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성을 겸비한 섬세함과 담백함. 미야모토 테루 저, ‘생의 실루엣’을 읽고.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읽은 지 거의 반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도 눈을 감고 그 작품에서 그려낸 한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진다. 아무래도 사람의 뒷모습은 잔상이 오래가는 것 같다. 앞모습보다 언제나 더 외롭고 쓸쓸하다. 연민이 솟아오르고, 왠지 다정해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난다. 어떻게 된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환상의 빛’을 읽을 때나 읽고 나서나 지금까지 나는 미야모토 테루가 여자인 줄 알았다. 물론 소설만 보고서는 저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별해내는 게 항상 100퍼센트 정확할 수는 없다. 그래도 작품을 읽고 나면 대충은 감이 오는 편인데, 유독 ‘환상의 빛’이라는 작품만은 내가 1..

깨어서 저항하기 위하여. 델핀 미누이 저,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읽고. 이 책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시리아 내전에서 총 대신 책을 들었던 젊은 저항자들의 감동 실화” 그랬다. 이 함축적인 하나의 문장이 책의 거의 전부를 담고 있었다. 나는 딱히 덧붙일 말이 없다. 현실에서 있을법하지 않은 일이 공연한 역사적 사실임을 뒤늦게 깨닫게 될 때 느낄 수 있는 묵직한 한 방의 울림. 제삼자의 입장에서 고작 인터넷 뉴스 기사 몇 편으로 시리아 내전의 참혹함을 대충 주워들은 나는 이 책이 주는 무게를 감당할 재간이 없었던 것 같다. 더 깊은 공감을 하지 못함이 송구스럽기만 하다. 기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델핀 미누이는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만들고 운영하며 책을 손에 놓지 않았던 시리아 젊은이들의..

치유의 시작. 요시모토 바나나 저, ‘키친’을 읽고. 미카게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그녀는 부엌을 보고 그 집이 어떤지 파악한다. 낯선 곳에서도 부엌과 친해지면 어려울 게 없다. 부엌은 그녀에게 있어 집이자 안식처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도, 숱한 삶의 냄새도 부엌은 항상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흡수하고 소리 없이 들려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갔다. 일찌감치 고아가 된 이후 미카게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할머니마저도 죽자 미카게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살아남은 건 미카게와 할머니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부엌이었다. 이사하기 전 반년 정도 머물렀던 유이치의 집에서도 그녀를 가장 반겼던 건 부엌이었다. 그녀는 낯섦 가운데서도 그 집의 부엌이 맘에 들었다. 그래서 버틸 수..

완벽한 평화. 애덤 윈 저,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를 읽고. (책의 부제: ‘신약학자가 복원해 낸 메시아 예수 죽음의 비밀’) 모든 게 완벽했다. 언제나처럼 흠 없는 희생제물들은 죽임을 당했고, 성전과 제사장들은 맡은 바 일에 충실했으며, 백성들은 모처럼 만난 가족, 친지들과 회포를 풀며 함께 먹고 마셨다. 전날 밤부터 그날 아침까지 속전속결로 치러졌던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만 제외하면, 로마인에게도 유대인에게도 그해 유월절 행사는 순조롭기만 했다. 모든 게 정상이었고, 모든 게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건 흔히들 ‘거짓 평화’라고 부르는 ‘팍스 로마나’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유대인은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한국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박멸하려고 애썼던 것과는 ..

치밀한 서사에 깃든 지독한 인간의 심리. 정유정 저, ‘7년의 밤’을 읽고. 간결한 단문으로 휘몰아치는 정유정의 필력은 치밀한 서사와 정제된 묘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살아난 텍스트의 모든 여백이 긴장과 스릴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단숨에 빨려 들어갔고, 금세 압도되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작품을 함께 하던 약 다섯 시간 동안 나는 마치 오랜 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다섯 시간이 아니라 닷새가 지난 것 같다. 너무 깊게 몰입한 나머지 일으킨 착각일 것이다. 작가가 창조해낸 가상의 공간, 세령호. 나는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작품 속에 빠져든 나는 잠시 동안 작가의 창조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세령호의 안개가 나를 감싸는 것 같고, 연민과 공포를 ..

저항할 이유. 김학천 글, 황은관 그림,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를 읽고. 감사하게도 나는 아직도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자못 숙연해진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그 공간. 이따금 들리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마저도 마치 그 안에 깃든 영령을 추모라도 하듯 목소리를 아끼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 간혹 붓으로 그린 듯 하얀 구름이 군데군데 떠있던 그 공간. 비록 그 시대를 살지 못했지만,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났던 부모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래서였을까. 하늘을 찌르듯 우뚝 솟은 탑과 숱한 이름이 적힌 위패와 그들이 조각된 커다란 조형물에 둘러싸인 채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 시절, 여름방학 때 고향 부산에 내려가 버스비만 들고 혼..

휑할 만큼 고적하고 아름다운 에세이. 한정원 저, ‘시와 산책’을 읽고. 아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 조용히 압도되는 느낌.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이 휑한 아름다움. 이내 그친 눈처럼 아쉬우면서도 고독함과 애잔함을 잔뜩 머금고 있어,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도록 항상 옆에 두고 싶은 글. 이런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맞이할 때면 나는 경건한 자가 되어 입을 봉하고 눈과 귀만 열어 작가가 그려놓은 세계로 다소곳이 나아간다. 이 책의 감상을 적기에 나는 차라리 벙어리가 되는 편을 택하고 싶다. 그냥 느끼고 받아들이고, 또 젖어보기를 택하고 싶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몇 자 적어본들 하얀 눈에 섞인 까만 먼지가 될까 봐, 그래서 부서질까 봐 염려가 된다. 부디 이 짧은 감상문이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비로소 에세이. 오가와 요코 저,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를 읽고. (책의 부제: 소설가의 쓰는 일, 걷는 일, 사랑하는 일) 감상에 앞서 고백할 게 하나 있다. 이 책을 읽고 오가와 요코가 좋아졌다. 나는 오가와 요코의 글에 빠져들었고 매료되어 버렸다. 그녀의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글은 계속 읽고 싶은 글, 아끼면서 읽게 되는 글, 옆에 두고 싶은 글, 또 읽고 싶어 지는 글이다. 살면서 이런 글을 만난다는 건 평소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맞이할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여러 작가가 쓴 수십 권의 산문집 (혹은 에세이집)을 읽었지만, 이 책만큼 내 마음에 담기는 산문집은 없었다. 아무렴, 에세이는 이렇게 쓰는 거지, 하며 글을 읽는 내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

텅 빈 비밀, 그리고 인간의 탐욕. 움베르트 에코 저, ‘푸코의 진자’를 읽고.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드러나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사람들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건다. 비밀은 그럴 만한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이 그런 힘을 갖기 위해 진실일 필요는 없다.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그렇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비밀은 비밀스러운 힘을 가지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것, 아니 드러나지 않아야만 하는 것, 이를 위한 인간의 집요한 노력, 탐욕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는 열정이 어쩌면 비밀의 본질을 구성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목숨을 바쳐 지켜낸 비밀이 텅 비어있을지라도 말이다. ‘장미의 이름’을 계기로 강한 매력을 느껴 두 번째로 읽게 된 에코의 작품 ‘푸코의 진자’는 이러한 비밀의 ..

쫓지만 쫓기지 않고, 지배당하지 않는 인생. 무라카미 하루키 저,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머리가 복잡할 땐 책을 든다. 그런데 이게 언제나 쉬운 건 아니다. 평소보다 예민한 상태라 아무 책이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선정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네 권의 책을 폈고 모두 열 페이지 이상 앞부분을 읽었다. 그러나 다시 덮고 책장에 꽂았다. 마음에 담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이번 주말에 끝까지 읽게 된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 책이었다. ‘양을 쫓는 모험’. 하루키 책은 묘한 힘이 있다. 어렵지 않고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통속적인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간다. 일필휘지로 써진 글이 아니라 다듬고..

소설의 완성도와 깊이: 보도를 넘어 근원적인 철학적 질문으로. 황정은 저, ‘연년세세’를 읽고. 이틀 전,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함께 느리지만 행복하게 보낸 열흘을 뒤로하고, 내가 집어 든 책은 황정은의 신작 ‘연년세세’였다. 신형철의 소개 덕분에 재작년에 ‘백의 그림자’를 읽고 단번에 나는 황정은의 문체에 반했다. 묵직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나 상황을 평이한 단어와 친숙한 단문으로 덤덤하게 기술하는 그녀의 글은 한강 작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해 출간되었던 ‘디디의 우산’을 읽고 나서는 내 기대가 조금 과장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나는 그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매혹되었던 황정은의 문체는 그대로였는데,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전개가 나의 공감을 사기에는 역부..

인식의 전환: ‘영웅’에서 ‘아무개’로. 박양규 저,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를 읽고.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양팔로 삼고 생물학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러 다양한 생물학 분야는 물론 화학과 물리학, 철학과 신학을 함께 공부한다. 아니, 해야만 한다. 한 분야의 박사라고 해서 그 분야만 공부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흔히들 학문이 깊어질수록 그 학문의 순도가 점점 높아져서 궁극적으로 100%에 도달하는 지점이 가장 깊은 곳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학문의 깊이는 좁고 이기적인 지식으로 무장된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그 깊은 곳엔 다른 학문과의 원활한 소통의 창이 존재한다. 아니, 그러한 창이 없다면 깊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면..

이해가 현장을 만날 때. 이병훈 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를 읽고. -책의 부제: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 책은 노어노문학과 출신의 저자 이병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그의 작품이 남긴 자취를 따라 러시아 곳곳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 성격의 에세이다. 내가 지난 2년 간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그의 초중기 작품 5권 (‘가난한 사람들’, ‘분신’, ‘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로부터의 수기’, ‘노름꾼’)을 읽어온 이유도 어쩌면 이 책을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문학에 대한 조금 더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이해..

일요일 오후 햇살의 아련함처럼. 오가와 요코 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읽고 나면 벌써부터 여운을 남기기 시작하는 작품이 있다. 보슬비에 옷이 젖듯 가슴 한편에 조용히 의미 있는 파문을 일으켜 오래 기억될 작품이 보통 그렇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았을 때 이미 난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도 그중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이 작품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걸린 시간만큼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적한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가져다주는 그 특유한 아쉬움 같기도 했고, 어릴 적 아빠와 함께 간 공중목욕탕에서 집에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뜨거운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열어 들어온 차가운 공기를 감지하며 닭살이 돋으면서 느꼈..

상상력으로 더 깊은 공감과 풍성한 신앙을.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최후의 유혹’을 읽고. 예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가톨릭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 대한 본격적인 감상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집필 의도를 먼저 소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행여 편협하게 기울어진 자신의 렌즈로 이 책과 이 감상문을 읽어 보지도 않고 함부로 판단하게 될까 하는 염려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다.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까닭은 투쟁하는 인간에게 숭고한 귀감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나는 투쟁하는 인간에게 고통이나 유혹이나 죽음이란 정복이 가능하며 그 세 가지는 이미 정복이 되었으니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진실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

관조적 문체의 명암.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주말 내내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작품이다. ‘어제’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인상 깊게 읽었던 작가였기 때문에, 언젠가 중고서점에서 작가의 이름만 보고 구입했던 책이었다. 약 600 페이지에 달하는데, 시간을 달리하며 독립적으로 출판된 세 편의 단편소설이 한데 묶여있는 형태다. 등장인물은 물론 작품 속 시공간도 서로 겹치거나 연결되기 때문에, 이 책을 펴낸 까치 출판사가 이렇게 세 편을 각각 1, 2, 3부로 구성하여 전체가 마치 한 편의 장편소설처럼 보이도록 기획했던 의도도, 개인적으로 약간 억지스러움을 느끼긴 했으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참고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랑과 길들여짐에 대해서. 프랑수아즈 사강 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프랑스’, 그리고 ‘한 여자와 두 남자’. 잘못 각인된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 상징만으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을 삼각관계를 축으로 한 연애, 치정, 혹은 불륜 소설 이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목만 보고 절대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소설’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법한 이 작품은 ‘브람스’라는 단어로 인한 우리의 즉각적인 인상과는 무관한 연애 소설이다. 그러나 ‘연애 소설’이라는 장르가 암묵적으로 지니는 천박한 이미지로 이 소설을 폄하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작품은 싸구려 삼류 연애 소설에서 흔히 다뤄지는 자극적인 남녀관계를 부각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인간에게 실격은 없다. 다자이 오사무 저, ‘인간 실격’을 읽고. 세상을 탓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그 자체가 비극이다. 그러나 그 비극적인 결말을 자살한 개인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폭력이다.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남모르는 마음고생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은 줄 안다. 이성과 논리가 힘을 잃어버리는 영역에서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자살 충동의 유경험자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탓하며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공격하는 대상은 세상이나 남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

도스토예프스키: 통속과 심오의 혼종, 돈의 위력. 석영중 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읽고. 2년 넘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오면서 나에게 각인이 될 만큼 강한 흔적을 남긴 그의 인상은 무엇보다 인간 본성의 심연을 파헤친 심오한 심리학자의 이미지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성과 속이 함께 하는 인간의 이율배반성은 그의 모든 작품 안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어쩌면 너무나 천박해서 감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인간의 바닥 심성까지 있는 그대로 표현된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 어느새 자신 안에도 동일하게 내재된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인지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톨스토이 역시 인간 본성을 깊이 들여다본 혜안을..

상상력: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위한 다리. 김진혁 저, ‘순전한 그리스도인’을 읽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어 인간의 불완전성을 단박에 증명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나마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신비한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육체에 갇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인 신을 인지하고 알아가는 과정도 우리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상력은 이미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암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이..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