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준인 정의와 불의 나는 정의가 구현되는 것보다 불의가 척결되는 장면에서 더 쾌감을 느낀다. 선한 자가 승승장구하는 것보다 악한 자가 파멸에 이르는 장면에서 더 짜릿함을 느낀다. 왜일까. 아마도 나의 모자람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나는 정의의 구현과 선한 자의 잘됨을 진심으로 바라는 것일까. 여전히 정의가 아니라 나의 유익에 부합하는 바가 구현되길 바라고, 선한 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잘되길 바라는 게 아닐까. 어쩌면 불의한 자나 악한 자의 파멸도 그들이 나의 유익에 부합하지 않거나 내 눈에 거리끼는 사람과 동일인물일 때에 한해 기뻐하는 건 아닐까. 정의의 실현과 선한 자의 잘됨을 바라는지 묻기 전에 그걸 바라는 나 자신의 상태부터 점검해야겠다.
악인과 함께 숨 쉬면서 정의를 행하기 그들은 말을 아꼈다. 상대방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쓰는 방법은 어딜 가나 동일했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뒤에서 특정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지도 않고, 특정 행동에 대해 객관적인 비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해당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축이 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 속에 혹시나 하는 부정적인 가능성을 귀신 같이 찾아내어 그들에게 다가가 자극시키고 활성화시키고 증폭시켜 그것이 마치 사실인 듯 스스로 믿게 (넘겨짚게) 만든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나는 이들을 악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철저히 무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
단순함 단순함은 종종 하나의 미덕으로 추앙받는다. 특히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고민과 갈등 가운데 갈팡지팡 하고 있거나 고민과 갈등 자체를 혐오하거나 정면승부를 피하고 언제나 도망 다니는 사람들로부터 그렇다. 단순함이 그들에겐 구원이자 가장 쉽고 편한 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과연 그 답이 그들에게 진정 답이 될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들의 성장과 성숙을 놓치게 만들고 생각할 힘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며 옹졸하고 편협하게 만드는 지름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스크루테이프가 가장 칭찬할 만한 환자의 부류가 아닐까 싶다. 그 답을 얻는 순간은 어쩌면 한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훈련을 거치지 않은 채 미성숙하고 나약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변모하는 변곡점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인생의..
쫓기지 않는 삶, 믿음의 삶 길이 막힐 때 즈음에야 왜 그 길을 걷고 있는지 묻게 된다. 처음부터 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는 순간은 전체를 돌아보게 하고 의미를 찾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완주하는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지 모른다. 실패하고 싶지 않으나, 넘어지고 싶지 않으나, 어쨌거나 인간은 낮아질 때, 넘어질 때, 멈춰질 때 그 길 위에서 비로소 자신의 좌표를 알 수 있지 않나 싶다. 쫓기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가 해내는 일의 성과와 효율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쫓기기만 할 뿐이다. 쫓기며 성공하느니 쫓기지 않는 삶을 위해 나는 실패를 택하리라. 글이 잘 써지다가 막힐 때가 있다. 두려운 순간이다. 아니..
감사하기, 누리기, 나누기 아들과 나는 다른 버스를 탄다. 십여 분 기다리다가 아들을 먼저 버스를 태워 보낸 후 나는 오늘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다시 십여 분을 기다리다가 환승했다. 영하 두 자리 숫자에서 25분 넘게 기다리며 생각했다. 나는 얼마나 편안하게 살고 있는가, 어느새 풍족함이 내 허리에 둘러진 뱃살로 자리매김한 건 아닌가, 기름진 돼지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에 답을 해보려 했다.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이 났다. 요컨대 먼저 감사하기, 그리고 누리기, 그리고 나누기, 라 할 수 있겠다. 첫 번째 ‘감사하기’가 되지 않으면 두 번째 ‘누리기’는 인생의 목적이 되기 쉽다. ‘누리기’는 때론 ‘자수성가’의 증거로..
성숙 갈수록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려내어 상대방을 교정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어지간하면 상대방을 맞추며 더 사랑하려는 내 모습이 좋다. 분별력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신비는 분별력도 넉넉히 덮는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진 기억이 있다. 날 받아준 그분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았을까. 논리와 이성만이 판단의 잣대였다면 과연 나는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은 논리와 이성을 거뜬히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바로 그게 그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일. 돌아온 탕자가 넘어서야 할 부분은 어쩌면 첫째 아들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일일지도 모른다. 눈을 들어 지경을 ..
‘나’라는 감옥 간수도 없고 문도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감옥이 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나가려 하지 않는다. 생긴 게 감옥 같지 않아서가 아니다. 감옥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고소하는 사람도 없었다. 유죄 판결을 내린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유형 살이 때문에 온 게 아니다. 한결같이 이 감옥에 갇힌 자들은 모두 자기 발로 찾아왔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은밀한 초대라도 받은 것처럼 한밤중에 하나둘씩 개인 별로 찾아왔다. 그 감옥의 이름은 ‘나’.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나’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갇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고소하지 않았고, 유죄라고 판결하지도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대장 따위는 처음부..
고백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면서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아니, ‘습관’이라기보다는 ‘도주로’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어둡게만 보이던 시절,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피할 곳이 필요했다. 처음엔 사람을 찾았다. 기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더 커져버린 상처는 관성이 되었다. 나는 더 낮은 곳으로 흘렀다. 궁여지책으로 책을 찾았다. 다행이었다. 책은 나의 피할 곳이 되어주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책에 안착했다. 내가 읽고 쓰는 이유는 팔 할이 절박함이다. 하루에 적어도 한 시간은 책을 읽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아니, 단지 ‘약속’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모자라다. 단지 독서 습관을 들이고자, 혹은 나의 게으름에 채찍질을 하고자 했던 약속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념하..
원하는 것 vs. 구할 것: 솔직한 기도란? 솔로몬의 기도는 마 6:33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 같은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닌 분별력, 듣는 마음, 지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았던 것까지 더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본문을 그릇 해석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한 마디로 기도 형식에 천착하는 부류죠. 마치 사적인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여전히 본인이 원하는 건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욕망 (이를테면 부, 명예, 성공, 인기 등)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마음에도 없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입으로 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성실한 땀: 파괴와 창조. 견디는 삶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건 성실한 땀이라 했다. 일상이 견디는 삶이라면, 성실한 땀은 일상을 유지하며 살아내는 비결이 된다. 성실한 땀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감사의 제목이 된다. 우리 주위에는 그러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웃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입을 다물고 겸허해진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이 작고 초라한 환경을 다시금 바라보며 묵묵히 또 하루의 땀을 흘린다. 언젠가부터 원하는 게 모호해졌다. 원하고 바라는 것들의 대부분이 과녁을 빗겨나간 경험을 많이 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이 필요 없다거나, 꿈을 지워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저 계획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거품을 조금씩..
오래참음의 대상. 사랑의 미분계수는 낭만일 수도 있고 빛나는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의 적분은 견딤이다, 오래참음이다. 견디고 오래참는 행위가 난 여태껏 그 대상이 상대방인 줄 알았다. 상대방을 십자가로 짊어지고 꾹꾹 참으며 자신의 인내심을 다스리는 삶이 사랑이라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요즈음 같은 텍스트를 다시 읽는다. 견디고 오래 참아야 할 대상을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으로 읽는다. 그러면 본문이 다르게 읽힌다. 찰나의 사랑은 상대방만 조명하지만, 지속된 사랑은 자신도 비춘다. 점점 실망하고 화가 나는 건 상대방이 아닌 나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래서 저항하고 전투를 벌이지만, 마침내 고요 가운데 찾아오는 깨달음은 나의 못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도 이 역할을 해줄 수 ..
기도의 목적. 마태복음 4장은 마귀의 예수 시험 사건을 광야 40일 금식기도 이후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 본문을 읽을 때, 예수의 금식기도 목적이 마치 마귀의 시험 준비인 것처럼 해석해선 곤란하다. 그 사건의 역사성을 차치하고서라도 마태복음 저자의 내러티브 전개 구도를 고려한다면, 예수의 금식기도 목적은 공생애 준비로 읽는 게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도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40일 금식까지 병행하며 행하는 집중기도의 목적이 고작 마귀 시험 따위를 대비하는 것이라면, 이는 마귀 시험의 발생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그 시험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으며, 왜 ..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중심된 삶이라기보다는 ‘내’가 중심인 삶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믿을지도 모르지만, 타자가 믿는 하나님을 경시하거나 마치 잘못 믿는 것처럼 무턱대고 비교대상으로 여긴 채 언제나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믿음을 무기 삼아 타자를 계몽시키려 한다거나 안타깝게만 여긴다면, 그 믿음이야말로 ‘내’가 중심인 삶을 반증하는 증거일 것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만 옳고 타자의 하나님은 언제나 모자라거나 잘못된 것처럼 바라보는 그 시각 자체가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관이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편협하고 이분법적이며 차별..
산 위의 동네. ‘산 위의 동네’는 산 위에 있지 않고 산 아래 세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하나님백성들이 있어야 할 곳은 고립되고 세상과 단절되어 사람들이 육신의 고개를 쳐들어야 볼 수 있는 저 높은 산 위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평등한 자리에서 똑같은 법과 규칙에 적용을 받고 똑같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사람들이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느끼게 되어 마음의 고개를 들어 마치 산 위를 쳐다보듯이 자발적인 신뢰와 존경까지도 우러러나오게 되는 장소, 즉 산 아래의 세상이 아닐까. 물론 페북 세상만을 보고 판단하기에는 성급할 것이다. 그러나 페북 세상이 세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며, 세상에서는 감출 수 있었던 모습까지도 보여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나는 페북에..
분별. 종종 약함과 악함은 같은 얼굴을 가진다. 이 곤혹스러운 순간, 분별력은 귀중한 지혜가 된다. 악함이 약함의 옷을 입고 약함의 혜택을 누리며, 숨어서 세력을 키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약함이 악함으로 오인 받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참히 짓밟히는 경우도 있다. 약함은 사라져버리고 악함만이 남는다. 전자의 경우가 당사자의 악함이 작동한 결과라면, 후자는 상대방의 악함이 작동한 결과다. 우리가 끊임없이 분별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악의 실체에 기만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자기 이익에 눈이 멀어 거짓겸손과 같은 양의 탈을 선택적으로 써가며 실체를 교묘하게 은폐하고 유지해가는 적극적인 악도 악이지만, 그 둘을 분별할 줄 몰라 악에게 늘 선수를 빼앗긴 채 악의 활동무대를 자유롭게 마련해주는 것 역시 ..
진심: God-centered humanist.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우린 무엇 때문에 공감을 할까. 단순히 눈물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세상엔 전혀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눈물도 존재한다. 그러니 아마도 그것은 진정성, 직간접적 경험을 넘어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진심이지 않을까. 나는 타인의 눈물 속에서 그 사람의 진심을 읽는다. 함께 슬프고, 함께 억울하고, 함께 안타까울 때는 그 사람의 진심이 느껴질 때다. 눈물만이 아니다. 때론 누군가의 한숨 속에서, 때론 누군가의 눈빛 가운데, 때론 누군가의 표정 속에서 나는 그 사람을 읽는다. 그 사람의 진심을 읽는다. 설계되지 않은 무언의 몸짓 속에서 우리는 서로 인간임을 느끼..
사람을 살리는 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건 사람이 살아나는 장면을 목도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며 속에서 끓어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울지 않는 내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남몰래 눈물을 훔쳤던 때는 거의 모두가 사람이 살아나거나 치유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여전하다. 난 여전히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의사가 되진 못했지만, 난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만,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로. 내 손에 메스가 아닌 펜이 있고, 내 머리엔 수술 지식이 아닌 기초적인 생물학 지식과 미천한 인문학적 지식이 있지만. 내가 가진 복음과 내가 꿈꾸는 하나님나라. 내가 이해하고 믿는 예수의 정신. 하나님..
견진 성사. 어느덧 매주 성공회에 출석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아직 신기하기만 합니다. 벌써 4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주일 성수하고 있습니다. 네, 자랑 맞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가나안 성도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성공회를 출석하고 있는 이유는 성공회가 답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이 다할 때까지 성공회 신자로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현재로선 할 수 없습니다. 수년 전 인생의 두 번째 회심을 경험했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기존에 제가 몸담고 있던 한국 기독교 (특히 장로교단)의 민낯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기와도 일치했습니다. 쉬쉬해왔던 불안함을 더 이상 수면 아래 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못 본 체 계속 덮어두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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