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 |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우리 삶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가난한 이웃에 대한 공의야말로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를 의미 있게, 하나님이 받을 만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삶을 수반하지 않는 제사는 가증하고 헛되다는 평가를 내리신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우상숭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삶이 없는 제사는 우상숭배와도 같다. 그것은 정성스럽게 제사를 드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김근주 저, '이사야 특강' 91 페이지에서 발췌. 오늘날 교회도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일터에서의 모습, 그리고 가정에서의 모습까지 모두 다른 2중, 3중의 모습으로 분열하여 살아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나라를, 즉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인 1386 페이지에 도착했습니다! 단단한 벽돌과도 같은 이 책을 올해 2월부터 무식하게 혼자서 끈질기게 읽어왔습니다. 거의 5개월이 걸렸네요. 이렇게 두꺼운 주해의 도움을 받으며 읽었지만 이해 안 되는 부분이나 와 닿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나 모세오경을 성경책으로만 읽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냥 건너뛰는 부분이 거의 없었고, 친절한 해설 덕에 이제서야 기본적인 모세오경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시작점에 선 것 같은 기분입니다. 성경책으로만 성경을 읽는 것이 얼마나 용감했던 건지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저에겐 참 좋은 훈련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봅니다. 아래에 짧은 소감을 나눕니다. 내일부턴 김근주 교수님의 이사야 특강의 도..
소명의식. 직업을 소명, 즉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는 자세는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 역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일터 현장은 작은 세상과도 같다. 어느 곳이나 피라미드 구조가 존재하며, 소위 갑질로 알려진, 가진 자들의 횡포는 지겨운 일상이 되어 식상할 정도로 사회에 만연해있다. 법과 질서를 만들어놓고 서로 지키며 개인의 이익 뿐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며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아이들 도덕 교과서에나 적혀 있는 이상일 뿐이다. 학교 시스템에서 갓 나온 아이들이 사회에 진입했을 때 겪는 그 괴리감은 지금 어른이 된 기성세대 역시 뼈아프게 공감하는 바일 테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는 어두운..
처음 방문한 새들백 교회 (Saddleback Church)에서. 어마어마한 부지, 하나의 타운을 이루고 있었다.한 teaching pastor의 메시지는 내게 인사이트를 주었다. 5월 27일, Memorial Day Weekend.Lake Forest 에 위치한 Saddleback Church 11시 예배 설교 간단 요약. 주요 성경 구절: "Do your best, prepare for the worst, then trust God to bring victory." Proverb 21:31. 첫 번째 서론 (based on Hebrews 11:1):Expect the best that will be done by God in your life. The bible calls that faith.>>> ..
죄와 하나님의 신실하심. 김회권 저, '모세오경' 중 민수기 편을 읽고.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 중 네 번째 책인 민수기 편도 다 읽었다. 책갈피는 1032 페이지를 가리키고 있다. 이제 마지막 책인 신명기 편이 남았다. 아직 약 350 페이지 남았다. 이 벽돌 같은 책을 나처럼 처음부터 죽 무식하게 읽어나가는 사람은 아마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처럼 신학의 문외한이 신학에 관심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상황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도 신학을 전공했다면 아마 부분적으로 필요한 곳만 찾아서 참고하는 정도로 이 벽돌을 대하지 않았을까. 때로는 이렇게 무식한 게 기적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거북이가 개근상을 받으며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이다. 민수기를 읽어냈으니 흔적을 남기기..
구름기둥과 불기둥. 가끔은 차라리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여달라고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가야할 때인지 서야할 때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다. 가시적인 사인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도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가만히 내 중심을 살펴보면, 많은 부분이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을 때가 많다. 사실은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것 같아서 벌써부터 염려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내 안의 성령께선 조용한 가운데 가야할 길을 알려주셨음에도, 나의 의지가 그것을 거스르고, 어떻게든 손을 써보면, 내가 선택한 방향이 하나님의 방향이라고 퉁칠 수 있는, 어떤 그럴싸한 이유..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을 느리지만 지속해서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레위기를 마쳤습니다. 사십 평생 처음으로 진지하게 레위기를 읽어봤습니다. 이제 페이지로는 830 페이지를 지나갑니다. 오늘 밤부턴 민수기로 들어갑니다.** 레위기를 읽고. 태어나 처음으로 레위기를 꽤 자세하게 읽었다.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 덕분이다. 이런 도움 없이 마흔이 되도록 수 차례 레위기를 읽어왔지만, 한 번도 마음에 와 닿거나 담긴 적이 없었다. 내게 레위기는 그저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제사법들이 지루하게 열거되어 있을 뿐이었다. 제사를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드리지 않으면 직접 출애굽 시키신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까다롭고 때론 엽기적인 궁금증으로 도배되었던 책이 ..
전투. 지금도 종종 내 안에서는 두 가지의 상반된 생각이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하나는, ‘내가 지금 이런 사소한 일에 묶여있어도 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일에도 성실히 충성을 다해야지!’하는 생각이다. 수만 번 넘게 생각했기에 낯설지 않은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것이 과연 올바른지조차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이기적인 합리화에서 오는 묘한 흥분, 그리고 그와 함께 찾아오는 기분 나쁜 죄책감에 휩싸일 때면, 어쩌면 내게 이 문제는 영원한 숙제로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가만히 이 전투를 내게서 떼어내어, 서툴지만 분석을 해보면,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언제나 그렇듯, 답을 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잡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
**어제밤,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 중 레위기에 진입했습니다. 서론에서부터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나누고 싶어 발췌했습니다. 덕분에 지루해서 항상 스킵했던 레위기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역시 성경만 읽어선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신학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레위기는 출애굽기 19:5-6, "온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지만 너희가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내게 대하여 특별한 보배가 되고 온 세계 백성들을 내게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에 대한 길고 자세한 해설이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예물 (제사)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물'을 코르반이라고 한다. ..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 중 출애굽기를 끝내고 (660페이지를 넘어갑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묵상하며 써내려간 글입니다. 오늘밤부턴 레위기로 여행을 떠납니다.** 견딤. 믿음의 고백이나 결단, 깨달음과 깨우침, 그리고 은혜 받고 감사하는 모습. 모두 찬사를 받기에 합당한 순간들이지만, 어쩌면 이것들은 전체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한낱 하나의 미분계수, 즉 순간기울기값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신앙인의 여정은 단조로운 직선코스이기보단, 계속해서 기울기가 변하여 수시로 극소와 극대점을 만들어내는, 그야말로 다차원의 곡선코스다. 우리들 중엔 이미 최소점이나 최대점을 지나온 이들도 있을 것이고, 현재 최소점을 향해 치닫고 있어 좌절과 원망, 포기의 심정으로 가득 차 있는 이도 있..
드러냄. 어두움은 빛을 받으면 사라진다. 빛의 힘이다. 빛의 존재는 어두움의 부재다.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은 굴곡을 가진다. 높음과 낮음, 깊음과 얕음이 존재한다. 빛은 높음 뒤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깊은 곳의 어두움은 건드리지 못한다. 평면 같았던 산도 빛을 받으면, 음영이 생기고 굴곡이 드러난다. 밋밋함이 사라지고, 비로소 입체가 된다.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조화, 산의 진면목이다. 우리 인간도 하나의 산이다. 평면이 아닌 입체다. 인생의 역경이 굴곡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없이 깎이기도, 움푹 패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린 빛을 늘 받는 높음 뒤의 그림자도 가지며, 빛이 닿지 못하는 깊은 골짜기도 가진다. 빛을 받았으나 아직 어두움에 머무는 그곳. 그곳엔 아..
드러남. 땅 속에 있는 씨에도 생명이 있다. 그러나 그 씨를 뿌린 농부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대지를 뚫고나와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전까지는. 드러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타인에게 보여지지 않는 생명은 살아있다 하더라도 아직 생명이라 할 수 없다. 온전한 의미의 생명이란 숨쉬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생육하고 또 번성해야 한다. 또 다른 생명을 낳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사적인 복음은 땅 속에서 숨만 쉬고 있는 씨와도 같다. 발아하지 않는다. 대지를 뚫고나오는 용기와 그에 따른 아픔을 거부한다. 홀로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생명을 주신 이의, 더 많은 생명을 잉태하는 그 생명력을 무시하고 자기만의 안위를 위하여 던져버리는 것..
예언자? 난 신비주의를 신봉하진 않지만, 그런 일이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과학적’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신비적인 경험을 하나 나누고자 한다. 내가 실제로 겪었던, 마치 본의 아니게 미래를 보게 되었던 경험. 그것도 두 차례 씩이나. 독립적인 시기와 장소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첫 번째 경험은 2012년 12월, 그러니까 우리 가족이 클리블랜드에서 살기 시작한지 1년 하고도 4개월째 접어들던 시기다. 내가 성공을 위하여 대학원생 때처럼 열심히 노오력하며 실험실에서 생활하고 있을 무렵, 아내는 지인의 도움으로 클리블랜드 클리닉 내과에서 observer로 참여하여 괜찮은 추천서를 받아냈고, 미국 레지던트 지원을 해서 매칭 ..
분리됨. 의당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둥, 목사는 이렇게 하면 더 좋았을 거라는 둥 떠들어대는 작자들과 얘기를 하는니, 차라리 시장 골목의 아줌마들과 어려운 살림살이를 가타부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더 가까워지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건물을 지어야 되니 대출까지 받아서 헌금하라고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그렇게 하면 무슨 전무후무의 축복이라도 받을 것처럼 과장해서 떠벌리고, 이젠 건물 지어놨으니 사람을 채워야 한다며 전도대폭발이니 뭐니 하며 사람들 긁어모으라고 강요하는 그런 교회 안에서 무슨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스스로 사람들의 인생과 동떨어지기를 자처하여 섬이 된 교회. 그것이 거룩함의 증거인 듯, 그 산 속에 외로이 떨어져 홀로 화려하기만한 건물. 거기에 가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하나..
한 분, 다른 이름, 다른 모습. "But there I have another name. You must learn to know me by that name. This was the very reason you were brought into Narnia, that by knowing me here for a little, you might know me better there."― C.S. Lewis, 'The Chronicles of Narnia' 성장하여 이제 더 이상 나니아로 올 수 없는 루시와 에드먼드와의 마지막 작별 순간에 아슬란이 에드먼드의 질문에 했던 대답이다. 에드먼드는 아슬란을 현실 세계에서도 만날 수 있냐고 물었었다. 그러자 아슬란이 대답했다. 현실 세계에서 아슬란은 다른 이름을 ..
**김근주 교수님의 '복음의 공공성'을 다시 읽어가고 있습니다. 잠시 멈춰서서 묵상하다가 연구소를 오가는 셔틀 버스 안에서 써내려간 글입니다.** 일상.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일상은 모든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들이 일상을 마치 뭔가 인생의 중요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나 배경 정도로 하등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간과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곧 정착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가장 안정되고 화려한 정착을 꿈꾸는 우리들의 삶은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입고 그 사람처럼 살아가려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우린 기억해야 한다. 믿음의 조상, 복음의 시작인 아브라함도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중요한 건 정착을 잘했는지, 아직도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지가 아..
프로의 인정. 며칠 전 일이다. 마침 Employee Evaluation 시즌이라 보스가 오피스로 날 불렀다. 1시간은 넘게 대화를 나눴다. 실험실 생활에서의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보스가 바라보는 내 모습, 실험실의 다른 구성원들이 평가하는 내 모습이 어떤지 들었다. 대체적으로 난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단, 가끔씩 내게서 무뚝뚝함이 보이기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미국 온지 6년 반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무의식 중에서는 나의 한국스러운 옛 자아가 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내 의도가 나쁘진 않았다고 다들 이해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조금 신경을 써서 수정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을 거라고 보스가 친절하게 귀뜸해 주었..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어제 밤 창세기 32장까지 읽었네요. 책으로는 350페이지를 지나갑니다. 오늘은 상상의 나래를 펴서 얍복 강가로 가봅니다.** 얍복 강가로.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맞닥뜨린 건 그에게 씨름을 걸어온 어떤 사람 (야곱에게 축복을 줄 수 있던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나 천사로 이해함)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건 자신의 옛 자아와의 만남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숙명적인 만남이 얍복 강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에서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먼저 자신이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 만한 일을 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20년 만에 찾아온 불청객과도 같은 과거의 죄..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어제 밤 창세기 26장까지 읽었네요. 책으로는 300페이지 고지가 보입니다. 오늘은 상상의 나래를 펴 모리아 산으로 가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지켜봅니다.** 모리아 산으로. 누군가가 말했듯, 모리아 산 위에서 기절초풍할 만큼 가장 놀랐던 존재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아닌 하나님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난 동의한다. 그리고 그 놀라웠던 짧은 순간에 함께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가장 안도의 한 숨을 내쉰 존재는 아마도 수풀에 뿔이 걸린 채 조용히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던 또 다른 존재, 숫양이 아니었을까. 결박된 이삭을 잡으려고 칼을 높이 치켜들었을 때 아브라함을 성급히 부르시며 급제동을 거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모든 걸 다 아시고 어디에나 계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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