
삶을 노래하는 예술 토마스 만 저,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 유럽 예술의 흐름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시기는 ‘데카당스’라는 단어를 빼곤 설명할 수 없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 어원을 가지는 불어로써 ‘쇠락’ 혹은 ‘퇴폐’를 의미한다. 프랑스 예술가 보들레르로 대표되는 데카당스 예술은 관능이나 도취를 일삼는 탐미주의 혹은 세기말적인 그로테스크 예술 양식과 맞닿아 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삶에 대한 강한 반감, 삶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할 수 있는데, 삶 자체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기에 데카당스 예술은 삶과 인간 모두에 반하는 사조, 그래서 삶과 예술을 분리시킨 예술로 이해하면 되겠다. 생의 철학, 힘에의 의지,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주의: 수동적인 운..
어두움을 통과한, 그 눈부신 빛 후우카 김 저, ‘그럼에도 눈부신 계절’을 읽고 누군가의 기억의 방으로 초대받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 기억이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한 사람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것을 내것인 것처럼 여기고 받아들이는 일. 누군가를 공감하는 일. 공감 없는 이해는 피상적이고 때론 잔인할 수도 있기에 이러한 과정은 한 사람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겪어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거룩하다 말한다. 타자를 안다는 것은 이런 거룩한 과정을 통과한 아름다운 열매이자 사람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라고 믿는다. 후우카를 안 지 5년이 넘었다. 현재 남편인 정현욱 목사 덕분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나에게 있어 몇 안 ..
읽기 만만한, 그러나 충분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을 읽고 2년 전, 도스토예프스키 5대 장편이라 불리는 후기 작품들을 다 읽고 나서 크게 다짐했던 게 하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작 읽기. 단,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붙였다. 내리읽지 않기. 어떤 한 작가에게 매료되면 그 작가의 작품 전체를 읽고 싶어 지게 된다. 대부분은 생각만으로 끝나지만, 간혹 소수의 독자들은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이렇게 실행에 옮긴 독자들 대부분의 행로는 내리읽는 것이다. 즉, 한동안 그 작가의 작품에만 빠져 지내기로 계획하는 것이다. 이런 몰입에는 여러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그 작가의 필체에 너무 익숙해진다는 것, 그래서 그 작가만이 가진 고유..
도스토옙스키로부터 난데없는 위로를 도제희 저,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독자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 저자는 201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서 당선, 등단한 작가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풀어가는 솜씨가 훌륭하다. 직장에서 난데없이 퇴사한 이후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으며 치유를 경험한, 보기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책 소개란에 적힌 “물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 수영을 배운다면, 퇴사라는 인생의 수렁에서 저자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택한 생존법은 고전 읽기다”라는 문장이 내 이목을 사로잡았다. 사건과 상황만 다를 뿐 나 역시 인생의 낮은 점에서 책이라는 세상을 만난 후 궁극적으로 다다른 곳이 고전 문학이었고, 그 절박한 읽기를 통해 치유를 경험했기 때문..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가 주는 뜻밖의 위로 가즈오 이시구로 저,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을 읽고 몇 주째 지속되는 원인 불명의 불안 때문이었을까. 마침 읽고 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내 내면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운명을 믿진 않지만 운명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공간을 향유하는 공감각적인 독서는 종종 독자를 과도한 자기 주관으로 이끌곤 한다. 하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그로 인해 조용히 위로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 주관적인 해석을 부정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위로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니까. 마치 운명처럼 알 수 없는 이유와 이해하기 힘든 과정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니까..
삶과 죽음, 신과 인간, 그 깊음에 대하여 엔도 슈사쿠 저, ‘깊은 강’을 읽고 이 작품의 저자 엔도 슈사쿠는 ‘침묵’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침묵’에서 말하고자 했던 침묵의 의미는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독되었다. 작품 ‘침묵’은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오래된 난제 중 하나인 신정론을 떠올리게 하는데, 많은 독자들에게 침묵은 곧 ‘하나님의 침묵’으로써, 이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고통 앞에서도 선뜻 구원의 손길을 베풀지 않으시고 끝까지 침묵을 고수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로써 오해되었다. 아무리 작품이 저자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고, 독자는 제2의 저자라고 하지만, 독자에게 저자의 의도가 완전히 반대로 해석된다면 그건 실로 난감한 상황이지 않을 수 없을..
구약 읽기의 좋은 길잡이 김근주 저, ‘하나님 나라로 읽는 구약의 숲’을 읽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복음의 정수이자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이제는 많이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교회 다니는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의 고정관념은 그리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단지 입에 담기에 천박하게 보이고 주위에서 욕 얻어먹을까 두려워 그 구호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뿐 복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그 구호가 말하는 것과 동일한 관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겉만 바뀌었을 뿐 속은 별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라는 말이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상..
시간과 죽음과 삶의 역설 토마스 만 저, ‘마의 산’을 읽고 최근 입사 시험을 마친 한스 카스토르프는 고향인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 스위스 고산지대에 위치한 도시 그라우뵌덴 다보스 플라츠로 향한다. 국제 요양원 ‘베르크호프’에서 폐병으로 요양 중인 사촌 요아힘 침센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그렇잖아도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한스는 마침 전지 요양을 하고 오라는 하이데킨트 박사의 조언을 마음에 두고 있던 차였다. 단 3주 예정이었다. 기분 전환도 하고 요양도 하고 오랜만에 사촌도 만나고 돌아와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3주라는 기간은 한스에게 아주 적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3주라는 시간은 마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점점 늘어나 7년이 된다. 당시 23세였던 한스는 30..
편견에서 벗어나기 차준희 저, ‘구약이 이상해요’를 읽고 (책의 부제: 오경 난제 해설) 우물 안에 갇혀 있을 때, 구약은 나에게 전래 동화 같은 이미지에 불과했다.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구약은 주로 예화로 사용되었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며, 구약에서 기다리던 메시아 예수님이 신약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의 삼중직을 모두 행함으로써 생명의 길을 여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흑암의 세력을 꺾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구약은 불필요하다는 암묵적인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구약에 대한 설교는 창조과학에 기반한 창세기 해석, 원죄 개념이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가인과 아벨의 서로 다른 제사에 대한 해석, 인류 첫 번째 살인자 가인에 대한 해석, 노아의 홍수와 무지개에 대한 해석,..
역동적인 기다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폴라 구더 저, ‘기다림의 의미’를 읽고 하나님 나라는 시간적인 의미에서 이중성을 지닌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소위 ‘이미 (already)’와 ‘아직 (yet)’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긴장과 갈등이 공존한다. 이미 얻은 변화와 평안만이 아닌, 아직 얻지 못한 변화와 평안도 존재한다. 바울이 권면했듯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시기도 바로 이 시간표에 해당한다. 그 시간표는 곧 현재, 오늘, ‘지금, 여기’이다. 구원을 이미 다 얻은 것처럼, 그래서 마치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것처럼 수동적으로 넋 놓고 앉아 막연한 천국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역동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
불완전성과 불가능성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추억, 그 기억의 파편들 (추억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인간의 한계와 숙명에 대하여) 파트릭 모디아노 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를 읽고 지극히 사무적이고 지극히 무미건조한,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사람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차갑기만 한 장부. 누군가에겐 그토록 소중한 의미를 주는 반면, 또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 단 한두 장만으로 만들어진 공식 서류. 여백이 대부분인 그 안은 성의 없는 글씨체로 타이핑된 문자들이 채우고 있다. 결코 많지 않은 글자와 숫자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 혹은 한 가족의 인생이 그 제한된 수의 글자와 숫자들 안에 압축되어 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십 년에 이르는 세월이 농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어느 ..
글로 담아낸 목소리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을 읽고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집) 멜로디와 가사가 아무리 좋아도 적당한 목소리를 만나지 못하면 그 곡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같은 곡도 부르는 목소리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편곡과 개사 역시 곡을 다른 느낌으로 들리게 할 수는 있지만 목소리만큼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며 심금을 울리는 강력한 힘은 갖지 못한다. 우린 귀로는 멜로디와 가사를, 마음과 영혼으로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어떤 노래를 들을 때 마음에 감동을 느끼는 것도 목소리의 힘이 크다. 누가 부르느냐, 즉 곡 자체보다는 가수, 다시 말해 목소리가 곡의 전달에 있어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가사가 아닌 목소리에 집..
평이한 문장들로 이뤄진 결코 평이하지 않은 글 가즈오 이시구로 저,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읽고 매료되었던 작가의 또 다른 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 이 작품으로 가즈오 이시구로를 처음 만났다면 과연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조금은 낯선 인상을 받기도 했던 작품. 동시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다섯 편, ‘남아 있는 나날’, ‘클라라와 태양’, '나를 보내지 마’,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고 충분히 그에 대한 검증이 끝난 후에 접하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작품. 그러나 이전에 내가 읽은 다섯 편의 작품이 A+였다면, 이번 작품은 A- 정도로 여겨질 뿐, 여전히 A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나를 매혹시킨 가즈오 ..
대가의 선별과 압축을 통해 다시 만나는 도스토예프스키 석영중 저,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을 읽고 마음 담아 읽었던 작품들을 하나씩 꺼내 보며 회상에 잠기는 시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비밀의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은밀한 즐거움이다. 감동의 깊이와 세기는 배가되어 장기 기억으로 저장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감동의 각인,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깊은 만족감은 첫 방문이 아닌 재방문하는 성실한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소중한 열매다. 뿐만 아니다. 처음 읽을 때 느꼈던 감동을 복기하는 경험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효과를 낸다. 반복, 심화의 효과도 있지만, 재발견의 기쁨도 있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경험.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전율과 함께 예기치 않게 작품 전체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한강 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새와 눈, 밤과 바다, 나무와 뼈, 꿈과 환상, 그리고 불꽃. 죽음과 추위와 고통은 물론 고립과 단절과 공포까지 느껴지는 섬뜩함을 한강만의 지극히 절제된 필체로 가까스로 눌러 담은 소설. 자동적으로 이 작품은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년이 온다’를 떠올리게 한다. 감히 깊이를 따질 수 없는 그 작품을 통해 우리는 1980년 광주 학살 현장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고, 지울 수 없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냉정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었으며, 과거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지, 국가와 권력의 힘이란 어떤 것인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이르기까지 우린 눈을 감고 마음을 담아 깊이 고찰할 수 있었다. 단순히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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