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지혜자. 특별함이 사라지면 평범함만 남는다. 하지만, 평범함이 사라지면 특별함도 함께 사라진다. 근간이 사라지면 거기엔 텅 빈 공간만 남는다. 특별함의 존재 이유는 평범함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과소평가는 그것의 무게를 인지하지 못한 무지함이다. 잠깐 빛나는 찰나를 위해 지난한 일상을 견디고 참아내야 한다고 가르쳤던, 옛 거짓 지혜자의 말이 떠오를 때면 나는 종종 분노하곤 한다. 그러나 나도 딱 거기까지. 그 작자들의 가르침이 내게 달콤한 지혜로 들렸던 이유는 바로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자기애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불의는 지혜로 비춰질 수 있었고, 내가 선택한 위선은 군중의 익명성과 관행으로 충분히 해석되어질 수 있었다. 거짓 지혜자는 누군가에게 받는 훈련만으로 탄생하..
Labor day. 한적한 도로. 느지막이 나선 출근길에는 차가 거의 없다. 오전 11시. 바깥 온도는 벌써 화씨 90도를 가리키고 있다. 모든 게 따뜻한 그림 같은 배경이 되고, 나만 그 정지한 시공간을 유유히 움직이는 유일한 존재인 것 같다. 오늘은 Labor day. 공휴일이지만, 그래서 더 게으르고 싶지만, 늦잠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고, 난 주저없이 연구소에 나왔다. 목요일에 있을 학과 전체 세미나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연중행사라서 준비를 잘 해야만 한다. 이번에는, 3년이 넘도록 진행하고 있으며 보스까지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프로젝트를 정리해서 발표할 예정이다. 클리블랜드에서 대면한 인생의 낮은 점과 인디애나에서 맞이한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는 여정 중에 과학자인 내게 처음으로 들어온 프로..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 인생의 후반전을 전반전과 다른 눈으로 살기 시작한 사람들의 반열에 내가 포함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어지간해선 자기계발서를 보지도 사지도 않는 나에게도 이 책 제목은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며칠 전 중고서점에서 난 이 책을 손에 쥐고 의자에 앉아 20분이 넘도록 훑어보았다. 대충 훑어보니 각 챕터의 제목만 봐도 어느 정도 이 책을 소화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구입하지 않고, 대신 목차가 나와있는 페이지를 사진 찍어왔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프롤로그|이 모든 짐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가? 01 내가 잃어버린 날은 웃지 않았던 날이다 02 바람직한 삶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 03 인생에는 중요한 것이 많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안내자. 가장 빛났던 순간도 가장 형편없던 시기로 기억되곤 한다. 시간이 지나서 재해석이 가능해졌을 때에도 여전히 빛나는 순간이 있을까. 과연 나는 오늘 마주친 그 많은 순간들을 어떻게 살아내왔을까. 결국은 해석 아니냐고, 그래서 나중에 해석만 좋게 하면 되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살아보지 못한 자임이 분명하다. 해석자도 재해석자도 자기자신이다. 그 삶을 살아낸 당사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래서 해석은 결코 주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시에, 주관성에만 치우치지 못하도록 끊임없는 도전을 받으며 지속적인 수정이 이루어진다. 그 도전은 특히 ‘자기 객관화’를 요구한다. 어쩌면 성숙함이란 자신을 얼마나 객관화시켜 바라볼 줄 아느냐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적어도 한 번 쯤은 처절하게 무너..
섬. 마음은 젖은 옷처럼 무겁기만 한데, 눈 앞엔 연분홍의 눈부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날이었다.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장관 앞에서 난 이미 몸과 마음이 둘로 쪼개어진 채 차마 그것들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잔잔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 조용히 춤을 추는 자연의 모습들이 모두 나를 조롱하며 수근덕대는 것처럼 얄밉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밝고 아름다울수록 나완 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고, 나를 더욱 대적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무죄를 자랑하며 순수하고 떳떳하게 빛나는 것들이 가장 날선 칼이 되어 아픈 상처를 깊숙이 찌르는 법이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듯, 난 정해진 수순을 밟는다. 고립된다. 조용히 섬이 된다. 내가 우울할 땐 모든 세상도 다 우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러나 망각의 동..
상처. 때론 상처 받아보지 못한 사람의 무감각보다 상처 받아본 사람의 선이해가 더 모욕적이다. 상처의 경험이 훈장이 되어선 안 된다. 그리고 상처는 비교대상이 아니다. 우린 타인의 상처에 대해 어줍잖은 충고를 자제해야 하고, 자신의 것과 비교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상처는 우리를 유경험자로 만들어줄 뿐, 우리를 지혜자로 만들어주진 않기 때문이다. 경험했다고 해서 전문가가 되지도 않지만, 같은 상처라는 게 어디 존재하던가. 모든 상처는 컨텍스트에 깊은 영향을 받지 않던가. 우린 아무도 상처를 원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상처를 통해 얻은 어떤 깨달음도 해석일 뿐이다. 아무리 큰 상처를 받고 성숙해졌다고 해도, 그 경험이 아무리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타인의 상처를 얕잡아..
벽을 넘어서. 분노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멸시는 그렇지 않다. 멸시는 의도된 악의 발현이다. 멸시는 배제와 혐오의 옆자리에 위치한다. 누구나 가진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으로 멸시의 이유를 대며 핵심을 빗겨 가면 안 된다.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는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이기적이라는 이유가 멸시를 낳게 하는 유일한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범인이 군중 속에 숨는 꼴과 같다. 이는 이기심에 의지가 개입될 때와 아닐 때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멸시를 행하진 않는다. 남을 죽이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개입 없이는 멸시는 잉태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멸시는 의도된 악이다. 어쩌면 멸시란, 이기심에 의지를 개입시켜 타자를 향한 억압..
정다각형. 세 명이면 정삼각형, 네 명이면 정사각형, 다섯 명이면 정오각형... 모두 같은 길이의 한 변이 되어, 하나라도 없으면 전체가 와해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 각자가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한 조각으로서 어떤 모임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특히 모임의 지속과 단결, 하나됨,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존재를 위해서. 소속감은 곧 정체성과도 직결되기에 자신의 존재감과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공동체 의식 형성에 필수적이다. 과하게 말해서, 어쩌면 평등하고 공평한 소속감은 우리 일상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삼각형과 사각형, 오각형과 그 이상의 다각형이 언제나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모양으로 존재하진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오늘날..
공동체. 1. 자신이 고독하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만큼 쫓기는듯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기계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유익은 일종의 안정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정감은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어쩌면 고독의 실체를 대면하지 못하게 우리 스스로가 미리 손을 써둔 것일지도 모른다. 빈 손으로 외진 골목 끝에 몰려 그것과 조우하게 되는 날, 비로소 자신이 만들어놓은 견고한 성벽도 모두 허울뿐임을 인정하게 될까봐,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언젠가는 누구나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시기는 다르겠지만, 그 결정적인 순간은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찾아온다고 난 믿는다. 속수무책으로 그 순간을 홀로 감당해내는 시기는 혹독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 ..
살아있음. 과학자로서 살아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예전보단 현저히 그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런 때가 종종, 마치 정말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가 찾아오듯, 오곤 한다. 오늘이 그런 날 중 하나였다. 과학자는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다. 관찰/실험과 가설 사이에 놓인 엉성한 다리 위에서 끊임없는 긴장감과 불안감을 느끼면서 그 다리를 조금씩 견고하게 만들어 나간다. 때론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단편적인 결과에도 조심스레 의미를 부여하며 혼자서 조용히 세운 가상의 시나리오에 남몰래 전율하기도 하고, 때로는 명백하다고 여겨왔던 가설에 문득 의문을 제기하며 며칠 혹은 몇 달은 충분히 끌어안고 갈 깊은 상처와 함께 용기내어 새판을 짜야 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우고 허물고를 지난하게 하다보면 판은 커..
성찰. 비난과 정죄의 이면에는 멸시와 혐오와 배제가 숨어있다는 말에 동감한다. 비난이나 정죄의 말을 듣게 될 때 분노가 이는 이유는 단지 내뱉아진 말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뿜어져나온 화자의 내면의 근원에 나를 향한 멸시와 혐오와 배제가 녹아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난과 정죄를 일삼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은 자신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한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건 단순한 시치미가 아니다. 그들은 진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말을 들을 때 한동안은 참 궁색한 변명이구나 하는 생각 정도로 대충 이해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말은, ‘비난과 정죄..
거짓의 냄새. 어제 일이다. 파네라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차를 몰고 나오는 찰나, 동남아시아인 인듯한 한 남자가 다가와서 나보다 서툰 영어로 다짜고짜 도움을 요청한다. 미리 대본을 준비해온 듯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는다. 발음은 새고 눈빛은 흐리멍텅하다. 1분 가량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다가 내일도 여기 오냐고, 오면 돈을 되돌려 주겠다고 하며 말을 마친다. 그리고 대본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구술했음에 스스로 뿌듯한듯 웃음을 지으며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본다. 왠지 여유까지 느껴지는 웃음이다. 말은 많았으나 요지는 돈을 달라는 거였다. 이유는 나름 논리적이었다. 자신의 차에 연료가 바닥나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했다. 바로 앞에 주유소가 있는데, 하필 자기 지갑을 집에 놔두고 와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이방인. 2018 Tax return할 때 이미 작년보다 돈을 더 많이 냈다. 그런데 IRS에서 메일을 보내어 1500달러 정도의 돈을 더 내라고 했다. Child tax credit에 관해 내가 기입한 금액만큼 허락할 수가 없다는 이유였다. 동의하면 오늘까지 돈을 내야 했고, 동의하지 못하면 전화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출근을 미루고 전화를 했다. 통화시간 총 48분. 결론은 내가 1500달러를 더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18 Tax return부터 Child tax credit을 받기 위해서는 SSN이 필수항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관건이었다. 작년까지는 ITIN으로도 문제가 없었는데 올해부터 규칙이 바뀐 것이다. 트럼프의 정책의 성격을 이렇게 피부로 느껴보긴 처음이다. 그렇잖아도 신분 문제 때문에..
어깨. 단순한 심부름이었는데도, 나는 초록빛의 만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주머니에 넣고 동네 수퍼마켓에 다녀올 때면, 괜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주머니에 혹시나 구멍이 나지는 않았는지, 혹시라도 걸어가다 돈을 흘리진 않을지 긴장하며 주머니 안에 손을 깊숙하게 찔러넣은 채 돈을 꽉 쥐는 등 은근한 스릴을 즐겼다. 왠지 내가 드디어 인정받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만원 짜리를 손에 쥐어도 될만큼 믿음직한 소년으로 성장했다고 증명이라도 받은 느낌이랄까.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좁은 골목길을 내달렸다. 아.. 그때의 쾌감이란. 대학교에 입학하고 첫 여름방학, 나는 내 삐삐 번호가 적힌 수학 과외 전단지를 이곳저곳에 붙였다. 처음 연락 온 곳은 고 3 여학생이었는데, 수학 때문에 수능이 걱정이라 했다. 나와 한 살밖..
#김영웅의책과일상, 100편을 맞이하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이라는 타이틀로 독서감상문을 쓰고 페북과 블로그에 공개한 글이 정확히 100편이 되었다. 2017년 초부터 시작해서 2019년 중반까지 약 2년 반 (약 30개월) 정도 걸렸다. 쉬운 계산으로, 한 달에 3편 이상의 글을 써온 셈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고 글을 쓰자는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사실 100이라는 숫자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지만, 시간을 내어 그 동안 썼던 글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공식적인 글쓰기 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고, 내 일상의 10퍼센트도 차지하지 않는 시간 중에 만들어낸 글들이라 그런지, 의외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글이 점점 더 좋아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때 그때 느꼈던..
보석. 치열한 삶, 자신의 선택이 포함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쫓기는 삶, 쉼이 없는 삶. 매일 이런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건강의 적신호가 켜졌을 때, 그리고 아무런 (혹은 변변찮은) 결과를 지속적으로 얻지 못했을 때입니다. 이 두 가지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요. 이런저런 핑계와 합리화를 해대면서요. 그들은 합리화의 명수이기도 하거든요. “나 이만큼 많이 일해서 이만큼 결과를 냈어!” 하며 정말 쉬고 싶다는 그들의 가식적인 하소연을 저도 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괜히 멋져 보이잖아요. 대단해 보이구요. 하지만 그들에게 쉴 수 있는 기회를 주면 그것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치욕스러운 일은 없을..
만연한 위선. 말로는 배제와 혐오에 저항하고 차별을 폐지하자고 떠들면서도 그들이 일상에서 관계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소위 ‘급’이 되는 분들임을 알게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실망감과 괴리감을 느꼈습니다. 그들 역시 교수나 박사나 목사나 대표 등등의 타이틀이 붙은 사람들하고만 대화를 하며 온오프라인에서의 일상을 살아갑디다. 말과 글은 허세였나요? 그저 형색을 갖춘 밥벌이용이었나요? 마치 연예인들이 어떤 제품을 과하게 선전하고 자신은 전혀 사용하지 않듯이, 공감받을 만한 말과 글로 포장한 뒤 자신은 뒤로 쏙 빠져서 마치 차별이 당연한 듯 일상에서의 위계질서 가운데 평안함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가요? 그렇게 좋은 캠페인을 해놓고 일과시간이 지나면 자기 밑의 사람 부려서 대접 받는 삶을 살아가는 건가..
올가미. 주위에 생각이 비슷하고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축복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 이를 자꾸만 놓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은 자기중심성과 우매함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존중하자 해놓고 막상 자신과 의견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을 만났을 때 뚜껑 열리며 (여기까진 자연스런 감정이니 오케이), 미개한 상대 대하듯 계몽부터 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들을 만난 사례를 희화화시켜서 자기와 말 통하는 지인들에게 그 상대를 돌림빵시키는 행동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혐오와 배제를 멀리하자는 작자들이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는 은밀하게 동일한 짓거리를 한다는 것은 위선일 뿐이고, 그들이 부르짖는 구호는 편가르기의 다른 방편일 뿐이다. 반동적인 세력이 갖는 힘은 이분법..
상대성이론. 낯선 곳에서 시간을 떼우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다자키 스쿠루처럼 역에 앉아 기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주기적인 리듬을 몸에 익히면서 그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람들의 움직임을 좇을 수도 있고, 나처럼 길거리를 큰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며 호기심에 가득 찬 어린아이처럼 간판의 글자를 읽고 진열장의 물건들을 바라볼 수도 있다. 걷다가 힘에 겨울 즈음이면 공원 벤치에 앉아서 푸르름 속에 잠기어 사람들의 여유로움을 간접흡입하거나,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로를 쳐다보며 혼자 멈춰있다는 묘한 만족감에 젖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하여 낯섦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선 상황이 달라진다. 그곳에서는 호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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