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스토예프스키: 통속과 심오의 혼종, 돈의 위력. 석영중 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읽고. 2년 넘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오면서 나에게 각인이 될 만큼 강한 흔적을 남긴 그의 인상은 무엇보다 인간 본성의 심연을 파헤친 심오한 심리학자의 이미지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성과 속이 함께 하는 인간의 이율배반성은 그의 모든 작품 안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어쩌면 너무나 천박해서 감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인간의 바닥 심성까지 있는 그대로 표현된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 어느새 자신 안에도 동일하게 내재된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인지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톨스토이 역시 인간 본성을 깊이 들여다본 혜안을..

상상력: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위한 다리. 김진혁 저, ‘순전한 그리스도인’을 읽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어 인간의 불완전성을 단박에 증명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나마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신비한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육체에 갇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인 신을 인지하고 알아가는 과정도 우리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상력은 이미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암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이..

또 다른 지옥: 희망 없는 노예 된 삶.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노름꾼’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을 때마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심리에 대한 그의 탁월한 묘사 때문이다. 마치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여다본 것 같은 깊은 통찰은 그만의 고유한 필체까지 탄생시켰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열매를 깊게 한입 베어 물어 맛을 본 독자라면 그의 중독성 강한 필체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이해할 것이다. 나 역시 그 마력에 기꺼이 길들여지기를 자처한 독자 중 하나로서 그의 작품세계를 2년째 여행 중이다. 일반적인 소설가는 중요한 등장인물을 문제에 빠뜨리고 결국에는 구원을 베푼다. 위기 가운데 그 인물이 점점 무너져가는 과정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뒤, 절정에 이르러서는 무..

가정과 개인의 행복: 그 조건과 이유, 갈등과 균형에 대하여. 레프 톨스토이 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한참을 망설였다. 아직도 책상 위에는 쌓으면 하나의 큰 벽돌이 될 만큼 두꺼운 책 세 권이 층층이 놓여 있고, 눈 앞에 펼쳐진 흰 바탕의 워드 파일은 세 시간째 커서만 깜빡이고 있다. 무언가를 써야만 한다는 기분 좋은 의무감에 취해 있으면서도, 나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컴퓨터 스크린만 바라보고 있다. 마흔 언저리,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 여정에서 나는 꽤 많은 문학작품을 만났다. 그중 나를 꼼짝 못 하게 매료시킨 작품을 꼽아보면 그리 많진 않다. 모든 문학작품은 저마다 고유한 사상과 정서를 담고 있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그 무언가를 깊숙이 건드려..

이성과 논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움베르토 에코 저, ‘장미의 이름’을 읽고. 평범한 추리소설의 경계를 가뿐히 허물어버리는 듯한 이 범상치 않은 작품은 역사는 물론 기호학, 과학, 철학, 신학까지 모두 한상에 올려 성찬을 베푼다. 탄탄한 플롯은 스릴감 넘치는 전개와 더불어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약 900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소비되는 물리적 시간마저도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새 꿈만 같은 추억으로, 그래서 다시 꾸고 싶은 꿈처럼 기억되는 작품이다. 소장 가치, 재독 가치가 충분하다. 단, 중세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만약 다시 읽게 될 경우, 당대 주요 철학과 신학의 흐름을 미리 간단하게라도 공부해 놓거나, 이 책에 대한 해제가 담긴 ‘장미의..

열등감 심연에 있는 쾌락.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울과 절망? 수치와 모욕? 소외와 단절? 모두 아니다. 그런 것들은 얕은 곳에 위치해 있어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모습일 뿐이다.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가장 깊은 곳엔 ‘쾌락’이 있다. 그 쾌락의 맛을 본 작품 속 주인공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떤 은밀한, 비정상적인 비열함에서 오는 쾌감을 느꼈고, 어떤 기분 나쁜 뻬쩨르부르그의 밤에 방구석으로 돌아와서는 오늘 또다시 추잡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리고 저지른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했으며, 이것으로 인해 내면적으로 은밀하게 자신을 갉아먹고, 갉아먹으..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재해석된 아담의 신학적 의미. 피터 엔즈 저, ‘아담의 진화’를 읽고. 이 책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아담의 진화’라니! 게다가 저자가 피터 엔즈다. 예상컨대, 그동안 한국의 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에겐 이 두 가지 (제목과 저자)가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조금만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둘 다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아담의 진화’는, 저자가 서론에서 명확하게 밝히듯, ‘아담이 진화했다’라는 말이 아니라 ‘아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진화했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목만 보고 불경함을 느낀 나머지 이 책을 포기한 사람은 십중팔구 진화라는 단어에 대해 반지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잘못된 확신을 가졌을 가능성이..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 미야모토 테루 저, ‘환상의 빛’을 읽고. 강렬한 잔상에 의지하여 급하게 써 내려가는 글도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니지만, 그 거친 글을 묵히고 묵히면서 실 같은 잔상만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수정을 가하며 만들어지는 글은 한층 더 깊이를 가지는 법이다. 원석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발견된 뒤 거치는 숱한 정제 과정을 초고에서 퇴고로 진행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과정을 거쳐 탄생한 글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독자의 마음을 보다 깊숙이, 정확하게, 그리고 단번에 찌르기 때문이다. 살면서 그런 글들을 만난다는 건 값지고 멋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좀처럼 당해내지 못하는 글은 한결같이 놀라운 절제력을 가진 글들이다. 절제의 미학이랄까. 급하게..

슬픔: 기억과 집착이 만든 섬. 모니카 마론 저, ‘슬픈 짐승’을 읽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 낮은 곳에서 용기 내어 나선 길. 그 길 위에서 좋은 길잡이를 만난다는 건 반가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설 즈음, 마치 사춘기를 다시 시작하듯 발걸음을 뗀 독서 여정에서 나에게 신형철은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다. 약 2년에 걸쳐 그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추천한 작품 중 열 권을 읽어 오면서 어느새 내 안에선 조용히 그에 대한 신뢰가 생겨 버렸고, 급기야 나는 책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추천도서 이외에도 그가 각 꼭지에서 다룬 작품 중 마음에 와 닿았던 것부터 하나씩 기회가 되는 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도 그 새로운 여정에서 만난 작품 중 하나다...

풍성한 깊이를 가진 신앙. 이정일 저,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를 읽고. 마흔 언저리,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면서 신앙에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확신에 차 있던 많은 것들이 손가락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의심의 구렁텅이로 떨어졌습니다. 그곳은 어두웠고 저는 외로웠습니다. 자발적 고독이 아닌 강압적 고독을 홀로 견뎌내야 한다는 건 인간의 강함을 훌쩍 넘어서는 영역의 일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보편적인 광야의 이점을 일반화시켜 현재 광야에 처한 모든 개별적인 사람에게 함부로 설파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광야에 처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광야를 다 통과하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내려놓는 게 아니라 내려놓아짐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어떤 새로운 힘을 형성하는 포기가 아닌 죽음을 상..

소설: 방법 이전에 자질. 제임스 설터 저,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읽고. ‘가벼운 나날’을 읽게 되었던 건 전적으로 신형철의 추천 때문이다. 약 2년 전부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조금씩 틈나는 대로 읽어오면서 그가 쓴 꼭지 하나하나, 아니 문장 하나하나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그의 글을 넘어 신형철이란 사람 자체를 신뢰하게 되었다. 진정성 있는 글은 한 번도 못 만나본 사람끼리의 신뢰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평소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에 대해선 상당히 조심하는 편인데도, 그동안 조금씩 견고히 쌓여온 신뢰 덕분에 나는 그가 추천한 책 목록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이었다. 그가 쓴 추천사를 읽고 나서 나는 반드시 이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일종의 의무..

후퇴가 전진이 되다. C. S. 루이스 저, ‘순례자의 귀향’을 읽고. 이 책의 원제는 Pilgrim’s Regress. 저 유명한, 존 번연의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천로역정이 17세기 작품이라면, ‘순례자의 귀향’은 20세기 천로역정인 셈이다. 그것도 루이스의 향기가 짙게 배인 천로역정이다. 재미있게도 두 작품의 플롯은 흡사하지만 (당연하다. 루이스가 천로역정 플롯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제목에 사용된 두 단어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Progress가 ‘전진’을 뜻하는 반면, Regress는 ‘후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천국으로 가는 길이 직선 코스라고 가정한다면 (물론 천국은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천로역정은 상징으로 읽..

불가능과 가능 사이의 겸손함으로. 신형철 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상처와 치유의 무한반복은 빙빙 도는 원과 같아서,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와 치유의 상대적 기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둘 사이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사람으로 변모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상처의 심연에 정체된 채로 원이 아닌 단 한 점으로 이루어진 인생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삶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낮은 마음으로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거기엔 상처 받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뒤늦게..

분열된,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분신’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내뿜는 장광설에 휘말려 수백 페이지를 거뜬히 넘기는 활자들의 바닷속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말로만 듣던 도스토예프스키를 어디 한 번 읽어보겠노라고 굳게 다짐까지 했던 많은 독자들이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책을 덮게 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장광설 때문일 것이다. 마치 전혀 뜻하지 않은 시공간에서 엉뚱한 적을 만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 것 같은 당혹감이랄까. 여기가 어딘지, 이건 누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딴소리들의 향연은 끝도 보이지 않는 파도가 되어 어느새 독자들을 덮쳐..

‘천국의 열쇠’는 누구에게 주어질까? A. J. 크로닌 저, ‘천국의 열쇠’를 읽고. 제목 ‘천국의 열쇠’는 ‘무엇’이 아닌 ‘누구에게’라고 읽어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지, ‘천국의 열쇠’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만약 그런 열쇠가 있다면 과연 누구에게 주어질지 독자 스스로가 진지하게 질문하도록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신학이나 철학 책이 아닌 소설이기에, 스토리 이면에 감춰진 저자의 목소리는 문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유의 다면체 모습을 통해, 저자와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의 삶까지 닿아 공명을 일으키며 마침내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도록 만든다. 유념할 것은, 이 작품에 사용된 ‘천국’이란 단어가 단순히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말하는 ‘천국’ 혹은 ‘..

위험을 감수하는 환대의 공공신학으로. 최경환 저,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을 읽고. 시대에 따라 정도가 달랐을 뿐 종교 (특히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공적 역할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존재했다. 종교는 항상 정치, 경제, 사회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면서도 암묵적으로는 그것들과 가장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이는 안타깝게도 기독교에서도 유효했다. 정경유착 이면에 일부 보수 기독교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 흔치는 않을 것이다. 과거 부흥의 상징이었던 대형교회는 언젠가부터 대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입었다. 그로 인해 압도적으로 많은 인원을 자랑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을 무기로 하여 정치 선거에서 힘을 마음껏 과시하는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정치, 경제, ..

오직 의인은 ‘충성’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피스티스의 의미 알기. 매튜 W. 베이츠 저,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을 읽고. 스캇 맥나이트는 그의 저서 ‘예수 왕의 복음’에서 오늘날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로 둔갑한 현실을 진단 및 폭로하면서 참 복음이 무엇인지를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복음은 단순히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 받는지에 관한 체계가 아니다. 복음을 개인적, 실존적, 사적인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만 이해한다면, 복음의 일부를 전부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복음은 개인 영혼 구원을 넘어서는 더 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복음은 내가 중심이 되어 ..

가난의 조용한 침투력.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가난한 사람들’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것도 그런대로 먹고살만한, 이를테면 남들보다 적은 월급을 받고 투덜댄다거나,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지 못해 불평을 해댄다거나, 명품 옷이나 신발을 사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사는 정도의 가난이 아니라, 아주 찌들 대로 찌든 가난이 자주 묘사된다. 그 가난은, 가끔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보다 풍족하게 가지곤 하는 연민이랄까 사랑이랄까 따뜻함이랄까 하는 심리까지도 마침내 야금야금 갉아먹고야 마는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는 가난이다. 슬금슬금 육체가 정신을 장악하고 궁극적인 승리의 칼을 꽂아 확인 사살까지 하는 그런 조용하고 무서운 가난. 옳고 ..

자유와 투쟁의 여정: 풍성한 조화로움을 향하여.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영혼의 자서전’을 읽고. |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 책을 덮고 떨리는 숨결로 큰 심호흡을 했다. 눈을 감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크레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투명할 만큼 푸른 바다, 그리고 눈부신 태양과 빛나는 하얀 섬. 그러나 내겐 낯설기만 한 풍경. 크레타의 흙은 무슨 색을 띨까? 어떤 냄새를 낼까? 문득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부는 봄철에 에게 해를 항해하며 그가 느꼈을 충만한 ..

무사와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저,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를 읽고. 나는 철학도 신학도 하지 못하는 일을 감히 소설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주로 이성에 의지하여 문자로 번역해내는 작업이 철학과 신학이라면, 그 문자들이 가지는 본질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이성뿐만이 아닌 오감이 살아 숨 쉬는 삶이라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콘텍스트에 그것들을 오롯이 녹여내어 우리가 보다 깊고 풍성하게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유일한 통로가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이 어렵사리 번역해낸 텍스트가 더 이상 직접적이고 일차원적인 설명이나 물음의 목소리가 아닌 총천연색의 삶이라는 옷을 입음과 동시에 곧장 가려져버려, 텍스트에 의해 소외되었던 원래 ‘무’의 신비까지 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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