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저에게는 자랑하고픈 두 분의 고마운 신학 선생님이 있습니다. 저에게 신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이시죠. 해외에서는 2015-2017년에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백성의 선교’,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라는 책으로 만나게 되었던 크리스토퍼 라이트, 국내에서는 2016-2018년에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 ‘복음의 공공성’, ‘성경을 보는 눈’, ‘구약으로 읽는 부활신앙’, ‘특강 이사야’, ‘구약의 숲’, ‘특강 예레미야’로 만났던 김근주 (Keunjoo Kim) 교수입니다. 지금도 온라인에서 접근 가능한 두 분의 강의와 설교는 시간 나는대로 들으려고 노력하며, 저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데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 두 분의 책과 강의는 현실세계를 잊고 마..
그리스인을 넘어 그리스도인으로 (이성과 믿음의 조화). 모든 것에 초연하면서도,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할 수 있을까. 욕심과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믿는 자가 어느 날 문득 나타난 요정 지니 앞에서 한 가지 소원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을까. 지혜로운 자의 모습은 과연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늙어빠진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허허허, 그것도 좋고 이것도 좋겠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그저 난 자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먼”하면서 너털웃음으로 수염이나 만지작거리는 것일까. 희노애락을 상실한 상태가 과연 지혜자의 모습일까. 그러한 지혜자에게는 기적이라는 게 존재할지도 의문이다. 신비라는 걸 인정할까. 신비와 기적의 존재를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제멋대로의 상상력 정도로 치부하고 코웃음치진 ..
하나님나라. 약자의 존재는 강자에 의해 도드라지는 법입니다. 처음엔 누가 강자인지 약자인지 나누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번 나누고 나면, 그 간편한 구조를 이용해 먹으면서 그 구조를 더욱 정형화시키고 고착시키며 더더욱 탑다운의 방식, 즉 피라미드의 체제가 견고해집니다. 누군가를 밟고 자기만 집중조명 받길 바라는 인간의 사적인 마음이 공적인 체제로 발현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게 되지요. 게다가, 동시에 눈도 멀게 됩니다. 기준은 증발하고 실권을 잡은 강자들의 생각과 욕망이 기준이 되지요. 그러므로 이 시대의 회심이란 사적인 자기애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시적으로 드러난 공적 체제로 스며들어 “정상”화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눈..
사랑. “성경의 예언자들은 포로기의 백성들에게 신랄한 말을 했다. 그들은 백성의 신실하지 않음에 대해 화를 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전했고, 빈번히 사람들은 그 말씀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말할 때, 그들은 상한 마음을 가지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을 잘 알았고, 백성을 사랑했으며, 자신을 백성과 동일시했고, 백성을 바로 자기 공동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거만하고, 교만하고, 비꼬고, 절망하는 태도로 말하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그 백성을 향한 사랑과 소망에서 나온 말을 했다. 소망은 궁극적으로 사랑에 근거한다.” 182페이지에서 발췌. “우리 회중 한가운데서 그리고 우리 역사 한가운데서 예수를 높이는 데 실패하는 것은 사랑의 실패다. 바로 서로를 사랑하고..
찬양. 라디오나 유튜브에서 언제든지 접할 수 있는 CCM으로 도배된 예배에 심취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내 관심은 찬양단이 얼마나 원곡과 비슷하게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해내는지에 있었지요. 나 역시 한때는 드러머로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원곡과 비슷한 느낌의 곡을 연주할지 고민했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틀리지 않고 완벽한 곡을 재현해내기 위한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이 예배자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거라 여겼으며, 그 모든 것이 거룩한 사명이라 믿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더 아름다운 예배를 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날 곡을 얼마나 완벽하게 연주했느냐에 따라서 그 날 예배의 질이 결정나곤 했습니다. 교인들의 반응이 좋으면 성령이 뜨겁게 임재했다고 믿었으며, 박수 소리와 아멘 ..
회심. 점심을 간단히 먹고 나면, 여유 있는 날의 경우, 약 40분 가량 휴식을 취한다. 캘리포니아에 와서 좋은 점 한 가지는 눈부시게 밝고 아름다운 햇살을 멀찌감치 떨어져 한 쪽 그늘에 앉아 팔짱 끼고 바라보며 여유로움에 잠시라도 잠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난 책을 한 손에 들고 커피 한 잔과 함께 테이블 곁에 앉아있다. 모든 게 평화롭기만 한 것 같은 이 기분... 직접 참여하지 않고 방관할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있다. 현실에 직접 발을 담그지 않았을 때 누릴 수 있는 안정감이 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평안이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뿐더러, 팔짱 낀 채 쳐다보며 느끼는 만족감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기껏해야 자..
참주인. 내려놓음. 참 듣기 좋은 말. 허나,일방적인 내려놓아짐만을 당해온 나로선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 지혜자여, 선견자여.코너로 내몰릴 걸 어찌 미리 알고서 스스로 내려놓음을 감행했는가. 안다면,나에게도 알려다오.나도 미리 내려놓고 싶다. 그러나하나만 묻자. 내려놓고 싶을 때 내려놓을 수 있는 내려놓음이과연 내려놓음인가.혹시 내려놓아도 될만했기 때문 아니었는가. 항복하고 싶을 때항복해주는 항복이 진정 항복인가.혹시 항복해도 될만했기 때문 아니었는가. 자아가 죽지 않았는데!여전히 꼿 꼿 하 게살아있는데! 무슨 내려놓음이 도네이션이라도 된단 말인가. 혹시 그대는 그대의 내려놓음의 주도권도내려놓았는가? 내려놓음.내겐 너무나 여유가 느껴지는 말. 누가 주인인가.
영원함을 담아내는 유한함. 아름답고 소중한 진리를 운율이라는 구속된 형식에 담아 표현하는 시인처럼, 우리는 정의와 공의가 사랑으로 행해지는 나라를 제한된 우리의 일상에 담아 표현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이다. 영원한 가치를 어찌 형식이라는 제한된 틀에 우겨넣을 수 있을까 싶지만, 유한한 육신을 가지고 영원을 ‘지금, 여기’로 소환하여 살아내는 우리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다. 유한함이 영원함을 담아내며 그것을 보고 바라게 해주는 이 아이러니, 그리고 거기서 아름다움에 눈물 짓는 우리는 무한한 사랑의 수혜자다. 작은 흔적만이라도 내게 주어진 삶을 통해 그 영원한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웃사랑일 것이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이 되어 예수로 나타난 성육신 사건, 은혜와..
환대와 구별됨에 대한 묵상. 낯익은 사람에게만 환대를 베푼다면, 그것이 진정한 환대일까? 낯선 이에게 베푸는 환대, 이는 곧 ‘낯선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대하는 사랑의 실천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내도록 되어있다. 교회 안에서 난 사람들과 체면을 내려놓고 세상의 계급장 다 떼놓고 속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교회에 와서 교제할 때조차 날씨 얘기며 아이들 얘기며 연예인이나 티비 프로그램을 얘기하며 시간을 떼우고 싶진 않았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을 해선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당연히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관계의 낯섦을 낯익음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로만 사용되고, 시간이 지나도 더 깊은 얘기나 진실된 얘기로 발전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기에..
작은 시작. ‘낯선 타인’의 존재를 배우면서 우린 어른이 된다. 그러나 그 ‘낯선 타인’이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불행하게도 이를 못 깨달았다는 말은 곧 ‘낯선 타인’을 이웃이 아닌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원점에서 ‘낯선 타인’을 경쟁상대냐 이웃이냐를 선택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낯선 타인’을 경쟁상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사랑을 행한다는 말은 단순히 착한 일을 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혁명이다. 타인을 경쟁 상대로 보지 않고 함께 가야 할 동료로 인식할 수 있다면, 사랑할 이웃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세계관은 혁명가의 눈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는 본래 혁명적인 세계관을 부여하고 있었던 ..
생명. 신은 영원한 휴식처가 아니라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는 우리가 미래에 이를 목적지이기보다는 현재의 살아있는 일상이어야 한다.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지 않고, 언젠간 취할 영혼의 휴식을 위해 불태우고 희생시켜버리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신을 소멸시키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기억하자. 살아있다는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생명을 가졌다면, 우리의 일상은 살아있어야 한다. **사진은 헌팅턴 라이브러리에서 찍은 사진.**첫 번째 문장은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에서 발췌.
살리는 일. 작은 땅이면 족하다. 거기에 씨를 뿌려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보기 위해선. 작은 생명 하나 살리는 사랑을 맛보지 않고 큰 밭만을 가지길 원한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생명은 과연 확률로 존재하는 것인가. 사업 규모 확장하듯 그렇게 큰 밭을 가져서 함부로 씨만 뿌려대면 되는 것인가. 화 있을진저. 경제의 논리로 생명 살리는 일을 맡은 자여. 그렇게 파이를 크게 해서 당신이 얻은 곡식 수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하라. 당신은 생명을 살리는 자인가, 죽이는 자인가. 당신이 이룬 대량생산의 이면에 대량살생이 있다면, 당신이 살린 생명의 수는 무슨 의미인지 말하라. 한 생명 살리는 일도 귀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 일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엔 한 생명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살려냈다는 의미가..
함께 하심.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라는 말에 익숙하다. 자기중심적이고 쫓기는 삶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기 위하여 모든 걸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나님과 함께 해야 그분에게 모든 걸 맡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기 위해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무턱대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온 우주에도 계시고 내 마음 속에도 계신다는, 교회에서 주워들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살면서 진정 쉼이 필요할 때면 우린 진지하게 하나님의 위치를 찾게 되는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교리로 뻔히 알면서도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건 도대체 무..
이름. 어릴 적 교회에서 종종 있었던 성경퀴즈대회에서는 빵점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답을 모두 알고 일부러 오답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정답란에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적으면 반타작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하지 않고 상 받기 바라는 아이들은 너무 빨리 하나님이나 예수님 이름을 부른다. 위기나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인이라면 모두 하나님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자초지종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하나님의 이름만 불러댄다면, 그건 마치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성경퀴즈의 답으로 적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려움 뿐만이 아니다. 혹시 우린 모든 일 앞에서 너무도 쉽게 모든 걸 그냥 덮어놓..
토로. 복음이 한 사람의 자상함과 좋은 인격에 갇혀버린 듯한 장면. 비극 아닐까. 듣기는 좋지만 두리뭉실하기만 한 말들의 대잔치. 그 분에게 이 세상은 진공상태에 불과한 듯하고, 자신의 경험에 모든 것들이 제한되어 있어, 그저 고생 별로 해보지 않은 연장자의 교과서적인 덕담 정도의 조언이 설교의 수준이라면, 난 묻는다. 복음은 무엇인가. 선함만이 복음의 열매라면, 인상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만이 복음의 체화된 결과라면, 기독교의 구별됨은 무엇인가. 그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뜻을 찾는 건 주관적인 해석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해석자의 몫일 뿐, 설교자가 이런 것만을 바란다면 그건 직무유기. 차라리 설교를 하지 말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던지. 부드러움과 친절함의 옷을 입었지만, ..
풍성한 앎의 여정. 오늘은 메노나이트 예배에 참석을 했다. 누군가는 내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메노나이트가 이단이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참석한 예배에선 온전히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주님이라는 진리가 주저없이 선포되고 있었고, 성부성자성령의 하나되심의 교리가 기본으로 깔려있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이방인이자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고 있었다. 만민을 향한, 만민을 향해야만 할 복음이 사리사욕을 위하거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을 위하는, 즉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peacekeeping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화와 정의, 회복, 위로, 중재와 화해의 메시지가 되어 설교자의 입에서 힘있게 흘러나와 온 교회를 물들이고 있었다. 즉, Peacemaking이나 pe..
갈등전환, 그리고 번역작업 맛보기. 번역의 맛을 조금 보니 번역이란 게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일상생활에서 비교적 불편하지 않게 사용할 줄 안다고 해서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내가 영어를 한국어보다 훨씬 못하기에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번역 경험이 있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그리 틀리진 않은 것 같다. 번역은 그저 한 언어에서 다른 한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텍스트의 깊은 해석과 컨텍스트의 풍성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쓰여지는 또 다른 차원의 글쓰기이다. 두 언어는 두 문화이며, 그 서로 다른 두 문화를 매개하는 언어 이면에 내재된 정서를 포함한다. 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번역은 결코 쉬운 게 아닐 것..
예배. 날 맞이한 묵직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는 예배당의 높은 천장까지 가득 메우며 풍성한 음을 내고 있었다. 언제 들어도 영혼을 울리는듯한 그 소리는 내 마음을 또다시 열어젖히고 관통했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난 순식간에 얼어붙는 기분과 함께 숙연해진 마음으로 어느새 경건한 자가 되어 있었다. 내 눈은 표면이 아닌 심연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내 영혼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정경 (Paul Kyung Jung) 집사님의 배려 덕분에 두 번째로 뵙는 곽건용 (Gunyong Kwak) 목사님과 처음 뵈었던 이유진 (Yoojin Lee) 집사님은 이미 내가 오늘 방문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난 마치 예약해놓은 손님처럼 따뜻한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제어된 찔림.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것의 유입을 거창하게 환영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자신을 열어젖히는 행위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의 용기있는 도약이기에 자신을 닫아두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이는 자아로 통하는 내면의 문에 평생 걸쇠를 걸어둔 채 살아가다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런 시기를 맞이하는 건 축복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들의 유입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대체하거나 수정, 보완하지 않는다면 결코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몸과 하나가 되어버린 일상의 행위들의 재정비에 있습니다. 그것은 리모델링이 될 수도 있고 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원래 것들이 부서지고..
가짜. 의외의 적은 같은 편에 있습니다. 모든 진리와 훈계의 말에 동의와 지지를 하지만, 자신은 지금 정도면 그런대로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빗발치는 총알도 모두 자신들을 빗겨가리라 여깁니다. 자신들이 안전지대에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함께 정의를 외치고 악을 배격한다고 해서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교만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길 때 조용히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인일 뿐입니다. 교만을 배격하면서도 교만할 수 있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불의할 수 있습니다. 수치와 죄책감이 사라지고 분노만 남은 의인은 의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칭해진 것일 뿐이니까요. 본인을 의인으로 상대방을 죄인으로 나누는 순간, 그리고 스스로 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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