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감옥 간수도 없고 문도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감옥이 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나가려 하지 않는다. 생긴 게 감옥 같지 않아서가 아니다. 감옥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고소하는 사람도 없었다. 유죄 판결을 내린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유형 살이 때문에 온 게 아니다. 한결같이 이 감옥에 갇힌 자들은 모두 자기 발로 찾아왔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은밀한 초대라도 받은 것처럼 한밤중에 하나둘씩 개인 별로 찾아왔다. 그 감옥의 이름은 ‘나’.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나’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갇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고소하지 않았고, 유죄라고 판결하지도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대장 따위는 처음부..
고백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면서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아니, ‘습관’이라기보다는 ‘도주로’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어둡게만 보이던 시절,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피할 곳이 필요했다. 처음엔 사람을 찾았다. 기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더 커져버린 상처는 관성이 되었다. 나는 더 낮은 곳으로 흘렀다. 궁여지책으로 책을 찾았다. 다행이었다. 책은 나의 피할 곳이 되어주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책에 안착했다. 내가 읽고 쓰는 이유는 팔 할이 절박함이다. 하루에 적어도 한 시간은 책을 읽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아니, 단지 ‘약속’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모자라다. 단지 독서 습관을 들이고자, 혹은 나의 게으름에 채찍질을 하고자 했던 약속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념하..
원하는 것 vs. 구할 것: 솔직한 기도란? 솔로몬의 기도는 마 6:33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 같은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닌 분별력, 듣는 마음, 지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았던 것까지 더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본문을 그릇 해석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한 마디로 기도 형식에 천착하는 부류죠. 마치 사적인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여전히 본인이 원하는 건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욕망 (이를테면 부, 명예, 성공, 인기 등)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마음에도 없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입으로 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성실한 땀: 파괴와 창조. 견디는 삶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건 성실한 땀이라 했다. 일상이 견디는 삶이라면, 성실한 땀은 일상을 유지하며 살아내는 비결이 된다. 성실한 땀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감사의 제목이 된다. 우리 주위에는 그러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웃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입을 다물고 겸허해진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이 작고 초라한 환경을 다시금 바라보며 묵묵히 또 하루의 땀을 흘린다. 언젠가부터 원하는 게 모호해졌다. 원하고 바라는 것들의 대부분이 과녁을 빗겨나간 경험을 많이 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이 필요 없다거나, 꿈을 지워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저 계획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거품을 조금씩..
오래참음의 대상. 사랑의 미분계수는 낭만일 수도 있고 빛나는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의 적분은 견딤이다, 오래참음이다. 견디고 오래참는 행위가 난 여태껏 그 대상이 상대방인 줄 알았다. 상대방을 십자가로 짊어지고 꾹꾹 참으며 자신의 인내심을 다스리는 삶이 사랑이라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요즈음 같은 텍스트를 다시 읽는다. 견디고 오래 참아야 할 대상을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으로 읽는다. 그러면 본문이 다르게 읽힌다. 찰나의 사랑은 상대방만 조명하지만, 지속된 사랑은 자신도 비춘다. 점점 실망하고 화가 나는 건 상대방이 아닌 나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래서 저항하고 전투를 벌이지만, 마침내 고요 가운데 찾아오는 깨달음은 나의 못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도 이 역할을 해줄 수 ..
기도의 목적. 마태복음 4장은 마귀의 예수 시험 사건을 광야 40일 금식기도 이후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 본문을 읽을 때, 예수의 금식기도 목적이 마치 마귀의 시험 준비인 것처럼 해석해선 곤란하다. 그 사건의 역사성을 차치하고서라도 마태복음 저자의 내러티브 전개 구도를 고려한다면, 예수의 금식기도 목적은 공생애 준비로 읽는 게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도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40일 금식까지 병행하며 행하는 집중기도의 목적이 고작 마귀 시험 따위를 대비하는 것이라면, 이는 마귀 시험의 발생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그 시험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으며, 왜 ..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중심된 삶이라기보다는 ‘내’가 중심인 삶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믿을지도 모르지만, 타자가 믿는 하나님을 경시하거나 마치 잘못 믿는 것처럼 무턱대고 비교대상으로 여긴 채 언제나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믿음을 무기 삼아 타자를 계몽시키려 한다거나 안타깝게만 여긴다면, 그 믿음이야말로 ‘내’가 중심인 삶을 반증하는 증거일 것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만 옳고 타자의 하나님은 언제나 모자라거나 잘못된 것처럼 바라보는 그 시각 자체가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관이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편협하고 이분법적이며 차별..
산 위의 동네. ‘산 위의 동네’는 산 위에 있지 않고 산 아래 세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하나님백성들이 있어야 할 곳은 고립되고 세상과 단절되어 사람들이 육신의 고개를 쳐들어야 볼 수 있는 저 높은 산 위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평등한 자리에서 똑같은 법과 규칙에 적용을 받고 똑같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사람들이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느끼게 되어 마음의 고개를 들어 마치 산 위를 쳐다보듯이 자발적인 신뢰와 존경까지도 우러러나오게 되는 장소, 즉 산 아래의 세상이 아닐까. 물론 페북 세상만을 보고 판단하기에는 성급할 것이다. 그러나 페북 세상이 세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며, 세상에서는 감출 수 있었던 모습까지도 보여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나는 페북에..
분별. 종종 약함과 악함은 같은 얼굴을 가진다. 이 곤혹스러운 순간, 분별력은 귀중한 지혜가 된다. 악함이 약함의 옷을 입고 약함의 혜택을 누리며, 숨어서 세력을 키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약함이 악함으로 오인 받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참히 짓밟히는 경우도 있다. 약함은 사라져버리고 악함만이 남는다. 전자의 경우가 당사자의 악함이 작동한 결과라면, 후자는 상대방의 악함이 작동한 결과다. 우리가 끊임없이 분별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악의 실체에 기만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자기 이익에 눈이 멀어 거짓겸손과 같은 양의 탈을 선택적으로 써가며 실체를 교묘하게 은폐하고 유지해가는 적극적인 악도 악이지만, 그 둘을 분별할 줄 몰라 악에게 늘 선수를 빼앗긴 채 악의 활동무대를 자유롭게 마련해주는 것 역시 ..
진심: God-centered humanist.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우린 무엇 때문에 공감을 할까. 단순히 눈물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세상엔 전혀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눈물도 존재한다. 그러니 아마도 그것은 진정성, 직간접적 경험을 넘어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진심이지 않을까. 나는 타인의 눈물 속에서 그 사람의 진심을 읽는다. 함께 슬프고, 함께 억울하고, 함께 안타까울 때는 그 사람의 진심이 느껴질 때다. 눈물만이 아니다. 때론 누군가의 한숨 속에서, 때론 누군가의 눈빛 가운데, 때론 누군가의 표정 속에서 나는 그 사람을 읽는다. 그 사람의 진심을 읽는다. 설계되지 않은 무언의 몸짓 속에서 우리는 서로 인간임을 느끼..
사람을 살리는 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건 사람이 살아나는 장면을 목도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며 속에서 끓어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울지 않는 내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남몰래 눈물을 훔쳤던 때는 거의 모두가 사람이 살아나거나 치유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여전하다. 난 여전히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의사가 되진 못했지만, 난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만,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로. 내 손에 메스가 아닌 펜이 있고, 내 머리엔 수술 지식이 아닌 기초적인 생물학 지식과 미천한 인문학적 지식이 있지만. 내가 가진 복음과 내가 꿈꾸는 하나님나라. 내가 이해하고 믿는 예수의 정신. 하나님..
견진 성사. 어느덧 매주 성공회에 출석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아직 신기하기만 합니다. 벌써 4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주일 성수하고 있습니다. 네, 자랑 맞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가나안 성도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성공회를 출석하고 있는 이유는 성공회가 답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이 다할 때까지 성공회 신자로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현재로선 할 수 없습니다. 수년 전 인생의 두 번째 회심을 경험했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기존에 제가 몸담고 있던 한국 기독교 (특히 장로교단)의 민낯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기와도 일치했습니다. 쉬쉬해왔던 불안함을 더 이상 수면 아래 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못 본 체 계속 덮어두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서 ..
은혜. 저에게는 자랑하고픈 두 분의 고마운 신학 선생님이 있습니다. 저에게 신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이시죠. 해외에서는 2015-2017년에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백성의 선교’,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라는 책으로 만나게 되었던 크리스토퍼 라이트, 국내에서는 2016-2018년에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 ‘복음의 공공성’, ‘성경을 보는 눈’, ‘구약으로 읽는 부활신앙’, ‘특강 이사야’, ‘구약의 숲’, ‘특강 예레미야’로 만났던 김근주 (Keunjoo Kim) 교수입니다. 지금도 온라인에서 접근 가능한 두 분의 강의와 설교는 시간 나는대로 들으려고 노력하며, 저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데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 두 분의 책과 강의는 현실세계를 잊고 마..
그리스인을 넘어 그리스도인으로 (이성과 믿음의 조화). 모든 것에 초연하면서도,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할 수 있을까. 욕심과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믿는 자가 어느 날 문득 나타난 요정 지니 앞에서 한 가지 소원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을까. 지혜로운 자의 모습은 과연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늙어빠진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허허허, 그것도 좋고 이것도 좋겠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그저 난 자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먼”하면서 너털웃음으로 수염이나 만지작거리는 것일까. 희노애락을 상실한 상태가 과연 지혜자의 모습일까. 그러한 지혜자에게는 기적이라는 게 존재할지도 의문이다. 신비라는 걸 인정할까. 신비와 기적의 존재를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제멋대로의 상상력 정도로 치부하고 코웃음치진 ..
하나님나라. 약자의 존재는 강자에 의해 도드라지는 법입니다. 처음엔 누가 강자인지 약자인지 나누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번 나누고 나면, 그 간편한 구조를 이용해 먹으면서 그 구조를 더욱 정형화시키고 고착시키며 더더욱 탑다운의 방식, 즉 피라미드의 체제가 견고해집니다. 누군가를 밟고 자기만 집중조명 받길 바라는 인간의 사적인 마음이 공적인 체제로 발현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게 되지요. 게다가, 동시에 눈도 멀게 됩니다. 기준은 증발하고 실권을 잡은 강자들의 생각과 욕망이 기준이 되지요. 그러므로 이 시대의 회심이란 사적인 자기애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시적으로 드러난 공적 체제로 스며들어 “정상”화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눈..
사랑. “성경의 예언자들은 포로기의 백성들에게 신랄한 말을 했다. 그들은 백성의 신실하지 않음에 대해 화를 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전했고, 빈번히 사람들은 그 말씀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말할 때, 그들은 상한 마음을 가지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을 잘 알았고, 백성을 사랑했으며, 자신을 백성과 동일시했고, 백성을 바로 자기 공동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거만하고, 교만하고, 비꼬고, 절망하는 태도로 말하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그 백성을 향한 사랑과 소망에서 나온 말을 했다. 소망은 궁극적으로 사랑에 근거한다.” 182페이지에서 발췌. “우리 회중 한가운데서 그리고 우리 역사 한가운데서 예수를 높이는 데 실패하는 것은 사랑의 실패다. 바로 서로를 사랑하고..
찬양. 라디오나 유튜브에서 언제든지 접할 수 있는 CCM으로 도배된 예배에 심취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내 관심은 찬양단이 얼마나 원곡과 비슷하게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해내는지에 있었지요. 나 역시 한때는 드러머로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원곡과 비슷한 느낌의 곡을 연주할지 고민했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틀리지 않고 완벽한 곡을 재현해내기 위한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이 예배자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거라 여겼으며, 그 모든 것이 거룩한 사명이라 믿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더 아름다운 예배를 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날 곡을 얼마나 완벽하게 연주했느냐에 따라서 그 날 예배의 질이 결정나곤 했습니다. 교인들의 반응이 좋으면 성령이 뜨겁게 임재했다고 믿었으며, 박수 소리와 아멘 ..
회심. 점심을 간단히 먹고 나면, 여유 있는 날의 경우, 약 40분 가량 휴식을 취한다. 캘리포니아에 와서 좋은 점 한 가지는 눈부시게 밝고 아름다운 햇살을 멀찌감치 떨어져 한 쪽 그늘에 앉아 팔짱 끼고 바라보며 여유로움에 잠시라도 잠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난 책을 한 손에 들고 커피 한 잔과 함께 테이블 곁에 앉아있다. 모든 게 평화롭기만 한 것 같은 이 기분... 직접 참여하지 않고 방관할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있다. 현실에 직접 발을 담그지 않았을 때 누릴 수 있는 안정감이 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평안이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뿐더러, 팔짱 낀 채 쳐다보며 느끼는 만족감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기껏해야 자..
참주인. 내려놓음. 참 듣기 좋은 말. 허나,일방적인 내려놓아짐만을 당해온 나로선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 지혜자여, 선견자여.코너로 내몰릴 걸 어찌 미리 알고서 스스로 내려놓음을 감행했는가. 안다면,나에게도 알려다오.나도 미리 내려놓고 싶다. 그러나하나만 묻자. 내려놓고 싶을 때 내려놓을 수 있는 내려놓음이과연 내려놓음인가.혹시 내려놓아도 될만했기 때문 아니었는가. 항복하고 싶을 때항복해주는 항복이 진정 항복인가.혹시 항복해도 될만했기 때문 아니었는가. 자아가 죽지 않았는데!여전히 꼿 꼿 하 게살아있는데! 무슨 내려놓음이 도네이션이라도 된단 말인가. 혹시 그대는 그대의 내려놓음의 주도권도내려놓았는가? 내려놓음.내겐 너무나 여유가 느껴지는 말. 누가 주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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