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함을 담아내는 유한함. 아름답고 소중한 진리를 운율이라는 구속된 형식에 담아 표현하는 시인처럼, 우리는 정의와 공의가 사랑으로 행해지는 나라를 제한된 우리의 일상에 담아 표현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이다. 영원한 가치를 어찌 형식이라는 제한된 틀에 우겨넣을 수 있을까 싶지만, 유한한 육신을 가지고 영원을 ‘지금, 여기’로 소환하여 살아내는 우리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다. 유한함이 영원함을 담아내며 그것을 보고 바라게 해주는 이 아이러니, 그리고 거기서 아름다움에 눈물 짓는 우리는 무한한 사랑의 수혜자다. 작은 흔적만이라도 내게 주어진 삶을 통해 그 영원한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웃사랑일 것이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이 되어 예수로 나타난 성육신 사건, 은혜와..
환대와 구별됨에 대한 묵상. 낯익은 사람에게만 환대를 베푼다면, 그것이 진정한 환대일까? 낯선 이에게 베푸는 환대, 이는 곧 ‘낯선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대하는 사랑의 실천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내도록 되어있다. 교회 안에서 난 사람들과 체면을 내려놓고 세상의 계급장 다 떼놓고 속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교회에 와서 교제할 때조차 날씨 얘기며 아이들 얘기며 연예인이나 티비 프로그램을 얘기하며 시간을 떼우고 싶진 않았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을 해선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당연히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관계의 낯섦을 낯익음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로만 사용되고, 시간이 지나도 더 깊은 얘기나 진실된 얘기로 발전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기에..
작은 시작. ‘낯선 타인’의 존재를 배우면서 우린 어른이 된다. 그러나 그 ‘낯선 타인’이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불행하게도 이를 못 깨달았다는 말은 곧 ‘낯선 타인’을 이웃이 아닌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원점에서 ‘낯선 타인’을 경쟁상대냐 이웃이냐를 선택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낯선 타인’을 경쟁상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사랑을 행한다는 말은 단순히 착한 일을 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혁명이다. 타인을 경쟁 상대로 보지 않고 함께 가야 할 동료로 인식할 수 있다면, 사랑할 이웃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세계관은 혁명가의 눈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는 본래 혁명적인 세계관을 부여하고 있었던 ..
생명. 신은 영원한 휴식처가 아니라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는 우리가 미래에 이를 목적지이기보다는 현재의 살아있는 일상이어야 한다.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지 않고, 언젠간 취할 영혼의 휴식을 위해 불태우고 희생시켜버리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신을 소멸시키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기억하자. 살아있다는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생명을 가졌다면, 우리의 일상은 살아있어야 한다. **사진은 헌팅턴 라이브러리에서 찍은 사진.**첫 번째 문장은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에서 발췌.
살리는 일. 작은 땅이면 족하다. 거기에 씨를 뿌려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보기 위해선. 작은 생명 하나 살리는 사랑을 맛보지 않고 큰 밭만을 가지길 원한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생명은 과연 확률로 존재하는 것인가. 사업 규모 확장하듯 그렇게 큰 밭을 가져서 함부로 씨만 뿌려대면 되는 것인가. 화 있을진저. 경제의 논리로 생명 살리는 일을 맡은 자여. 그렇게 파이를 크게 해서 당신이 얻은 곡식 수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하라. 당신은 생명을 살리는 자인가, 죽이는 자인가. 당신이 이룬 대량생산의 이면에 대량살생이 있다면, 당신이 살린 생명의 수는 무슨 의미인지 말하라. 한 생명 살리는 일도 귀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 일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엔 한 생명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살려냈다는 의미가..
함께 하심.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라는 말에 익숙하다. 자기중심적이고 쫓기는 삶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기 위하여 모든 걸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나님과 함께 해야 그분에게 모든 걸 맡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기 위해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무턱대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온 우주에도 계시고 내 마음 속에도 계신다는, 교회에서 주워들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살면서 진정 쉼이 필요할 때면 우린 진지하게 하나님의 위치를 찾게 되는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교리로 뻔히 알면서도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건 도대체 무..
이름. 어릴 적 교회에서 종종 있었던 성경퀴즈대회에서는 빵점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답을 모두 알고 일부러 오답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정답란에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적으면 반타작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하지 않고 상 받기 바라는 아이들은 너무 빨리 하나님이나 예수님 이름을 부른다. 위기나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인이라면 모두 하나님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자초지종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하나님의 이름만 불러댄다면, 그건 마치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성경퀴즈의 답으로 적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려움 뿐만이 아니다. 혹시 우린 모든 일 앞에서 너무도 쉽게 모든 걸 그냥 덮어놓..
토로. 복음이 한 사람의 자상함과 좋은 인격에 갇혀버린 듯한 장면. 비극 아닐까. 듣기는 좋지만 두리뭉실하기만 한 말들의 대잔치. 그 분에게 이 세상은 진공상태에 불과한 듯하고, 자신의 경험에 모든 것들이 제한되어 있어, 그저 고생 별로 해보지 않은 연장자의 교과서적인 덕담 정도의 조언이 설교의 수준이라면, 난 묻는다. 복음은 무엇인가. 선함만이 복음의 열매라면, 인상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만이 복음의 체화된 결과라면, 기독교의 구별됨은 무엇인가. 그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뜻을 찾는 건 주관적인 해석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해석자의 몫일 뿐, 설교자가 이런 것만을 바란다면 그건 직무유기. 차라리 설교를 하지 말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던지. 부드러움과 친절함의 옷을 입었지만, ..
풍성한 앎의 여정. 오늘은 메노나이트 예배에 참석을 했다. 누군가는 내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메노나이트가 이단이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참석한 예배에선 온전히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주님이라는 진리가 주저없이 선포되고 있었고, 성부성자성령의 하나되심의 교리가 기본으로 깔려있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이방인이자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고 있었다. 만민을 향한, 만민을 향해야만 할 복음이 사리사욕을 위하거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을 위하는, 즉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peacekeeping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화와 정의, 회복, 위로, 중재와 화해의 메시지가 되어 설교자의 입에서 힘있게 흘러나와 온 교회를 물들이고 있었다. 즉, Peacemaking이나 pe..
갈등전환, 그리고 번역작업 맛보기. 번역의 맛을 조금 보니 번역이란 게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일상생활에서 비교적 불편하지 않게 사용할 줄 안다고 해서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내가 영어를 한국어보다 훨씬 못하기에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번역 경험이 있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그리 틀리진 않은 것 같다. 번역은 그저 한 언어에서 다른 한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텍스트의 깊은 해석과 컨텍스트의 풍성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쓰여지는 또 다른 차원의 글쓰기이다. 두 언어는 두 문화이며, 그 서로 다른 두 문화를 매개하는 언어 이면에 내재된 정서를 포함한다. 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번역은 결코 쉬운 게 아닐 것..
예배. 날 맞이한 묵직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는 예배당의 높은 천장까지 가득 메우며 풍성한 음을 내고 있었다. 언제 들어도 영혼을 울리는듯한 그 소리는 내 마음을 또다시 열어젖히고 관통했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난 순식간에 얼어붙는 기분과 함께 숙연해진 마음으로 어느새 경건한 자가 되어 있었다. 내 눈은 표면이 아닌 심연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내 영혼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정경 (Paul Kyung Jung) 집사님의 배려 덕분에 두 번째로 뵙는 곽건용 (Gunyong Kwak) 목사님과 처음 뵈었던 이유진 (Yoojin Lee) 집사님은 이미 내가 오늘 방문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난 마치 예약해놓은 손님처럼 따뜻한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제어된 찔림.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것의 유입을 거창하게 환영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자신을 열어젖히는 행위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의 용기있는 도약이기에 자신을 닫아두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이는 자아로 통하는 내면의 문에 평생 걸쇠를 걸어둔 채 살아가다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런 시기를 맞이하는 건 축복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들의 유입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대체하거나 수정, 보완하지 않는다면 결코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몸과 하나가 되어버린 일상의 행위들의 재정비에 있습니다. 그것은 리모델링이 될 수도 있고 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원래 것들이 부서지고..
가짜. 의외의 적은 같은 편에 있습니다. 모든 진리와 훈계의 말에 동의와 지지를 하지만, 자신은 지금 정도면 그런대로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빗발치는 총알도 모두 자신들을 빗겨가리라 여깁니다. 자신들이 안전지대에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함께 정의를 외치고 악을 배격한다고 해서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교만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길 때 조용히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인일 뿐입니다. 교만을 배격하면서도 교만할 수 있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불의할 수 있습니다. 수치와 죄책감이 사라지고 분노만 남은 의인은 의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칭해진 것일 뿐이니까요. 본인을 의인으로 상대방을 죄인으로 나누는 순간, 그리고 스스로 의인..
벽을 넘어서. 파사데나 과신대 10월 모임 후기. 과거엔 많은 것들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들을 밝힐만한 지식과 기술이 부재했다. 문명의 발달은 이를 가능케 해주었다. 그로 인해 인간의 호기심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미신적인 믿음 또한 점차 사라져갔다. 과학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많은 것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치며, 과거의 몇몇 천재들이 착상해낸 가설이 시대를 앞선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기도 하고, 이와 반대로 여러 관측과 실험을 통하여 그 가설이 그저 상상력의 발현으로만 남게된 경우도 있다. 많은 천재들의 직관도 시대를 뛰어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는 이유는 전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검증과정이 수도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과..
Perhaps. 수백명 이상의 전체 교인 평균 연령이 약 27세이며, Hollywood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 Mosaic에 방문하여 오전 예배에 참석했다. 주차나 예배 안내를 하는 사람들도 모두 20대였다. 대형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교회에는 그렇게나 부족한 허리 연령대가 여기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 마치 대학청년부 예배에 참석한 것같이 다시 젊어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예배의 시작은 온몸이 쿵쿵 울릴만큼 증폭되어 ccm을 리드하는 드럼 소리였다. 모든 잡음들을 흡수해 버릴 것만 같았다. 콘서트 무대 앞쪽에 배치된 커다란 스피커 앞에 앉아있는 기분이라고 하면 그때 내가 느꼈던 심정을 그나마 비슷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설교는 사무엘상 14장 6절이 핵심이었다. Jonathan said to hi..
더 큰 고통? 알고보면 사연 없는 사람 없다. 멀쩡하게 아무 일 없이 사는 사람 같아보여도 술 한 잔 기울이며 속에 있는 말 나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연이 있다. 그로부터 얻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들도 많고, 그 상처가 지금의 그 사람 캐릭터를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어른이 되는 과정 중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면서 과거에 받았던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상처 없는 사람 없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평등하다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권리와 의무를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의 존재는 모두 불완전하고 유한하다. 존재의 신비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이 불완전한 다양성에서부터 기인할지도 모르겠다.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회심을 경험했다는, ..
유진 피터슨을 읽다 - 교회에 대하여. 유진 피터슨의 책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글의 깊이와 수려한 필체는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필립 얀시보다 유진 피터슨이 좋다.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을 읽고 있다. 한 동안 이런저런 일로 끊겨서 계속해서 미뤄졌던 책인데, 이번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집어들었다. 이 책은 꼭 읽고 감상문을 써야지. Paul Kyung Jung 집사님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유진 피터슨을 만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모르겠다. 감사드린다. 아래에 오늘 점심 먹다가 내게 쏙 들어온, 줄 그어놓은 문장들을 옮겨놓는다 (교회에 관한 부분이다). 내게 왔던 울림이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p74.| 교회..
판단하지 않는 곳. 사람이 nice하다고 해서 greedy하지 않다는 법은 없다. 종종 이 두 가지 캐릭터는 당황스럽게도 동일 인물에게서 발견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대할 때마다 난 그 사람에 대해 실망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내 안에 고정되어 있었던 선입관, 즉 nice와 greedy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섬뜩한다. 이런 의외의 순간들은 예언자적인 메시지가 되어 우리 안에 잘못 뿌리내린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이다. 어떤 사람은 rigid하지만 humble하다. 또 어떤 사람은 stubborn하지만 sacrificial하다. 의외로 우리 주위엔 우리의 선입관에 어긋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일면만 보고서 사람을 판단해선 결코 안되는 이유다. 우리의 선입관은 다음과..
해소. 지적인 호기심이 잉태한 이성적인 깨달음으로부터 가슴이 뛸만큼 강렬하게 감정까지 터치 당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확 사로잡히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살면서 좀처럼 겪기 힘든 이런 순간들은 우리의 고질적이고 편협했던 마음과 생각을 해방시켜 자유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개인적으로 예전에는 이런 순간들을 예배 때 가끔 경험하곤 했다. 교만했던 내가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부끄러워지는 단계를 거쳐, 그런 내 모습도 받아주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헤세드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회개하는 순간들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난 점점 교회에서 목이 마르다. 교회 공동체에서 채우려했던 갈증은 슬프게도 그곳에서 채워지지 않는다. 교회력과 세상력에 따라 치러지는 수많은 행사들에서 남는 건 빛바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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