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 오후 햇살의 아련함처럼. 오가와 요코 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읽고 나면 벌써부터 여운을 남기기 시작하는 작품이 있다. 보슬비에 옷이 젖듯 가슴 한편에 조용히 의미 있는 파문을 일으켜 오래 기억될 작품이 보통 그렇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았을 때 이미 난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도 그중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이 작품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걸린 시간만큼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적한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가져다주는 그 특유한 아쉬움 같기도 했고, 어릴 적 아빠와 함께 간 공중목욕탕에서 집에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뜨거운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열어 들어온 차가운 공기를 감지하며 닭살이 돋으면서 느꼈..

상상력으로 더 깊은 공감과 풍성한 신앙을.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최후의 유혹’을 읽고. 예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가톨릭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 대한 본격적인 감상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집필 의도를 먼저 소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행여 편협하게 기울어진 자신의 렌즈로 이 책과 이 감상문을 읽어 보지도 않고 함부로 판단하게 될까 하는 염려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다.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까닭은 투쟁하는 인간에게 숭고한 귀감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나는 투쟁하는 인간에게 고통이나 유혹이나 죽음이란 정복이 가능하며 그 세 가지는 이미 정복이 되었으니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진실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

관조적 문체의 명암.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주말 내내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작품이다. ‘어제’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인상 깊게 읽었던 작가였기 때문에, 언젠가 중고서점에서 작가의 이름만 보고 구입했던 책이었다. 약 600 페이지에 달하는데, 시간을 달리하며 독립적으로 출판된 세 편의 단편소설이 한데 묶여있는 형태다. 등장인물은 물론 작품 속 시공간도 서로 겹치거나 연결되기 때문에, 이 책을 펴낸 까치 출판사가 이렇게 세 편을 각각 1, 2, 3부로 구성하여 전체가 마치 한 편의 장편소설처럼 보이도록 기획했던 의도도, 개인적으로 약간 억지스러움을 느끼긴 했으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참고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랑과 길들여짐에 대해서. 프랑수아즈 사강 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프랑스’, 그리고 ‘한 여자와 두 남자’. 잘못 각인된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 상징만으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을 삼각관계를 축으로 한 연애, 치정, 혹은 불륜 소설 이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목만 보고 절대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소설’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법한 이 작품은 ‘브람스’라는 단어로 인한 우리의 즉각적인 인상과는 무관한 연애 소설이다. 그러나 ‘연애 소설’이라는 장르가 암묵적으로 지니는 천박한 이미지로 이 소설을 폄하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작품은 싸구려 삼류 연애 소설에서 흔히 다뤄지는 자극적인 남녀관계를 부각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인간에게 실격은 없다. 다자이 오사무 저, ‘인간 실격’을 읽고. 세상을 탓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그 자체가 비극이다. 그러나 그 비극적인 결말을 자살한 개인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폭력이다.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남모르는 마음고생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은 줄 안다. 이성과 논리가 힘을 잃어버리는 영역에서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자살 충동의 유경험자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탓하며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공격하는 대상은 세상이나 남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

도스토예프스키: 통속과 심오의 혼종, 돈의 위력. 석영중 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읽고. 2년 넘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오면서 나에게 각인이 될 만큼 강한 흔적을 남긴 그의 인상은 무엇보다 인간 본성의 심연을 파헤친 심오한 심리학자의 이미지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성과 속이 함께 하는 인간의 이율배반성은 그의 모든 작품 안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어쩌면 너무나 천박해서 감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인간의 바닥 심성까지 있는 그대로 표현된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 어느새 자신 안에도 동일하게 내재된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인지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톨스토이 역시 인간 본성을 깊이 들여다본 혜안을..

상상력: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위한 다리. 김진혁 저, ‘순전한 그리스도인’을 읽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어 인간의 불완전성을 단박에 증명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나마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신비한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육체에 갇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인 신을 인지하고 알아가는 과정도 우리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상력은 이미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암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이..

또 다른 지옥: 희망 없는 노예 된 삶.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노름꾼’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을 때마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심리에 대한 그의 탁월한 묘사 때문이다. 마치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여다본 것 같은 깊은 통찰은 그만의 고유한 필체까지 탄생시켰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열매를 깊게 한입 베어 물어 맛을 본 독자라면 그의 중독성 강한 필체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이해할 것이다. 나 역시 그 마력에 기꺼이 길들여지기를 자처한 독자 중 하나로서 그의 작품세계를 2년째 여행 중이다. 일반적인 소설가는 중요한 등장인물을 문제에 빠뜨리고 결국에는 구원을 베푼다. 위기 가운데 그 인물이 점점 무너져가는 과정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뒤, 절정에 이르러서는 무..

가정과 개인의 행복: 그 조건과 이유, 갈등과 균형에 대하여. 레프 톨스토이 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한참을 망설였다. 아직도 책상 위에는 쌓으면 하나의 큰 벽돌이 될 만큼 두꺼운 책 세 권이 층층이 놓여 있고, 눈 앞에 펼쳐진 흰 바탕의 워드 파일은 세 시간째 커서만 깜빡이고 있다. 무언가를 써야만 한다는 기분 좋은 의무감에 취해 있으면서도, 나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컴퓨터 스크린만 바라보고 있다. 마흔 언저리,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 여정에서 나는 꽤 많은 문학작품을 만났다. 그중 나를 꼼짝 못 하게 매료시킨 작품을 꼽아보면 그리 많진 않다. 모든 문학작품은 저마다 고유한 사상과 정서를 담고 있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그 무언가를 깊숙이 건드려..

이성과 논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움베르토 에코 저, ‘장미의 이름’을 읽고. 평범한 추리소설의 경계를 가뿐히 허물어버리는 듯한 이 범상치 않은 작품은 역사는 물론 기호학, 과학, 철학, 신학까지 모두 한상에 올려 성찬을 베푼다. 탄탄한 플롯은 스릴감 넘치는 전개와 더불어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약 900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소비되는 물리적 시간마저도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새 꿈만 같은 추억으로, 그래서 다시 꾸고 싶은 꿈처럼 기억되는 작품이다. 소장 가치, 재독 가치가 충분하다. 단, 중세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만약 다시 읽게 될 경우, 당대 주요 철학과 신학의 흐름을 미리 간단하게라도 공부해 놓거나, 이 책에 대한 해제가 담긴 ‘장미의..

열등감 심연에 있는 쾌락.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울과 절망? 수치와 모욕? 소외와 단절? 모두 아니다. 그런 것들은 얕은 곳에 위치해 있어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모습일 뿐이다.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가장 깊은 곳엔 ‘쾌락’이 있다. 그 쾌락의 맛을 본 작품 속 주인공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떤 은밀한, 비정상적인 비열함에서 오는 쾌감을 느꼈고, 어떤 기분 나쁜 뻬쩨르부르그의 밤에 방구석으로 돌아와서는 오늘 또다시 추잡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리고 저지른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했으며, 이것으로 인해 내면적으로 은밀하게 자신을 갉아먹고, 갉아먹으..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재해석된 아담의 신학적 의미. 피터 엔즈 저, ‘아담의 진화’를 읽고. 이 책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아담의 진화’라니! 게다가 저자가 피터 엔즈다. 예상컨대, 그동안 한국의 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에겐 이 두 가지 (제목과 저자)가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조금만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둘 다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아담의 진화’는, 저자가 서론에서 명확하게 밝히듯, ‘아담이 진화했다’라는 말이 아니라 ‘아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진화했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목만 보고 불경함을 느낀 나머지 이 책을 포기한 사람은 십중팔구 진화라는 단어에 대해 반지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잘못된 확신을 가졌을 가능성이..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 미야모토 테루 저, ‘환상의 빛’을 읽고. 강렬한 잔상에 의지하여 급하게 써 내려가는 글도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니지만, 그 거친 글을 묵히고 묵히면서 실 같은 잔상만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수정을 가하며 만들어지는 글은 한층 더 깊이를 가지는 법이다. 원석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발견된 뒤 거치는 숱한 정제 과정을 초고에서 퇴고로 진행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과정을 거쳐 탄생한 글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독자의 마음을 보다 깊숙이, 정확하게, 그리고 단번에 찌르기 때문이다. 살면서 그런 글들을 만난다는 건 값지고 멋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좀처럼 당해내지 못하는 글은 한결같이 놀라운 절제력을 가진 글들이다. 절제의 미학이랄까. 급하게..

슬픔: 기억과 집착이 만든 섬. 모니카 마론 저, ‘슬픈 짐승’을 읽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 낮은 곳에서 용기 내어 나선 길. 그 길 위에서 좋은 길잡이를 만난다는 건 반가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설 즈음, 마치 사춘기를 다시 시작하듯 발걸음을 뗀 독서 여정에서 나에게 신형철은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다. 약 2년에 걸쳐 그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추천한 작품 중 열 권을 읽어 오면서 어느새 내 안에선 조용히 그에 대한 신뢰가 생겨 버렸고, 급기야 나는 책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추천도서 이외에도 그가 각 꼭지에서 다룬 작품 중 마음에 와 닿았던 것부터 하나씩 기회가 되는 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도 그 새로운 여정에서 만난 작품 중 하나다...

풍성한 깊이를 가진 신앙. 이정일 저,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를 읽고. 마흔 언저리,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면서 신앙에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확신에 차 있던 많은 것들이 손가락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의심의 구렁텅이로 떨어졌습니다. 그곳은 어두웠고 저는 외로웠습니다. 자발적 고독이 아닌 강압적 고독을 홀로 견뎌내야 한다는 건 인간의 강함을 훌쩍 넘어서는 영역의 일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보편적인 광야의 이점을 일반화시켜 현재 광야에 처한 모든 개별적인 사람에게 함부로 설파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광야에 처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광야를 다 통과하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내려놓는 게 아니라 내려놓아짐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어떤 새로운 힘을 형성하는 포기가 아닌 죽음을 상..

소설: 방법 이전에 자질. 제임스 설터 저,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읽고. ‘가벼운 나날’을 읽게 되었던 건 전적으로 신형철의 추천 때문이다. 약 2년 전부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조금씩 틈나는 대로 읽어오면서 그가 쓴 꼭지 하나하나, 아니 문장 하나하나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그의 글을 넘어 신형철이란 사람 자체를 신뢰하게 되었다. 진정성 있는 글은 한 번도 못 만나본 사람끼리의 신뢰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평소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에 대해선 상당히 조심하는 편인데도, 그동안 조금씩 견고히 쌓여온 신뢰 덕분에 나는 그가 추천한 책 목록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이었다. 그가 쓴 추천사를 읽고 나서 나는 반드시 이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일종의 의무..

후퇴가 전진이 되다. C. S. 루이스 저, ‘순례자의 귀향’을 읽고. 이 책의 원제는 Pilgrim’s Regress. 저 유명한, 존 번연의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천로역정이 17세기 작품이라면, ‘순례자의 귀향’은 20세기 천로역정인 셈이다. 그것도 루이스의 향기가 짙게 배인 천로역정이다. 재미있게도 두 작품의 플롯은 흡사하지만 (당연하다. 루이스가 천로역정 플롯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제목에 사용된 두 단어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Progress가 ‘전진’을 뜻하는 반면, Regress는 ‘후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천국으로 가는 길이 직선 코스라고 가정한다면 (물론 천국은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천로역정은 상징으로 읽..

불가능과 가능 사이의 겸손함으로. 신형철 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상처와 치유의 무한반복은 빙빙 도는 원과 같아서,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와 치유의 상대적 기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둘 사이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사람으로 변모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상처의 심연에 정체된 채로 원이 아닌 단 한 점으로 이루어진 인생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삶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낮은 마음으로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거기엔 상처 받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뒤늦게..

분열된,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분신’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내뿜는 장광설에 휘말려 수백 페이지를 거뜬히 넘기는 활자들의 바닷속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말로만 듣던 도스토예프스키를 어디 한 번 읽어보겠노라고 굳게 다짐까지 했던 많은 독자들이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책을 덮게 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장광설 때문일 것이다. 마치 전혀 뜻하지 않은 시공간에서 엉뚱한 적을 만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 것 같은 당혹감이랄까. 여기가 어딘지, 이건 누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딴소리들의 향연은 끝도 보이지 않는 파도가 되어 어느새 독자들을 덮쳐..

‘천국의 열쇠’는 누구에게 주어질까? A. J. 크로닌 저, ‘천국의 열쇠’를 읽고. 제목 ‘천국의 열쇠’는 ‘무엇’이 아닌 ‘누구에게’라고 읽어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지, ‘천국의 열쇠’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만약 그런 열쇠가 있다면 과연 누구에게 주어질지 독자 스스로가 진지하게 질문하도록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신학이나 철학 책이 아닌 소설이기에, 스토리 이면에 감춰진 저자의 목소리는 문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유의 다면체 모습을 통해, 저자와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의 삶까지 닿아 공명을 일으키며 마침내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도록 만든다. 유념할 것은, 이 작품에 사용된 ‘천국’이란 단어가 단순히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말하는 ‘천국’ 혹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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